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깨어나다 (2)
소공휘는 이효와 달리 황병을 대동하지 않았다.
묵묵히 걸어와 주청 앞에 선 소공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황궁일장 소공휘, 상황 폐하를 뵙습니다."
담담한 어조였다.
주청이 도끼눈으로 그를 내려보았다.
"나는 황제다! 죽지도, 황위를 이양하지도 않았거늘 어찌 상황이라 하는가!"
"상황 폐하십니다."
"뭣이?!"
"저희는 이미 또 다른 황제를 모셨습니다.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떠나, 충성을 다짐한 주군이 있거늘 어찌 상황 폐하를 천하의 주인으로 모시겠습니까."
소공휘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못해 평온하게 들릴 정도였다.
"다만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고 저희 역시 온당하지 못한 이양을 지지한 것이니, 그 죄는 죽음으로밖에 갚지 못할 대죄라 할 수 있습니다."
"……."
"상황 폐하."
소공휘가 고개를 들었다.
천하의 황제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시선을 마주한다. 그것만으로도 중죄라 할 만했지만, 뜻밖에도 소공휘를 내려다보는 주청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잠잠해져 있었다.
"폐하께서 천인공노할 무리에게 납치를 당하신 후, 소신은 그 자리에서 자결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
"이 장군 말마따나, 저희가 죽으면 황궁을 지킬 자가 남지 않는다는 변명 때문이었습니다."
이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 장군! 그것을 어찌 변명이라 치부하는 것이오!"
"상황 폐하와 대화 중이니, 이 장군이 최소한의 예법이라도 지킬 생각이 있다면 감히 경망스러운 입을 놀려선 아니 될 것이오."
"이익!"
이효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소공휘가 말을 이었다.
"비록 충정을 버리고 영혼은 불살라졌으나, 멀쩡히 살아 있는 몸뚱이로 또 한 분의 천자를 모셨습니다. 제게 폐하는 죽을 때까지 상황이십니다."
"그래서."
주청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역적들과 함께 또 다른 천자를 모시니 그 기분이 어떠했느냐? 달콤하기 그지없었더냐?"
"소신, 비록 대역죄를 저질렀으나, 그것은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못한 것일 뿐 사람으로서의 양심까지 버리지는 않았나이다. 하루하루를 지옥 같은 심정으로 버텨 오던 중 상황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야 그 짐과 죄스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벌을 받겠나이다."
주청의 눈이 일렁였다.
스르릉.
소공휘가 검을 뽑았다.
황제 앞에서 검을 뽑는 것 또한 중죄였다. 이미 죽을 작정을 해서 그런 걸까. 그는 사사로운 예법들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소공휘가 뽑아 든 검을 곧바로 목에 가져다 댔다.
"제국의 장군으로서, 황궁이 과거와 같은 위엄을 되찾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이제라도 폐하를 뵙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
"부디 천수를 누리시어 만천하에 제국이 살아 있음을 알려 주십시오."
주청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순간 한 줄기 무형의 지풍(指風)이 쏘아졌다.
퍽!
"큭!"
소공휘는 저도 모르게 검을 떨어트렸다.
찌이이이잉.
양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등에 적중한 지풍이 장심으로 돌아 들어가 양팔과 상체를 몽땅 마비시켰다.
소공휘의 눈이 흔들렸다.
‘고수?!’
황궁의 무공으로는 이런 식의 기법을 익히지는 않지만, 이룬 경지가 높다면 따로 배우지 않아도 펼칠 수 있는 게 지풍이었다.
‘엄청난 무공!’
굉장한 지풍이었다. 이 정도 속도로 쏘아졌음에도 손을 관통하지 않고 스며들어 상체를 통째로 마비시켰다. 혀를 내두를 만한 진기 운용이었다.
"흥미롭군."
어느새 주청 뒤에서 서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공휘와 이효는 깜짝 놀랐다.
