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화. 와신상담의 끝 (3)
청성산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푸르른 산세를 자랑하던 사천 도맥의 중심지가 마신의 재앙을 감당치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본디 산중 문파들은 속세의 문파처럼 하나의 영역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는다. 본관은 있되, 사방에 도관을 세우거나 폐관장을 만들어 놓고 산 곳곳에 퍼져 수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성파 역시 그러했다. 본산 도관은 있으나 도사들은 무수히 많은 도관과 암자로 퍼져 제각기 수련에 힘을 쏟았다.
아마도, 예전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구파일방의 하나, 정파 무림의 기둥이라 불리는 최고의 문파 중 하나니까.
하지만 지금의 청성산은 그렇지 않았다. 담사영의 마수에 걸려 수행자로서의 품격을 잃고 속세에 눈을 돌린 도사들은, 타락한 자신들과는 달리 순수함을 잃지 않은 수행자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본관이 불에 타고 청성산 전체가 신음하고 있음에도, 산봉우리 각지에 퍼진 소수의 청성문인들이 나서지 않는 이유였다.
그들은 수백 년 역사가 무너져 내리는 걸 보며 피눈물을 흘렸지만, 차마 그곳으로 향하지 못했다.
본관으로 가면, 사방에 재앙의 힘을 흩뿌리고 있는 마신이 아니라 동문들을 향해 검을 겨누게 될 것이 자명하니까.
욕망에 휩쓸려 온갖 악독한 짓을 저지르는 문파로 전락하느니, 차라리 마신의 분노로 깨끗하게 불타 버리는 것이 나으니까.
동문인데도 나서지 않는 수행자들. 그간 담사영과 함께 부귀영화를 누렸던 청성파의 수뇌부들이 얼마나 지독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쿠구구구궁!
본산 도관 수십 개가 무너져 내렸다.
본디 청성파의 도관은 하나같이 고풍스러웠다. 세월의 풍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도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에 가까웠다.
하지만 청성 장문인이 담사영과 손을 잡은 후, 청성 본관의 도관들은 모두 새로 지어졌다. 휘황찬란한 외양으로 탈바꿈한 건물들은 도관이 아니라 고관대작이 사는 대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화려한 건물 중, 멀쩡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서량이 내뿜는 뇌화(雷火)에 휩쓸려 모조리 반파되어 버린 것이다.
"후우."
본관을 몽땅 날려 버린 서량이 어깨를 매만지며 하산했다.
"이 짓도 꽤 귀찮군."
수백 도사를 몰살하고 수십 개의 도관을 날려 버린 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청성산을 내려오던 서량은 한 개울가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이만 나오게."
기다렸다는 듯 십여 명의 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산 도관에서 서량의 손에 목숨을 잃은 도사들과는 전혀 달랐다. 본산의 도사들이 걸친 도복의 화려함이 무색하리만치 탁한 눈빛을 머금고 있었다면, 지금 나타난 도사들은 비록 낡고 수수한 도복을 입었으나 두 눈은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청성의 수행자들인가."
도사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가만히 그들을 보던 서량은 이내 흥미를 잃었다는 듯 재차 걸음을 옮겼다.
그때, 한 도사가 입을 열었다.
"서 교주라 하셨소?"
서량이 뒤를 돌아보았다.
침묵을 깬 중년 도사가 고개를 숙였다.
"청성산 청운봉(靑雲峰) 적하암(赤霞庵)의 암주 송헌(松獻)이라 하오."
물끄러미 송헌을 보던 서량이 입을 열었다.
"천마신교 삼십육대 교주, 서량이다."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내 송헌이 한숨을 쉬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해야 했을 일을 대신해 주어서 고맙소."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물론 그대들이 할 일이었지. 동시에, 지금 그대들의 힘으로는 절대 해내지 못할 일이기도 했어."
"……."
"다만, 그들 또한 그대들과 한솥밥을 먹던 도사들이었거늘 복수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송헌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모두가 나서도 할 수 없는 일을, 서 교주는 홀로 끝냈소이다. 힘으로도, 명분으로도 그대를 건드릴 수 없소이다."
일순 서량의 눈이 차가워졌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셔야지. 힘이나 명분의 문제가 아니잖나? 이미 본관 도사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린 거 아닌가?"
"……그렇소."
송헌이 탄식했다.
"서 교주의 말씀이 옳소."
"산중의 수행자들이니 속세의 더러운 수법에 정통하긴 어렵겠지. 그래도 그대들은 뭐라도 해야만 했어. 그 길의 마지막이 죽음이라 하더라도."
"……."
"청성이 이따위로 변질한 것은 분명 담사영과 본관 도사 놈들의 탓이다. 그대들의 죄는 없다."
"……."
"그러나, 그대들 역시 청성의 이름을 짊어질 자격이 없어 보이는군. 저들이 저 난리를 치는 동안 사천의 양민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알았다면, 암자에 틀어박혀 원시천존이나 외치고 있었으면 안 되었다."
도사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송헌이 이를 악물었다.
"우리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소? 다만 지금이라도 서 교주 앞에 나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준 당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외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 좋으라고 한 일이 아니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
"다만 너희가 진정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문파의 맥을 잇겠느니 청성의 영광을 재현하겠느니 하는 헛생각 품지 말고, 지금이라도 사천의 양민들에게 봉사하라. 그거면 될 것이다."
그때, 도사 하나가 불쑥 목소리를 냈다.
"청성이 살아야 양민들의 삶도 안정시킬 수 있소."
"아, 그러신가?"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본관의 도사 놈들이 지금껏 저 지랄을 떨었던 것이냐?"
