591화. 구대천마의 제자들 (1)
그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여느 꿈과는 달리 그 자신의 과거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저 사람은?’
흐릿하게 보이던 누군가의 모습이 점점 확실하게 보였다.
‘헉!’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왔느냐."
왔느냐.
그 짧은 한마디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어느새 등허리가 축축해지고 입 안은 바짝 말랐으며, 손과 발까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후우우웅.
대전의 공기가 달아올랐다.
온도가 올라가고 몸은 식은땀으로 젖었는데, 이상하게 오한이 들었다.
"제법 늘었구나."
대단한 칭찬이었다.
그가 아는 저 절대자는 누군가를 쉽게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했다는 말도, 고생했다는 말도 어지간해서는 해 주지 않는다.
제법 늘었다? 그 말은, 전무후무한 절대자에게 있어 흔치 않은 칭찬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사부님의 은덕입니다."
그렇다.
그 절대자는 바로 그의 사부이자 십만마도의 대종주이며, 살아 움직이는 재앙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천마 이천상.
절대적인 무력을 손에 넣고도 세상에 나가지 않는, 그럼에도 어떤 마인도 감히 불만을 품지 못하는,
나아가 모든 마인이 그의 무공을 절대무적이라 확신하는 초월자였다.
"내 은덕이라?"
"예, 예!"
"나는 네게 준 것이 없다만."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입이 마르다 못해 목구멍까지 시큰시큰했다.
"근래, 제법 재미있는 삶을 보낸다고 들었다."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부님의 얼굴에 미약한 흥미가 드리워져 있음을, 그리고 그 흥미보다 수백 배나 지독한 권태로움이 두 눈 가득 실려 있음을.
"셋째에게 한 방 먹었다고?"
역시나였다. 사부님께선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가 신교의 주인이기 때문에? 신교 내 모든 정보원이 그에게 사소한 보고 하나하나까지 전부 전달하기 때문에?
아니다.
정보원들이 아니더라도 신교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시는 분이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신안(神眼)의 소유자, 어쩌면 사부의 눈은 신교뿐만이 아니라 천하에 닿아 있는지도 몰랐다.
"첫째가 폐관에서 나왔다. 만나 봤겠지?"
"……예."
"극마에 올랐더구나. 대단한 일이야."
"……."
"하지만 그 대단함도 셋째의 존재감 앞에서는 빛이 바래는 듯하다. 알고 있겠지만, 셋째의 무공은 이미 너를 넘어선 지 오래다."
움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느닷없이 주화입마에 걸려 오늘내일하던 머저리 같은 놈. 그런 놈이 어느새 입마에서 벗어나 고죽림에 들어가더니, 굉장한 무공을 연성하여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다시 수개월 후.
자신의 사제이자 나이로도 한참 어린 서량의 무공은, 오랜 세월 목숨을 걸고 무공을 연마한 자신을 한참이나 추월해 있었다.
"극마(極魔)라는 것은 재능이나 노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한 영역이다.
심지어 운이 좋아서 극마에 닿은 이들도 없지는 않아.
그런 면에서 보면, 극마의 경지란 천하 모든 무림인에게 있어 나름의 공평함을 선사해 준 경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내심 놀랐다.
사부님께서는 말씀이 많은 분이 아니었다. 다른 제자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을 앞에 두고 이리 많은 말씀을 하신 적은 없었다.
"첫째와 셋째는 그러한 경지에 올랐다. 지금의 네게는 막막하기만 한 경지겠지."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 그에게 극마지경은 아직 요원하기만 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의 한계조차도 뚫어 본 적이 없었다. 천마신교의 이공자로서 나이에 비해 출중한 무공을 쌓았지만, 결국 그게 전부였다.
뚫고 올라가기는커녕 그 봉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해 방황하는 개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전에 없는 강함을 획득했지만, 그 또한 편법 아닌 편법으로 거머쥔 힘이었기에 더더욱 자괴감이 들었다.
셋째는 그러지 않았을 테니까.
큰형인 진관용조차도 이신합마(二身合魔)의 편법을 연구하다가 극마에 올랐다. 그게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극마지경은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셋째는 달랐다.
놈에게는 편법이란 게 없었다. 분하지만, 무수히 많은 편법으로 지금의 경지에 오른 자신이었기에 오히려 알 수 있었다.
놈은 정통 중의 정통이다. 무공을 연성하고, 무수히 많은 경험으로 깨달음을 체득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의지로 극마지경에 올라선 진짜 마인이었다.
그런 셋째에 비하면 큰형도 애송이일 뿐이다.
강함의 정도를 떠나, 그 위치에 오른 과정부터가 다르다. 지금 당장 두 사람이 정면으로 붙는다 한들, 큰형이 셋째를 이기기는 힘들 것 같았다.
무도(武道)에 거짓은 통하지 않으니까.
아무런 편법 없이 지독한 고행과 순수한 무열(武熱)로 쌓아 올린 경지에는 어떠한 빈틈도 없는 법이었다.
"하물며 셋째는 그저 무공만 뛰어난 무골도 아니다.
녀석은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상식을 넘나드는 술수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는 지혜와 결단력이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셋째에게 패배감을 느끼는 이유였다.
