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6화. 와신상담의 끝 (2)
당호(唐虎)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퍼어어어엉!
"크아아아악!"
"물러나! 이진(二陣)도 물러나라!"
"각주님! 무형지독이 통하질…… 크악!"
쾅! 콰르르릉! 퍼어어엉!
온갖 굉음과 폭음이 당가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당황한 당호의 고함에 신임 암룡각주 당괴가 외쳤다.
"적습입니다!"
"적습이라니? 대체 어디서!"
"마, 마교입니다! 마교주가 직접 왔습니다!"
"뭐라?!"
당호는 기겁했다.
안 그래도 마교주가 세상에 나왔다는 말을 듣고 전대 가주님께서 전대 장로들과 함께 움직이신 참이었다.
서천사신 당양충과 그를 따르는 노고수들, 그리고 그들이 들고 간 신형 화포와 폭우이화침을 생각하면 대문파 하나도 손쉽게 증발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설령 당대 천하제일인인 마교주라도 능히 잡을 수 있을 줄 알았거늘, 나갔던 노고수들은 다 어디로 가고 마교주가 나타났단 말인가?
후우우우웅!
대기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하늘에서는 벼락이 내리치고, 땅에서는 시뻘건 불덩이가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말도 안 돼!’
이게 정말 적습이 맞단 말인가? 느닷없이 천재지변이 터진 게 아니란 말인가?
비유가 아니었다. 진짜 벼락과 진짜 불덩이가 사방을 휩쓸고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다룰 수 없을 최강의 힘이 당가 전체를 들쑤시고 있었다.
그때였다.
‘……!!’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일순 확 조여드는가 싶더니, 저 멀리서 한 줄기 빛이 번뜩였다.
콰아앙!
당호가 입을 쩍 벌렸다.
‘불기둥?!’
그렇다. 그건 불기둥이었다.
아름드리나무보다도 더 크고 굵은 불기둥 하나가 화포로 쏘아 낸 것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그 크기 자체가 굉장해서 쉽게 피할 수가 없었다.
파아아악!
당호는 재빨리 좌측으로 신법을 펼쳤다. 가주 대리를 맡고 있지만, 체통을 지킬 여유 따위는 없었다.
불기둥이 그대로 내원을 휩쓸었다.
콰르르릉!
아무래도 그저 크고 뜨겁기만 한 불이 아닌 모양이었다.
불기둥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가 모조리 부서지고 박살 나 흩어졌다. 흩어진 전각 조각과 시체는 한순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당호는 혼이 나갈 것 같았다.
‘대체 어떤 화기(火器)를 들고 왔기에?!’
전대 가주님께서 직접 시연하셨던 폭뢰정은, 그 크기는 작지만 일반 화포의 열 배에 달하는 화력으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저 불기둥은 폭뢰정의 위력을 아득히 능가하는 파괴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초고온의 불꽃이 소용돌이치며 허공을 날아 작렬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쾅! 콰앙!
마치 거대한 공성추가 음속(音速)을 능가하는 속도로 여기저기를 들쑤시는 것 같았다.
외원 곳곳에서 굉음이 터졌고, 전각 십여 개가 거의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상상키 어려운 위력의 무언가로 인해 밑동부터 박살이 나 버린 것 같았다.
"제기랄!"
욕설을 내뱉은 당호가 연이어 외쳤다.
"전력을 뒤로 빼라! 전부 내원 뒤로 물리도록 해! 외원 연구실의 중요 자료만 골라서 퇴각……!"
그때였다.
‘……?!’
당호의 눈이 흔들렸다.
벼락이 쏟아지고 불기둥이 치솟는 저 지옥 같은 파괴 현장의 가운데.
축 늘어진 누군가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실로 묶인 것처럼 사지를 맥없이 늘어트린 그는, 어찌나 험한 꼴을 당했는지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당호는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전대 가주님!!"
