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화. 와신상담의 끝 (5)
"총군사님! 교주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서신을 이리 주게."
서신을 펼쳐 본 호요성의 눈이 깊어졌다.
"……역시."
그는 과거 서량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놈은 분명 반격해 온다. 이대로 물러날 놈이 아니야.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하지만 정면 승부는 피하겠지.
- 정면 승부는 물론, 암살 기도나 혼란 유도도 피할 것입니다. 그런 걸로는 시간 벌이조차 못 한다는 걸 알 테니까요.
- 그렇다면 놈은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올까?
- …….
- 역시, 자네도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 솔직히 그렇습니다. 담사영에게 남은 패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직 주요 병력은 건재하다지만, 힘 싸움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이상 없느니만 못한 병력입니다. 물론 그만한 병력이라도 소중히 지키려 하겠지만요.
- 전면전, 암살, 혼란 유도, 심지어 자금으로도 우리와 상대가 안 돼. 즉 놈에게는 우리에게 타격을 입힐 실질적인 수단이 없다.
- 특히나 패배 선언이 치명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사기의 문제예요. 설령 전면전을 상정한다 한들, 담사영 휘하의 병력은 지닌 역량의 절반도 채 발휘하지 못할 겁니다.
- 흐음.
-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집니다.
- 그게 뭐지?
- 본인입니다.
- ……?
- 담사영 본인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지요.
- 휘하 병력을 모조리 끌고 와도 상대가 안 될 판에 혼자만 나선다?
- 예.
- ……그렇군.
- 힘 싸움으로도, 자금으로도 안 된다면 담사영에게 남은 것은 개인의 무력과 술법(術法)뿐입니다.
- 그래. 아직 천룡궁주가 죽었다는 소문도 없으니, 어지간하면 함께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 그렇습니다. 개인의 무력이야 전면전과 마찬가지로 상대가 안 된다고 보면, 이쪽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술법밖에 남지 않았는데, 문제는 술법이라는 공부의 방대함입니다.
- 음.
- 당장 비궁주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술법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상대가 교주님인데다 스스로 방심한 탓에 그리 당한 것이지, 아닌 말로 그녀가 좀 더 지혜롭고 야망이 있었다면 천하를 도모할 만한 힘을 가졌다고 봐야 합니다.
-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 당장 천룡술법만 봐도 그렇습니다. 교주님께서 나서시기 전까지, 난공불락이었던 철혈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뻔했습니다. 수천, 수만의 병력이 밀고 들어간 것도 아니었지요. 철혈성은 술법진(術法陣)만으로 붕괴될 뻔했습니다.
- 그렇지.
-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담사영에게는 그에 필적할 만한, 혹은 그 이상의 한 수가 남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당당히 패배 선언을 했던 것이겠지요.
- ……알았다.
- 예?
-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놈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공략하려 들지 대충 짐작이 가.
- 정말이십니까?
- 그래.
- 대체 어떤……?
- 예전, 송 성주와의 비무로 지금의 경지에 올랐을 때 사부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있었지.
- ……?!
- 담사영이 천하와 하나가 되기 전에 막으라고 하셨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알아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더랬지.
- 깨달으셨습니까?
- 짐작이지.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방식은 떠오르지 않는군.
그 이후 서량은 담사영의 공격 방식에 대한 여러 가지 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지금, 그때 말했던 여러 가지 안 중 하나에 대비하라고 연락이 왔다.
‘담사영.’
호요성은 혀를 내둘렀다.
‘술법의 기괴함 이전에, 정말 그 선까지 넘어 버린 것인가?’
담사영은 도덕이나 윤리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건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고 있는 근원적인 공포에 닿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호요성은 문득 섬뜩함을 느꼈다.
자신의 인간성을 버리면서까지 목적을 쟁취하려는 담사영의 독심에 두려움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또한 그는 알고 있었다.
이번 한 수는 담사영이 갖고 있는 최고의 수라는 것을. 이번 한 수가 통하지 않으면, 그때야말로 놈이 진정한 패배를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호요성은 담사영의 패배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강서상회에 연락하게. 인근 양민들에게 한 번 더 곡창을 풀라고. 슬슬 솥을 달궈 놔야겠어."
"알겠습니다."
호요성의 눈이 반짝였다.
"어디 한번 와 보아라."
* * *
털썩.
새로이 아미파 장문사태 자리에 오른 천경사태가 쓰러졌다.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르르륵.
불심의 성지라는 아미파 곳곳을 화마가 휩쓸고 있었다.
아미파 역시 청성파와 다르지 않았다. 오래된 불당과 건물들이 모조리 새것으로 지어져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서량의 손에 파괴되었다.
"쿨럭! 이, 이 무도한 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산경사태가 피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놈! 감히 마교의 주구 따위가 천년 역사의 아미파를……!"
"역사가 천년인데 발전은 하지 않고 퇴보만 했군.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지만, 너희는 너무 심했어."
"이, 이놈!"
"머리만 깎았다고 부처가 된다더냐? 너희는 부처를 모실 자격이 없다."
산경사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입고도 이리 화를 내는 걸 보면 그녀 역시 보통 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감히…… 감히!"
"그리고."
콰득!
산경사태의 목이 부러졌다.
서량이 차갑게 말했다.
"속세의 욕망에 중독된 천한 수행자 따위에게 폭언을 들을 정도로 잘못 살아온 인생은 아니니라."
쿠구구궁!
불길에 휩싸인 불당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아미파까지도 멸문의 길을 걸었다.
서량은 이번 습격에 특히나 자비가 없었다.