‘어, 언제?’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었다. 보아하니 계속 상황 폐하 뒤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직전까지 서량을 인식하지 못했다. 서량이 일부러 존재감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서량은 감탄 어린 눈으로 소공휘를 보았다.
"과연 제국의 장군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군. 그렇지 않나, 황제?"
주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잃은 황궁을 최후의 최후까지 지켜야 하는 자가 장군일세. 어중간한 반편이를 세울 수는 없지."
"비록 죽어 마땅한 실수를 했지만, 천하 어디를 뒤져도 저처럼 강단 넘치는 인재를 찾기는 힘들 거야."
"아예 없지는 않겠지."
"물론 그렇지. 힘이 있고 시간이 충분하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크게 아쉽지는 않을 텐데."
"문제는 힘도 없고, 시간도 충분치 않다는 게지."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하더구만. 어울리는 비유는 아니지만, 과연 황궁에도 사람이 있었어."
소공휘와 이효는 경악한 눈으로 서량을 보았다.
아무리 황실의 위엄이 땅에 떨어졌다 해도 상황 폐하와 저리 편하게 대화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이효가 버럭 소리쳤다.
"이놈! 폐하께 그 무슨 무례란 말이냐! 사지가 찢겨 죽어도 그 죄를 다 치르지 못할 것이다!"
서량은 그의 말을 들을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로지 소공휘에게 향해 있었다.
"소 장군이라고 했나?"
"……!"
"목숨줄 한번 질기구만. 만일 황궁이 이 지경이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강단이 넘쳤더라도 자결을 막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나?"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너희가 마교라 부르는 조직의 수장이다."
"마, 마교주?!"
"마교주라…… 어감은 참으로 마음에 안 든다만, 뭐 그렇지."
이효가 벌떡 일어났다.
"이놈! 사교(邪敎) 무리의 수장 주제에 어찌 폐하께……!"
그때, 주청이 버럭 외쳤다.
"닥치지 못할까!"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한 목소리였다. 이효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서량이 말을 이었다.
"반면, 다른 한 놈은 마땅히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변명하기에만 급급한 소인배로군. 황제, 당신 말마따나 저런 자를 장군으로 임명해서는 안 되었네."
"나 역시 그리 생각하네. 저런 놈을 장군 자리에 앉히다니, 내 아들이지만 정말이지 안목이 없어도 너무 없구먼."
"응? 당신이 장군 자리에 앉힌 게 아니란 말인가?"
"황궁이 힘을 잃은 뒤 관직의 규모를 대폭 축소했네. 그런 와중에 저런 소인배를 장군으로 앉혔을 리가 있겠는가?"
"호오."
"그 무용(武勇)이 제법 대단하다고 듣긴 했네만, 적어도 내가 정신을 잃기 전까지는 장군이 아니었어."
서량이 혀를 찼다.
"주천양 그놈, 이따위 안목으로 천하를 도모하려 했단 말인가?"
이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면전에다 두고 자신을 소인배라고 욕하고 있었다. 심지어 휘하 황병들이 다 보고 있는 판국이었다.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이 개자식이……!"
이번에도 서량은 그의 욕설을 한 귀로 듣고 넘겼다. 어지간해야 욕이라도 퍼붓지, 이건 도무지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일국의 장군이라는 자가 제 유리한 대로 충성하고, 제 유리한 대로 명을 어긴다. 이건 이미 장군은 고사하고 일개 병사만도 못한 마음가짐이었다.
서량이 주청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사전에 얘기했던 대로 싹 끌고 나와야지."
"음, 그래야겠지."
"그나저나 자네, 정녕 저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가? 이놈들은 직접 문을 열고 나섰는데, 궁 안에 있는 황병들이 문을 연다면……."
"못 들어가."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단순히 방벽을 세우기만 한 것이 아니야. 무슨 술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마기(魔氣)를 품은 자는 입궁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어. 하긴, 내가 담사영이라도 그렇게 했겠지만."