그렇다. 그는 바로 당양충이었다.
‘설마 전대 가주님께서?!’
그럴 리가 없었다. 애초에 본가를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거니와, 지금 당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벼락과 불은 어떠한 화기로도 자아낼 수 없는 파괴력의 극치였다.
게다가 얼핏 보기에, 전대 가주님께서는 정신을 잃고 계신 듯했다.
‘허공섭물이라고?’
말도 안 되는 경지였다.
저 정도 높이까지 사람을 띄울 수 있다니? 무공을 익힌 이래, 저런 경지는 꿈도 꿔 본 적이 없었다. 저런 건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때, 당호의 귓가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거기 있었나?"
당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권태로움과, 그 권태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살기가 그에게 지독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누, 누구?!’
콰아아앙!
외원과 내원을 나누는 거대한 벽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파지지직! 퍽! 퍽!
사방을 휩쓰는 전광에 당한 무사들이 그 자리에서 줄줄이 쓰러졌다. 쓰러진 무사들의 몸 곳곳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내부로 파고든 뇌기(雷氣)가 제멋대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푸스스스스.
시커먼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연기와 불꽃, 벼락과 피 보라가 만들어 낸 지옥도 속에서 한 명의 건장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르르.
당호의 양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 왔다.
시커먼 전포를 걸친 청년의 외양은 실로 감탄을 자아냈다. 거의 칠 척에 다다른 키에 어깨는 산악이라도 떠받들 듯 쩍 벌어졌고, 의복에 가려진 팔다리도 무쇠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무인의 체격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대단한 것은 청년이 내뿜는 이질적인 기파였다.
"……마교주!"
당가의 상공을 장악한 절대마기(絶代魔氣).
벼락이나 불기둥이 아니더라도, 저 마기 때문에 호흡이 턱턱 막혔다.
아마 마교주를 본 모두가 그런 현상을 겪었을 것이다. 그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비할 데 없는 마기가 자연스레 체내로 스며들어 신체의 자유를 박탈해 버린다.
바로 지금의 당호처럼.
툭.
본능적으로 품에서 꺼낸 폭우이화침이 땅에 떨어졌다.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초절정에 이른 무력, 능히 일파의 종주라 불릴 만한 무공을 쌓았음에도 제대로 된 공격 한 번을 선보일 수가 없었다.
"너로군."
이십 장도 넘게 떨어져 있는데도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
"역시 당가는 당가야. 어지간한 중진은 다 잡아들였거늘, 아직도 이만한 인재를 보유하고 있었단 말이지."
칭찬이라면 칭찬일까.
하지만 당호는 마교주의 감탄 어린 목소리에 뿌듯함보다는 지독한 공포를 느꼈다. 그의 다음 표적이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직감은 정확했다.
훅.
당호의 눈이 커졌다.
이십 장 밖에서 걸어오던 마교주가 어느새 그의 코앞에 서 있었다.
‘크다!’
멀리서 봤을 때도 컸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니 커도 보통 큰 체격이 아니었다. 장대하다는 말이 너무나도 어울리는 몸이었다.
서량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병력을 뒤로 뺐군. 지금쯤 도망친 놈들도 많을 테고."
"이익!"
"미안하다만, 나는 지난 제국처럼 물렁물렁하지 않아서 말이다."
서량이 하얗게 웃었다.
"오늘, 사천의 당씨는 단 하나도 남김없이 뿌리를 뽑을 것이다."
"이, 이노옴!"
그때, 당호가 선 땅에서 두 줄기 불꽃이 올라왔다.
마치 뱀처럼 솟아난 두 개의 불줄기가 그의 양 발목을 타고 올라오더니, 허벅지에서 확 타올랐다.
퍽!
"크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당호가 쓰러졌다. 어느새 두 다리가 잘려 나간 것이다.
"주, 죽여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다만……."
서량의 손이 당호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손이 워낙 커서 머리의 절반이 덮일 정도였다.
