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화. 깨어나다 (5)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나 또한 그러했다네."
"그렇군요. 한 방 먹이러 오신 겁니까?"
"그럴 리가. 내 비록 서 교주만큼은 아니나, 중원 사파의 대종주로 불리는 몸일세. 그런 하찮은 이유로 움직이진 않아."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요. 성주님께서는 그런 분이시지요."
"어째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구먼?"
"절대로요. 요새 제 어깨가 많이 올라와 있긴 하지만, 성주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 정도는 아닙니다."
"허허허."
송금백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굉장한 여유가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수행원 하나 없이 단신으로 천마신교의 본단으로 들어왔음에도, 불안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호요성은 그의 배포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천하 모든 사파인을 쥐고 흔드는 수장이 직접 찾아왔다…… 제아무리 동맹을 맺었다 해도 이러기는 쉽지 않아. 그렇다고 이 행동이 오만함의 발로라고 보기에는 눈빛이 너무 깨끗하군.’
심지어 그가 직접 철혈성으로 찾아갔을 때와도 달랐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호요성은 송금백의 이 포근한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한데, 이게 무슨 냄새인가?"
"예?"
"약재를 달여 마시는 건가? 하기야 신교를 관리하는 사람이니 몸을 챙기긴 해야겠지."
"아!"
호요성이 크게 웃었다.
"약재는 아니고 찹니다. 굴송차라고 하는데, 냄새가 좀 요상하지요?"
"차라리 측간 냄새가 더 향기롭겠네."
"……그 정도는 아닌데."
"향이 엄청 독특하군. 익숙해지기 쉽지 않겠어."
"한번 맛 들이면 이만한 차도 없습니다. 하루 두 잔씩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죠."
"그런가? 진즉에 알았으면 좋을 뻔했군. 나도 그 차를 자주 음용했다면 담사영, 그 망할 인간에게 휘둘리지 않았을 수도 있잖나?"
"하하하."
"아니라고는 안 하는군."
"하하하하!"
호요성이 연신 웃음을 터트리자 송금백도 피식 웃었다.
"굴송차 말고, 다른 향 좋은 차 좀 주게."
"물론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두 사람이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송금백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총군사의 집무실이라…… 크고 화려하게 생겼을 줄 알았거늘, 엄청나게 복잡하군."
"일이 많아서요. 황 군사의 거처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원체 깔끔을 떨어서 말일세."
호요성이 멋쩍은 듯 웃었다.
"제가 좀 지저분하긴 하죠?"
"똥내 나는 차도 마시는데 이 정도야."
"……아니라니까요."
송금백이 크게 웃었다.
"사담은 이쯤하고, 자네도 바쁠 텐데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하는데."
"이쯤 해도 괜찮지만, 며칠 동안 수다만 떨어도 좋습니다. 성주님께서 어떤 분이신데 제 바쁨을 핑계로 본론만 꺼내라 하겠습니까."
"말이라도 고맙구먼."
한 모금 차로 목을 축인 송금백이 제법 묵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성내 일이 바빠 몰랐네만, 근래 서 교주의 행보가 아주 화려하더군."
"그렇지요."
"대단한 사람이야. 그 정도 경지에 이르면 오히려 오욕칠정이 무뎌지기 마련이거든. 그럼에도 나조차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 힘을 마구 휘두르고 다니다니, 과연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말이 맞았네."
그 스승인 이천상과 다르지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전대 교주님과 당대 교주님, 두 분 모두 워낙에 치열하게 살아오신 분들 아닙니까. 저는 언감생심 그와 같은 경지를 추측할 수조차 없지만, 오욕칠정이 무뎌진다 한들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라는 것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그런 모양일세."
물끄러미 찻잔을 내려다보던 송금백이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기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었네. 다만 본성에 귀교와는 또 다르게 바쁜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보아하니 내가 제일 여유롭더군. 그래서 중원 유람도 할 겸, 직접 찾아왔다네."
"……."
"이것부터 보시게."
호요성이 서신을 공손히 받아 들고는 천천히 펼쳐 읽었다.
송금백이 말을 이었다.
"서 교주가, 혹은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네. 다만 이런 생각이 들더군. 어차피 새로운 제국이 세워지면 관부와 무림의 경계도 모호해질 텐데, 우리가 굳이 철혈성으로 남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
"……."
"다른 걸 떠나서, 우리가 중원 동부에서 버젓이 세를 불리고 있으면 서 교주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정확히는, 천하를 경영하는 자네와 자네 휘하의 군사들이 호시탐탐 우리를 견제하려 들겠지."
"……."
"나는 더 이상의 분란을 바라지 않는다네. 하나, 그렇다고 본성을 해체하고 싶은 생각도, 억지로 힘을 버리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러시겠지요."
"그래서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그것일세. 물론 그쪽에서 사람을 보내 우리를 관리할 수도 있겠지. 우리로선 자존심이 상하기야 하겠지만, 그대들이 그리하겠다면 어찌 막겠는가?"
호요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을 저라고 안 한 건 아닙니다. 실제로 교주님께 그리 말씀드리기도 했었지요."
"지금은 달리 생각한단 말인가?"
"성주님께서 더 이상의 분란을 원치 않으시는 것처럼, 교주님 역시 더는 서로 감정 상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
"허허."
"어쩌면 교주님께서는 천하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힘을 쌓아 올리셨기에 그런 여유를 부리신 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교주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저희는 마땅히 따를 수밖에요."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서 교주 그 사람, 정말 부러울 정도로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모양이구먼."