청성도 청성이지만, 아미는 선을 넘었다. 바름과 자비를 외치는 이들을 몽땅 잡아 가둔 것도 모자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온갖 고문을 자행했던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요, 심지어 문파의 어른과 사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와 자매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나아가 아랫마을에서 얼굴이 반반한 남자아이들을 납치하여 성 노리개로 삼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타락의 극치였다.
콰앙!
만압금마장으로 모든 건물을 박살 내 버린 서량이 능공만리행을 펼쳤다.
파아아앙!
이제는 신법에도 탄력이 붙었다.
허공섭물을 이용한 지고의 경신술이었다. 이제는 진짜로 육지비행술을 구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량이 순식간에 산맥을 넘어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사락.
폭음을 내며 허공을 날아왔음에도 착지는 깃털처럼 가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교주님."
"엉."
"다치신 데는 없으신지요?"
서량이 피식 웃었다.
"저런 얼간이들을 상대로 무슨. 하긴, 망할 것들 눈빛 하나는 청성보다 더 독하더라."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이것으로 사천성의 정리가 끝났습니다."
"그래. 이제 슬슬 섬서로 향해야지."
"아, 그렇지 않아도 섬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혜심대사가 직접 보낸 서신입니다."
서량의 눈이 커졌다.
"벌써?"
"예."
마동필이 서량에게 서신을 건넸다.
서신을 빠르게 읽어 내린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작정하고 밀어붙인 모양이군. 과연 소림은 소림이야."
놀랍게도 혜심을 필두로 한 소림 최강의 전력은 단숨에 섬서로 진입, 종남파를 불태우고 화산파까지 날려 버렸다.
서량처럼 독하게 손을 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두 문파를 모조리 잠재웠다는 내용으로 보아, 최소한 수뇌부와 주요 병력은 모두 없애 버렸으리라.
"어떻게 하다 보니 시일이 딱 맞았구만. 이렇게 되면 계획을 변경해야겠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서량이 주청을 바라보았다.
주청이 눈을 끔뻑였다.
"왜 그리 보시는가?"
"이봐, 황제."
"……?"
"외유가 제법 길지 않았나? 꼭 당장은 아니더라도, 고향 땅 한번 밟았다가 돌아갈까 싶은데 말이야."
주청의 눈이 흔들렸다.
"자네 설마?"
"그래. 하북으로 가 볼까 하는데."
하북.
하북에는 북경이 있고, 북경에는 황궁이 있다.
"굳이 지금 그곳으로 향할 필요가 있나?"
"당신이 함께하겠다 했을 때 굳이 거부하지 않은 것은, 내 사형제들은 물론 당신 역시 세상을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야. 통치자는 하늘보다는 땅과 가까워야 해. 그래야 정치도 사람에 가까워지지."
"……."
"하북으로 가지. 가면서, 훗날 당신의 정치 때문에 일그러질, 혹을 환희에 찰 백성들의 얼굴을 봐 봐.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느꼈으면 싶군."
"허허허."
웃음을 터트리던 주청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그런 가르침을 받고 싶지는 않네만, 또 틀린 말은 아니로군."
"나야 언제나 맞는 말만 하지."
"좋네. 가 보세나. 나 역시 간혹 하북의 공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네."
그렇게 일행의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마차는 단숨에 사천성을 지나 하북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차피 하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섬서를 들려야 했다. 서량은 혜심에게 섬서에서 만나자는 서신을 보냈다.
다시 열흘이 지났다.
"오랜만이오."
혜심이 고개를 숙였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소."
"당신도."
서량이 혜심의 뒤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굉장하구만."
혜심의 뒤쪽에는 무려 이백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도열해 있었다.
‘백팔나한(百八羅漢).’
그렇다. 이백 승려의 무리에는 소림의 전설 백팔나한과 팔대호원의 승려들, 그리고 당대 장로들과 전대 노고수들까지 끼어 있었다.
무시무시한 전력이었다. 딱히 진형(陣形)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천지를 뒤흔드는 기파가 느껴졌다.
‘정면 승부라면 천마 일 군과도 승부를 논하기 어렵겠군.’
천마군 소속 네 개의 부대는 천마신교 최강의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한 개 부대를 천 명이 채우고 있었고, 그 부대 하나하나가 구파일방급 대문파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중 천마 일 군은 천마군 중에서도 최강이었다.
혜심은, 소림은 그만한 전력을 뽑아 종남파와 화산파를 휩쓸어 버린 것이다.
"이만한 힘을 비축하고 있었나? 이거 왠지 억울한데? 진즉에 도와주지 않고."
"미안하오. 내 달리 할 말이 없소."
서량이 피식 웃었다.
"됐네. 당신들 역시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이해해 주어 고맙소."
"그래서, 다음은 어디로 향하시게?"
"호북으로 향할 생각이오."
"호북이라면 제갈세가?"
"그렇소."
"머리깨나 아플 텐데. 그놈들은 산중 문파가 아니야. 심성이 악랄하다고 무공까지 약해지진 않았을 거다. 게다가 제갈세가는 무공보다 진법이 더 무서운 가문이야."
"그래서 이제야 가는 것이오. 진법의 무서움을 아니까. 혹여 그곳에서 전력 손실이 발생하면, 종남과 화산을 치는 데 문제가 될 수도 있었소."
"다 생각이 있었군. 좋아,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지."
혜심의 얼굴에 궁금증이 일었다.
"교주께서는 어디로 향하려 하시오?"
"하북."
"……!!"
혜심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치는 것이오?"
"담사영을 건드릴 생각은 없어. 건드릴 수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하면?"
서량이 주청을 바라보았다.
"새 나라의 군주가 될 사람을 써먹을 순간이 왔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