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3화. 구대천마의 제자들 (3)
"으으음."
화르륵. 화르르륵.
몸 곳곳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평소처럼 선명한 핏빛의 화염이 아니었다. 마치 탁한 무언가가 섞인 듯 검붉은 빛을 띠는 화염은 어딘지 모르게 불길해 보였다.
‘어설펐다.’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운공에 집중하는 마동필.
그러나 그의 의식 한 조각은 지난 전투를 복기하고 있었다.
‘초전 일격을 기습으로 처리했다면 이런 중독 증세를 겪을 일도 없었어.’
물론 기습을 하지 못한 이유도 분명히 있었다.
당양충의 무공은 대단했다. 그는 독의 한계를 넘어 깨달음으로 화경의 경지에 오른 진짜 강자였다.
그만한 강자가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극독까지 자유자재로 다룬다.
마동필의 경지가 뛰어나고 구유마공의 화력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쉽사리 접근할 수는 없는 상대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마동필은 알 수 있었다.
놈을 상대하던 자신의 전술이 결코 최선은 아니었음을.
‘적은 당양충 하나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섬멸할 수는 있었지만, 자칫 그 화포가 마차로 향했다면 당양충을 쓰러트리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왔을 터.’
주르륵.
질끈 깨문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나왔다.
‘오만했던 것이다. 경지가 오르고 실력이 늘었다고 최선을 잊고 있었어.
나보다 강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들, 최고의 출력으로 최단 시간에 승부를 볼 각오로 임해야만 했다.’
그는 신교에서도 흔치 않은 고수였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지만, 기실 그의 무공은 구대마존 중 상위 몇 명을 제외하면 당해 낼 자가 없을 정도였다.
즉, 천마신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란 말이다. 오만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의 정체성이었다.
‘나는 지키는 자다. 죽는 그 순간까지 호위무사의 본분을 잊어선 안 돼.’
호위무사는 지키는 자이며, 호위 대상의 안전을 위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적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역할은 살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암살자가 일격에 목표 대상을 죽이고 빠져나가는 것처럼, 호위무사 역시 최단기간에 적을 제거하고 호위 대상을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시켜야만 한다.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실책을.’
실책이라고까지 할 만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당양충을 잡았고 휘하 노고수들도 모두 제거했으니까.
그러나 다음에 또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가 문제였다.
‘내 맡은 바를 다하고 쓰러진다면 웃으며 죽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홀로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죽는 것만도 못하다.’
화르르르륵!
구유마화가 거칠게 포효했다.
혈도 곳곳에 자리한 반양신독이 성난 화기 앞에 마구 날뛰었다. 갈고리 모양의 독 입자가 당장이라도 혈맥을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고통. 그러나 마동필은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
‘혈도가 찢어지든 혈맥이 파열되든, 계속해서 독을 품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재차 마음을 다잡는 마동필.
그 잠깐의 변화만으로 마기의 움직임이 훨씬 활발해졌다.
치이이이익.
몸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더 높아진 화기에 비로소 반양신독이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수도 없이 시도해 왔지만 제대로 배출하지 못했던 독이, 이제야 비로소 증발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변화,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이것이다.’
반개한 마동필의 안광이 점차 선명한 마력을 발산했다.
‘이게 바로 진정한 나야.’
무공의 경지가 상승할수록 진기의 농도가 짙어지고, 진기의 농도를 짙게 만드는 것은 결국 강렬한 염원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즉, 고수일수록 마음과 의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말이다. 칼질 한 번에 바위도 쪼개 버리는 고수라도, 마음이 불안정하면 돌멩이 하나 쪼개기 힘든 것이다.
물론 그 정도로 극단적인 무공 저하를 보인 예는 없었지만, 요(要)는 그만큼 정신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치이이이이익!
무서운 화기 앞에 벽이 녹았다.