"네놈이 병력을 어디로 빼돌렸는지는 알아봐야지?"
우우우우우웅!
"컥!"
당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군림마황기의 사령수(死靈手)였다. 백회혈로 파고든 고농도의 마기가 그의 기억 하나하나를 뽑아 서량에게 전달했다.
‘이럴 수가.’
의식이 서서히 멀어졌다.
당호는 죽는 그 순간까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이 악마 같은 놈이 정녕…….’
파삭!
이내 당호의 몸이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육신이 서량의 마기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흐음."
서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애들을 빼돌렸군."
그렇다.
당가라고 독과 암기를 익힌 무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당가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비밀 통로를 이용해 성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이들까지 건드릴 순 없지.’
그건 당연했다. 사람을 죽이고 문파를 없애는 행위에 어찌 도(道)를 따지겠느냐마는, 서량은 자신이 세운 확고한 원칙만큼은 지키려 했다.
‘다만, 잡기는 잡아야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호의 기억을 더듬어 본 결과, 그 아이들 모두가 당가의 비전을 물려받은 핏줄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면 결국 또 다른 당가를 만들 것이다. 제국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맥을 이어 지금의 가문을 만든 선조들처럼.
"나중에 해도 되겠지."
사령수로 끌어온 기억은, 시전자가 일부러 지우지 않는 한 끝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다.
게다가 사천을 정리하고 나면 이곳에 하오문이 크게 득세할 것이다. 도망친 당가의 핏줄들은 그때 잡아들여도 늦지 않으리라.
"자, 슬슬 마무리를 해 볼까."
서량이 사방으로 쌍장을 휘둘렀다.
쾅! 콰르르릉!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가을날.
사천당가가 멸문했다.
* * *
"문주님!"
"무슨 일인가."
"사천당가가 멸문했습니다!"
공야치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사천에 진입한 지 얼마 안 되셨다고 들었는데?"
"그, 그게……."
초해 역시 보고가 믿기지 않는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교주님께서 홀로 당가의 정문으로 들어가신 후,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멸문하였다고 합니다."
"……!"
"당가 병력의 구 할이 증발했습니다. 생존자는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갔는데, 그 통로의 위치와 방향을 교주님께서 직접 적어 전달해 주셨습니다."
"직접 전달해 주셨다……."
공야치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 당장 하오문의 정보원 중 이 할을 떼어 사천으로 보내게."
"지, 지금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당가는 멸문했지만 그들의 지식과 절기를 이어받은 생존자가 있다면, 아직 그 맥이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는 것이야. 우리는 바로 그들을 쫓으면 되네."
"하지만…… 생존자 중에는 아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잡으라고 한 것이네. 만일 남녀노소 구분 안 하고 모두 죽일 생각이셨다면, 굳이 우리에게 이런 서신을 보내지도 않으셨을 거야."
"아! 하면 교주님께서는?"
공야치는 저도 모르게 팔뚝을 쓰다듬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당가의 역사를 이번 세대에서 끝내 버릴 생각이신 거라네."
초해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독하기 짝이 없는 손속이었다. 아무리 한 문파를 멸문시킨다 해도, 보통은 그 문파의 무공과 역사마저 불살라 버릴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가는 실질적으로 사천의 주인 역할을 해 왔어. 청성과 아미가 버티고 있는데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들의 힘이 위협적이었다는 뜻이지."
"그건 그렇습니다."
"차후 교주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때, 당가는 분명 문제를 일으킬 거라네. 그들은 원한을 결코 잊지 않으니까."
초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님께서 왜 이리 독하게 손을 쓰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정화 작업인 것이지."
공야치가 눈을 빛냈다.
"그래서, 당가 다음은 어디라고 하시던가?"
초해가 침을 삼켰다.
"청성파입니다. 아마 교주님의 무공이라면…… 지금쯤 청성산에 도착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