"자네를 염두에 두고 설치한 술법인 모양이군."
"그렇겠지."
주청의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드리워졌다.
"정녕 저 안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이지."
수년 만에 되돌아온 집이다. 한데 문이 열려 있음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니, 실로 침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계속 말했잖은가. 못 들어갈 거라고. 그렇다고 당신 혼자 들여보내면 무조건 죽을 테니, 후일을 기약하자고."
"그랬지."
"그래도 너무 아쉬워할 것 없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까."
주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년을 참았는데 고작 수십 일을 못 참을까."
"잘 생각했네."
그때였다.
"전군(全軍)은 들으라!"
이효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보아하니 저 사교 무리의 수장이란 작자가 상황 폐하께 사술이라도 쓴 모양이다! 모두 일어나 저 사특한 놈을 공격해라! 상황 폐하를 구할 것이다!"
주청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소공휘 역시 입을 쩍 벌린 채 이효를 보았다. 설마하니 저자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언사를 내뱉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 머저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그러게나 말일세."
"하늘의 점지를 받은 세상의 주인더러 사술에 걸렸다? 황제를 고작 그 정도로밖에 보지 않는 모양이야."
이효는 순간 주춤했다.
생각해 보니, 해석에 따라 참으로 묘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사교의 사술에 걸렸다는 것은 곧, 하늘의 자식인 황제의 존엄성을 깎는 발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익!’
하지만 내친걸음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저 노망난 늙은이가 소공휘는 살려 두고 자신은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이리 허무하게 죽을 순 없다.
이효가 재차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느냐! 당장 검을 뽑아 마교주를 죽여라!"
이만의 황병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명령권자인 이효의 명을 들어야 마땅하지만, 이 앞에는 상황 폐하께서 계신다.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될 자리라는 것이다.
이효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놈들! 다 죽고 싶은 것이냐! 당장 일어나 마교주를 죽이란 말이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미있군. 내가 진짜 사술을 걸었다면 오히려 날 사로잡아야지, 왜 죽이려고 하나?"
"……?!"
"황제를 평생 사술의 노예로 놔둘 생각인 모양이지?"
"이, 이놈!"
주청이 짜증이 난다는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서 교주. 저놈 떽떽거리는 소리가 참으로 듣기가 싫구먼."
"나도 그래. 다만 저놈 말대로 황병들까지 들고 일어서면 아예 싹 쓸어 버릴 생각이라."
"아랫것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다 못난 우두머리를 만난 탓이지."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알았다."
서량이 이효를 바라보았다.
이효가 재차 욕설을 뱉으려 할 때였다.
화르르르륵.
서량의 두 눈에 청홍의 마기가 솟구쳤다.
"컥!"
그 눈을 본 순간, 이효는 곧장 그 자리에 쓰러져 피를 토했다.
마안(魔眼)을 보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내상을 입는다. 그야말로 심인상인(心印傷人)의 경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효의 몸이 덜덜 떨렸다.
‘뭐, 뭐야?!’
마신의 눈을 본 순간, 그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상단전과 중단전이 충격을 받아 하단전까지 뒤흔들린 것이다.
"이놈아."
이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절로 고개가 들렸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헉!!’
그리고 재차 서량의 눈과 마주하는 순간, 이효의 하의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서량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내세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렇게 쪽팔리게 살지는 마라."
화르르르르륵!
"크아아아악!"
땅에서 솟구친 불이 이효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산 채로 불태워지던 이효는 몇 차례 꿈틀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허무하고도 고통스러운 최후였다.
"소공휘."
경악 어린 눈으로 이효를 보던 소공휘가 퍼뜩 놀라 주청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청이 차갑게 말했다.
"오늘부터 네놈이 황군총수이자 유일무이한 대장군이다. 적어도 쓸 만한 놈이 나올 때까지는."
"……!!"
"남은 황병을 모조리 데리고 나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