폐관 수련을 위해 만들어진 두꺼운 철벽이 녹아 버릴 정도의 화력이었다. 구유마공이 극한까지 개방되고 있는 것이다.
화아아아악!
공기가 통하는 배출구 쪽으로 시커먼 연기가 흘러갔다.
반양신독이었다. 하지만 이미 구유마화에 산산이 분해된 터라 사람이 들이마신다 해도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독을 뽑아냈을까.
"쿨럭!"
마동필이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동시에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혈맥 곳곳을 틀어막고 있던 독기를 싹 제거하니, 자연히 피가 맑아지고 그 흐름 또한 원활해진 것이다.
"후우우."
눈을 뜬 마동필이 마공을 수습했다.
훅! 치이이이이익!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며 엄청난 양의 수증기를 만들어 냈다.
덜컹.
문을 열고 나선 마동필의 눈에 문득 한 명의 사내가 보였다. 한참 떨어진 복도 벽에 기대 있는 자, 바로 관평이었다.
관평이 툭 던지듯 물었다.
"끝났소?"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고 독을 제거할 수 있었소. 감사드리오."
"엄청난 화기로군. 벽이 다 녹았겠소."
"면목이 없소."
"월봉도 많이 받을 텐데 나중에 보상하시오. 당신 앞으로 청구하리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마동필은 그 말을 진담으로 받았다.
"당연히 그러겠소."
관평이 피식 웃었다.
"됐소. 당신은 여전히 딱딱하군."
마동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는 당신은 많이 달라진 것 같소."
"그래 보이시오?"
"그렇소."
"어떤 면에서?"
"나와의 대련으로 점차 실력이 늘어 감에 따라 당신의 마음에도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고 있소.
하지만 그때의 변화는 과정이었을 뿐, 온전한 자신을 찾은 걸로 보이진 않았소."
"지금은 달라 보이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소."
관평이 고개를 저었다.
"예전과 달라진 건 별로 없소. 그저 현실을 인정했을 뿐."
그 하나의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사람이 그렇다. 변화를 위해 몸부림을 칠 때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나, 문득 마주한 깨달음 하나에 마음을 고쳐먹으면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기 마련이다.
관평이 그러했고, 마동필 역시 그러했다. 만일 그가 서량을 만나지 않고 끝까지 딱딱하게 살았다면 지금의 그도 없었을 것이다.
"갑시다. 이럴까 봐 미리 인부들을 불렀소."
"알겠소."
복도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온 두 사람이 지부의 후원을 걸었다.
마동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멋진 곳이구려."
관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유배지치고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곳이지."
"말에 뼈가 있구려."
"유배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소. 그 덕분에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많았으니까."
마동필이 관평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때보다 더 강해졌소이다."
"마 호위라고 다르지 않소. 오히려 성장의 폭으로 보자면 나보다 더한 것 같은데."
마동필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느껴지시오?"
"나는 당신 같은 괴물이 아니오. 다만 내가 당신보다 앞서는 게 하나 있지."
관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신교 내에서, 총군사 호요성을 제외하면 나만큼 신교 마공서를 많이 본 사람이 없을 것이오."
"……."
"이런저런 실험도 많았지. 내 부족한 재능을 메우기 위해 온갖 마공서들을 탐독했고, 실제로 익혀 보기도 했소."
"대단하군."
"대단할 것 없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패배자로서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것에 불과하니까.
나 역시 재능이 출중했다면 굳이 그런 데에 시간을 소모하진 않았을 것이오."
관평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아는 거요. 당신의 발치에 이르지 못한 무력으로도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알지. 물론 그 역시 짐작에 불과할 뿐이지만."
마동필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말 스스로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시오?"
"그렇소."
관평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재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
마동필이 마주 웃었다.
"정말 많이 달라지긴 했소이다."
"그걸 아는 데에 대단한 깨달음은 필요치 않잖소."
"인정하기까지가 어렵지."
"그렇지."
의외로 대화라는 게 된다.