"그것은 지극히 우연……!"
"입씨름하기도 싫고, 피를 더 보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하나만 묻겠다."
서량이 검지로 도사를 가리켰다.
"너, 진정으로 청성이 살아야 양민도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물론이오."
"진심으로?"
"그, 그렇소."
"다시 묻는다. 진정 천하를 생각했고, 사천의 정세를 읽어 보았으며, 나아가 양민들의 현실을 직접 확인한 이후에 내린 결정이란 말이렷다?"
도사는 입을 열지 못했다.
서량의 눈에 살기가 담겼다.
"결국 양민의 삶보다 제 문파를 더 중요시하는 네놈의 욕망 때문이 아니더냐?"
"그것은……!"
"본관 도사 놈들도 너와 똑같았을 것이다. 너 같은 놈이 담사영과 손을 잡고는 청성의 협명을 뿌리부터 무너트린 것이다."
도사가 이를 악물었다.
그게 아니라고, 멀리 내다보기 위해서는 청성의 이름이 분명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전혀 먹히지 않으리라는 걸.
상대는 모두가 치를 떠는 마교의 교주면서도 천하를 위해 칼을 뽑은 희대의 협객이다. 염라의 화신이니, 살아 있는 마신이니 등의 악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천하는 담사영이라는 희대의 악인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도(道)를 좇기 이전에 인간부터 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 너희는 그저 새로운 청성을 세우고 싶을 뿐, 양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야."
"……."
"멀리 내다본다? 헛소리. 멀리 내다보기 이전에 눈앞에서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라. 진정 천하를 위하고 싶다면,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서량이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송헌이 외쳤다.
"서 교주는 천하를 일통할 생각이오?"
"그렇다."
"그대가 그리는 천하에는 평화만이 가득할 거란 확신이 있소?"
"지금의 네놈들에게 그따위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세상에 나가라고 하는 것이다. 진정 내 대답을 듣고 싶다면, 그만한 자격을 갖춘 이후에 다시 찾아와라."
그렇게 서량과 청성 도사들의 만남은 끝이 났다.
산을 한참 더 내려가니 마침내 마차가 보였다.
"오셨습니까."
"그래."
마동필의 눈이 반짝였다.
"도문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만."
서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도문의 내공을 익혔을 뿐, 진정 도문 소속이라 할 만한 놈들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마동필이 한옆을 가리켰다.
"고생하셨습니다. 예서 좀 쉬시지요."
"어험, 그럴까?"
박살 낸 상대의 집 안에서 쉬는 것도 어지간히 독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다.
그러나 서량도, 마동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독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에서 사천은 이미 그들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음."
주서윤이 서량을 맞았다.
"영이랑 여민이는…… 음, 또 한바탕하고 있구만."
"네."
"황제는 마차에서 쉬고 있을 테고."
"맞아요."
서량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잘됐다. 안 그래도 좀 쉬고 싶었어."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무슨. 껍데기뿐인 머저리들 청소하는 거야 누구라도 할 수 있어."
남궁단이 혀를 내둘렀다.
"저들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온 천하에 서 교주 하나뿐일 거요."
"그렇지 않소."
서량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불문, 그리고 도문의 내공심법은 단순히 내력의 증강이나 무공의 위력을 살리기 위해 익혀서는 의미가 없소."
"음?"
"불문의 내공은 자비를 바탕으로 하고, 도문의 내공은 선(善)을 바탕으로 하오. 욕망에 젖어 타락해 버린 저들의 무공은 그저 위협적으로 보일 뿐, 특유의 무리(武理)를 조금도 담아내지 못한 껍데기에 불과하오."
남궁단이 고개를 저었다.
"제아무리 그렇다 한들, 위협적인 건 위협적인 것이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럼 저놈들이 유독 약했던 거라고 칩시다."
"하하."
남궁단도 제법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이제는 남들 앞에서 웃을 줄도 알았다.
"하면, 다음은 아미파요?"
"그렇소."
"아미파라……."
"왜? 거기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소?"
"한때는 다들 알고 지냈지. 비록 깊은 친분은 없었지만 말이오."
남궁단이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겁쟁이였소."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오?"
"전에 말했듯, 서 교주가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면 나 역시 검을 뽑지 못했을 것이오. 그대가 중원에 나와 부패한 이들을 하나하나 도려내는 걸 본 이후에야 세상의 의(義)가 죽지 않았음을 알았소."
"그리 말씀하지 마시오."
"진심이오. 결국 나 역시 청성의 수행자들이나 지금도 나서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아미의 불자들과 다르지 않소."
"다르오."
"어찌 다르다고 생각하시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책임에서 눈을 돌렸소. 문파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음에도 명성과 실리를 우선시했지."
"나 역시 남궁의 이름이 중요하오."
"결정적으로, 담사영은 무수히 많은 문파를 잠식하려 들었음에도 차마 남궁은 건드리지 못했소."
"그것은……."
"노선배 때문이 아니오. 아닌 말로, 노선배는 담사영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공보다도 무서운 힘. 그것은 바로 흔들리지 않는 정심(貞心)이오. 담사영은 남궁이 결코 타락하지 않을 걸 알기에 처음부터 건드릴 엄두도 못 낸 것이오."
"……."
"그러니 그리 자책할 필요 없소. 남궁가주는 내가 본 정파인 중 가장 협객다운 협객이외다."
남궁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왠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웃으며 그를 보던 서량이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휴, 반나절쯤 쉬었다 출발할까."
그때, 마차 문이 열렸다.
"서 교주."
"음?"
주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와 얘기 좀 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