놈은 타고난 무재는 물론 뛰어난 지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고래로 똑똑한 자들 중 고지식한 자를 찾기가 어렵다. 이유인즉, 이미 똑똑하니 고지식해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셋째는 그러지 않았다. 이신합마든 뭐든, 무공을 성장시킬 방법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다. 그걸 셋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놈은 그 어떤 편법도 없이 한 길을 고집했고, 이윽고 극마지경에 올라 완전(完全)의 영역에 도달했다.
‘어쩌면 그조차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는지도 모르지.’
밀려오는 패배감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셋째를 향한 사부의 칭찬, 그리고 새삼 실감하게 되는 그릇의 차이.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을 논해도 부족함이 없는 절대자 앞에서, 그는 저도 모르게 이리 말했다.
"제가 포기하기를 바라십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를 악문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번쩍!
극도의 나른함으로 가득한 마안(魔眼)에 눈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지독한 패배감과 허무함은, 오히려 공포와 위압을 이겨 내는 힘을 선사해 주었다.
"큰형과 셋째가 그리 뛰어나니, 아직 그들의 발치에 이르지도 못한 제가 후계자가 될 확률은 무(無)에 가깝겠지요."
"……."
"그래서 부르신 겁니까?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지 말라고,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싸움이니 이만 무대에서 빠지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습니까?"
그는 전에 없이 흥분했다.
그간 꾹꾹 참았던 울분이 터져 나온 것일까. 평소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말을 격동 어린 외침으로 풀어 나가는 그였다.
"그럴 거라면 왜 저를 제자로 삼으셨습니까! 왜 제게 제대로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으신 겁니까!
제자에게 그리도 무관심하셨던 분이, 왜 이제야 무대에서 빠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없던 동정심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너는 자격이 없다."
"……!!"
"나는 스승으로 실격이다. 하지만 그건 네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야. 모두에게 그러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 이 절대마신은 어느 한 사람을 편애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감정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참으로 공평한 사람이었다. 모두에게 무관심했고,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바라봤으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놔둘 거라면, 잘난 놈만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방치할 거였다면 왜 제자로 삼았단 말인가?
"저는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다."
"어찌……!"
"하지만 넌 선택했었다."
"……?!"
"나는 모든 제자에게 말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내 제자로서 분에 넘치는 영광과 힘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만,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거라 말했다."
"……!!"
"선택하라고 말했고, 결과대로 모두가 선택했다. 너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스스로 선택을 내렸을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때는 저희 모두가 어렸어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나이에 그런……!"
"어르고 달랬어야 했던가?"
"……!!"
"내게 그런 것까지 바랐던 것이냐?"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건……."
"그 부분을 내게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너 자신의 무능함과 치졸함을 드러내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하지만 저는!"
"첫째와 셋째는 단 한 번도 후회 따위 하지 않았다."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렇다. 셋째는 말할 것도 없고, 저 치사하고 악랄한 진관용 역시 단 한 번도 지금의 상황을 후회한 적이 없다.
그저 나아갈 뿐이다.
내 환경이 이러하니, 이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뿐이었다.
‘……!’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그 괴물 같은 사형제들과 자신의 차이를.
그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을 넘어 비난을 쏟아 내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에서,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나갈 뿐이었다.
저 마신이 두려워서? 그렇지 않다.
불평불만을 토로해 봤자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의 자신처럼 감정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마신의 질책을 들어 봤자, 더 나은 삶을 쟁취할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행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불평과 불만이 아닌,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기 위한 추진력과 노력뿐이다.
큰형과 셋째는, 그 젊은 나이에 극마지경을 돌파한 희대의 괴물들은 이미 그것을 깨닫고 있었으리라.
"이만 빠지거라."
"……."
"그런 태도로는 첫째와 셋째는 물론이거니와, 다섯째조차도 넘어설 수 없다."
절대자의 두 눈에 매서운 마기가 번뜩였다.
"분명히 말해 두마. 자신의 패배를 깨달았음에도 더 나아갔다간, 넌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갈구하게 되겠지. 삶과 미래를. 신교의 주인이자 사부인 내가 아닌, 널 패배로 몰고 간 경쟁자들에게 목숨을 구걸하게 될 것이다."
"……."
"선택해라."
그는 선택했다.
"끝을 볼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등을 돌렸다.
"절대 이 무대에서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혹여 경쟁자들에게 패배한다면, 그때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악할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대전을 떠났다. 실제로 거기까지가 기억의 끝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꿈의 세계는 그가 그때는 듣지 못했던 절대자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위태로이 대전을 나서는 그의 등을 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하는 마신의 얼굴이 보였다.
"……네 미래가 보여 불렀다. 하지만 넌 또다시 그와 같은 선택을 내렸구나."
* * *
관평은 눈을 떴다.
기다렸다는 듯 마인 하나가 문을 두들겼다.
"지, 지부장님!"
"무슨 일인가."
"교주님께서 오셨습니다!"
"……!!"
"어, 어떻게 할까요? 일단 귀빈당으로 모시는 것이……!"
"되었다."
관평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교의 교주님이시다. 내가 나가서 맞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