과거, 반년 내에 극마에 오르지 못하면 죽일 거라는 서량의 요구에 관평은 목숨을 걸고 단련했다.
그리고 그 단련을 위해 마동필과 생사를 도외시한 비무를 수백 번이나 치렀다.
그러고도 두 사람 사이에는 딱히 대단한 친분이랄 게 쌓이지 않았다.
워낙에 성향이 다르기도 했고, 마동필은 서량을 위했지만 관평은 그를 끔찍하게 증오한 탓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마치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오래전 같은 부대에서 전투를 치른 전우를 만난 것처럼, 반가우면서도 묘한 어색함을 간직한 사이처럼 보였다.
"얼마나 지났소?"
"당신이 폐관실에 들어간 지 딱 닷새가 되었소."
"닷새라…… 꽤 오랜 시간이 흘렀군."
마동필의 얼굴에 피로가 묻어 나왔다.
관평이 턱으로 대숲 너머를 가리켰다.
"애들 숙소가 저 너머에 있소. 당신 숙소도 마련해 두었으니 가서 쉬시오."
"교주님께서는?"
"내 집무실에 계시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 말씀드렸지만, 그 고집을 어떻게 막겠소. 한시도 쉬지 않고 문서 분류에 열을 쏟고 계시오."
"교주님다우시군."
"그만하시라고 청을 올려야 하지 않소?"
"막는다고 당신 하시던 일을 멈추시는 분이 아니오."
"그건 그렇군."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잘 닦인 길의 끝이 보였다.
마동필이 말했다.
"바쁘신데 괜히 예까지 오시게 했소. 죄송하오."
"마 호위."
"말씀하시오."
"교주님께서는 열흘 안에 정보를 분류하라고 하셨소. 그리고 닷새가 지났으니, 남은 시간도 닷새뿐이오."
"한데?"
"나는 이 업무를 사흘 안에 끝내 볼 생각이외다."
그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리던 관평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틀 정도 시간이 나면, 나와 대련을 해 줄 수 있겠소?"
마동필이 크게 웃었다.
"얼마든지."
"고맙소."
* * *
사흘 후.
"이제 정리가 끝났군."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나보다는 자네들이 고생 많았지."
탁자 위에 펼쳐진 문서들을 훑어본 서량이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렇구만. 하북, 그것도 북경 쪽으로 집중되고 있었어. 이 많은 물자와 돈이."
"그렇습니다."
관평이 눈을 빛냈다.
"움직임이 몹시 불규칙적이로군요. 일정한 흐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당연히 그렇겠지. 담사영은 뱀 같은 놈이야.
준비성이 꽤 철저한 편이지.
지금의 나처럼 물자와 돈의 흐름을 알아보는 놈이 있을 것을 고려해, 그 시기를 파악할 수 없도록 일부러 이런 식으로 보급을 받았을 거야."
"나름의 규칙이란 게 없으니, 물자와 돈을 끊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들 역시 비품을 만들어 두었을 텐데요."
"그랬겠지."
관평이 서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교주님께서 직접 가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아마 그랬다간 담사영이 냅다 도망쳐 버릴 거야. 워낙에 약삭빠른 놈이거든."
"음."
"기다리면 알아서 찾아올 놈인데, 굳이 내가 먼저 건드릴 필요는 없지."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완전히 고립시키려면 이 물자부터 끊어 버려야 할 터인데, 그조차 쉽지 않다면 결국……."
"걱정하지 마. 이럴 줄 알고 강서상회에 미리 말을 해 두었으니까."
"예?"
서량의 눈이 빛났다.
"강북의 경제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버릴 생각이다."
관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때였다.
"지, 지부장님!"
"무슨 일이냐."
"스스로를 남궁세가의 가주라 밝힌 자가 찾아왔습니다!"
관평이 서량을 보았다.
서량의 얼굴에 아련한 빛이 감돌았다.
"들여라. 필시 날 찾아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