호요성 역시 마주 웃었다.
"물론입니다. 마도 무림의 신(神)으로 군림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리고 곧, 천하의 신(神)으로 군림하겠지."
"그것을 위해 달리고 계시니까요."
"나는 만인의 신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네. 그저 내 사람들과 적당히 즐기면서 살면 그뿐이야.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 따위, 적어도 내게는 없단 말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호요성이 탁자 위에 어지럽게 쌓인 문서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저도 이 생각을 했습니다."
호요성이 건네 문서를 읽은 송금백의 눈이 커졌다.
"허!"
"고백하자면, 성주님께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줄은 더더욱 몰랐고요."
송금백이 입맛을 다셨다.
"서 교주가 부럽군. 자네와 같은 행정가를 품고 있다니."
"행정가라기보다는 그냥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황 군사가 들으면 섭섭해할 겁니다."
"우리끼리라서 하는 얘긴데, 황 군사 그 사람 좀 딱딱하지 않나?"
"제게는 없는 덕목이지요. 교주님께서는 제가 너무 유들유들하다고 욕하시는걸요."
"허허허!"
크게 웃음을 터트린 송금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바로 추진해도 되겠는가?"
호요성이 싱긋 웃었다.
"물론입니다. 아마 황제 폐하께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하실 겁니다."
"과연 그럴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난 담사영과 함께 황태자 편에 섰던 사람일세. 겉으로는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칼을 갈 걸세."
"외람된 말씀이지만, 성주님께서는 황제 폐하를 뵌 적이 없잖습니까?"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모습은 봤었지."
"예. 하지만 정신을 차린 뒤 다시 한번 세상에 눈을 돌리신 황제 폐하의 안목은 무림 정상급 인사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나아가 지혜롭기도 하시지요."
"그래?"
천하의 호요성이 이리 말할 정도면 확실히 보통 인사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제국의 힘이 유명무실해진 와중에도 황궁의 힘을 그만큼이나 비축해 놓은 걸 보면 확실히 비범한 자이기는 했다.
호요성의 눈이 반짝였다.
"철혈성이 지금의 거처를 떠나 황궁으로 들어간다……. 약세인 황궁 병력을 대신하여 제국의 힘을 부활시키는 데에 일조한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크게 흡족해하실 겁니다."
그렇다.
송금백이 직접 적은 서신에는 바로 철혈성의 모든 전력을 황궁으로 편입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철혈성 역시 나름의 역사가 있는 사파 연맹체이거늘, 그 모든 전력을 황궁에 편입한다는 것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송금백의 결단을 겁 많은 늙은이의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요성은 절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송금백의 이러한 판단이 그의 가치를 한층 더 올려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웅은 시운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 법. 송금백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았고, 시국을 꿰뚫어 보았으며, 어떻게 해야 철혈성의 모든 무사가 피 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를 깨달았다.
그런 면에서 송금백은 진정 존경받아 마땅한 거인이었다. 호요성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현재 황제 폐하께서는 믿을 만한 아군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오만육천에 달하는 황군이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병력이지요."
"음."
"저희 역시 이대로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성주님께서는 보여 주기식으로라도 무반 관직 최고위 자리에 오르셔야 합니다."
송금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알량한 직책을 위해 움직였을 때는 무엇도 손에 넣지 못했거늘, 정작 모든 걸 내려놓으니 자리가 알아서 딸려 오는군."
"부디 폐하를 많이 도와주십시오. 아닌 척하면서도 많이 외로워하실 겁니다."
송금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은 생, 제국을 위해 다 바쳐도 모자랄 사람이 황제야. 내가 굳이 그런 역할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하하."
"다만, 황제나 나나 인생에서 쓰디쓴 실패를 맛본 사람들일세. 적적할 때 술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호요성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황제 폐하를 뵙고도 그런 말투를 쓰시면 안 됩니다. 아시지요?"
"나를 너무 애로 보는군."
"아하하."
송금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황궁의 상황과 서 교주의 위치, 그리고 황제의 위치를 알려 주게."
"안 그래도 이틀 전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성주님께서도 성에 계셨다면 진즉 받아 보셨을 연락이지요."
호요성은 서량과 황제의 위치, 그리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목조목 말해 주었다.
송금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휘에 황군을 깔아 두었다……."
"그렇습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송금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나름의 생각은 있겠네만, 서 교주는 왜 황궁을 공격하지 않은 겐가? 그곳에 담사영이 있다면 곧장 쳐들어가도 되었을 텐데. 물론 담사영 그 뱀 같은 놈이 이런저런 함정을 많이 깔아 두긴 했을 테지만 말이야."
서량의 무공이라면 그 모든 함정을 다 깨부수고 담사영을 죽일 수 있지 않았겠느냐, 왜 굳이 퇴각하여 일을 복잡하게 만드느냐는 뜻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아군 병력이 희생되는 걸 원치 않으시기도 하고, 황궁 전체에 상상을 초월하는 방어막이 둘러쳐져 있기도 했지요. 그 방어막을 깨부수는 것만으로도 탈진할 수 있다고 하시던데요."
"그 정도인가?"
"예. 섣불리 찔러 봤다가 담사영이 도주하거나 탈진한 상태로 마주하게 되면, 결국 교주님께서 불리해지시니까요."
"흐음."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지요."
"그럼?"
호요성의 눈이 진지해졌다.
"교주님께서는 기다려야 한다고 보시는 겁니다. 담사영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
"그리고 그 기다림도 이제는 막바지에 이르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