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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606화 (605/774)

606화. 깨어나다 (6)

보름 후.

"하압!"

수만 장병이 동시에 기합을 지르며 검을 내뻗는 광경은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호오."

서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제법 자세들이 나오는데?"

"그렇소?"

소공휘의 얼굴에는 묘한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저들 중 누구 하나 가르침을 소홀히 받지 않았소. 힘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큰 것이겠지."

"그래 보이는군. 훈련 중 어떠한 잡생각도 없는 것 같아. 한데 뭉쳐 솟아오르는 이 군기(軍氣)…… 천마군이 생각나는군."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인상적인 속도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하나같이 단련된 정예병이니 배운 무공을 바로 실전에 녹일 수는 있겠으나, 당장 비기(秘技)를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어."

"물론이오. 게다가 우리는 무림인이 아니오. 황군에는 황군만의 전술이 있는 법, 전투를 코앞에 둔 지금의 황군에게 이보다 더 강한 무공은 필요치 않소."

"잘 봤어. 이번 전투가 끝나면, 그때 더 강한 무공을 전수하도록 해."

"그렇게 할 거요."

"그래."

비록 보름밖에 되지 않았지만 소공휘의 무공은 몰라볼 정도로 상승했다.

청성파의 비전 무공과 서량이라는 최고의 스승, 그리고 소공휘의 뛰어난 이해력과 노력이 불과 보름 만에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서량을 보는 소공휘의 눈에서 이전과 같은 어색함과 경계심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역시 한 자루 검에 목숨을 거는 무인인지라 서량의 가르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자, 이 정도면 내가 할 일은 끝난 것 같고."

서량이 꽤 묵직해 보이는 보따리 하나를 소공휘에게 건넸다.

"받아."

소공휘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이게 무엇이오?"

"내 손으로 멸문시킨 칠파의 핵심 무공 서적이다."

"……!"

"이제 이 무공들은 전부 황궁에서 관리하게 될 거야. 황제에게는 직접 말해 뒀어."

"그, 그런……."

"그들은 수양자임에도 사사로운 욕심에 눈이 멀어 천하를 도탄에 빠트린 망할 놈들이다. 하긴, 그거야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서량이 씨익 웃었다.

"그래도 우리는 선을 넘지는 않거든. 양민을 건드린다? 이유 불문하고 참수야."

"……그렇군."

"세상이 사교 무리니 마교니 하는 우리도 그 정도 선은 지킬 줄 알아. 하지만 놈들은 그러지 못했지. 일문의 역사가 끝장나기에 부족하지 않은 이유야."

소공휘가 복잡한 눈으로 보따리를 보았다.

언뜻 보아도 이십여 권이 넘는 서책이 들어 있는 듯했다. 정파 무림 최강이라 불리는 구파의 절학이니만큼, 그 가치는 만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보물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뭐 해? 받아."

물끄러미 서량을 보던 소공휘가 보따리를 받았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언제든지."

"무도하게도 황제란 호칭으로 폐하를 부르는 당신의 죄는 참으로 크오. 하지만 폐하께서 그것을 묵인하시니, 나 역시 당신에게 그런 걸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오. 그럴 능력도 안 되지만."

"잘 봤군."

"다만 내 보기에…… 다소 불경한 말이지만, 폐하와 당신 사이는 마치 막역지간처럼 보였소."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잘못 본 거다. 우리는 그저 서로 필요로 인해 친분을 나눴을 뿐이야. 그런 게 아니라면 애초에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공격했으면 했지."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원하는 게 있으니 우릴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것일 테요."

소공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터놓고 말하리다. 황궁의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소?"

서량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소공휘의 얼굴이 굳어졌다. 성의를 담아 진심으로 말한 건데, 왠지 비웃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아, 실례. 네 말이 같잖아서 그런 게 아니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그렇소?"

"물론이지. 나와 너희는 사는 세계가 달라. 그 다른 세계를 하나로 이어 붙이려는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황궁의 사람이 되라니."

"서로 다른 두 세계를 하나로 붙여야 하니 더더욱 황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좋지 않소?"

소공휘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서량이 중원 천하에 어떤 존재로 살아가길 원하는지.

잠시 망설이던 소공휘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터놓고 말한다고 했지만, 내 진심을 다 보여 주진 못한 것 같소."

"응?"

"폐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소. 당신이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폐하를 어떻게 도와주었는지."

"……."

"나 역시 지난 보름 동안 당신에게 배운 것이 적지 않았소. 무인에게 있어 당신의 가르침은, 이 보따리 안에 든 구파의 비급과는 차원이 다른 가치를 갖고 있소."

"그거야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겠지."

"나는 스승 없이 이 자리에 올랐소. 당신이 보기에는 어린애 장난 같은 수준이겠지만."

소공휘가 헛기침을 했다.

"내게 있어, 당신은 첫 스승인 셈이오."

"……."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당신이 황궁으로 들어오면 좋을 것 같았소. 그래서 이런 말을 꺼낸 거요."

서량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소공휘 역시 그간 거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많이 혼란스럽기도 했을 것이고, 스스로의 길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자결까지 하려 했지만, 황제의 아량으로 목숨을 구한 지금의 소공휘는 참으로 사람 냄새 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괜찮군.’

참 괜찮은 사람이다. 자결하겠다며 목에 칼을 가져다 댔을 때도 알아봤지만, 사내답게 묵직하면서도 거짓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정한 길을 우직하게 걸을 줄 아는 사람.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은 알지만, 잡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서량은 소공휘가 마음에 들었다.

"말은 고맙지만, 그래도 우리는 황궁의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그렇소?"

소공휘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한 번씩 황궁에 들를 테니, 시간 되면 술이나 한 잔씩 하면 되겠지."

"커험!"

소공휘가 무안한 얼굴로 말했다.

"황궁은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안다."

"다만, 내 시간이 되면 정말 술이나 한잔하십시다."

아마 이곳에 무림인이 있었다면 소공휘의 말에 기겁했을 것이다. 천하일통을 눈앞에 둔 천마신교의 교주에게 술 한잔하자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는 온 천하를 뒤져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알겠소."

그때였다.

"음?"

서량이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호? 이건 또 웬 흥미진진한 만남인가."

"무슨 말이오?"

서량이 몸을 돌렸다.

"애들 훈련 잘 시키게. 이번 한 번의 전투에 황궁의 존폐가 걸려 있으니까."

남쪽의 작은 야산으로 향한 서량은,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던 주서윤과 마동필을 보았다.

"교주님."

"사형."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느꼈냐?"

"예."

"실력이 많이 늘었구만? 특히 서윤이."

주서윤이 고소를 지었다.

"저렇게 엄청난 기운을 대놓고 발산하며 오고 있는데 못 알아채기도 힘들죠."

"그것도 너 정도 되니까 느끼는 거다."

서량의 눈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한 사람을 포착했다.

잠시 후.

파아아아악!

단숨에 허공으로 날아오른 상대가 가까운 봉우리 위로 올라섰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고새 실력이 또 늘었네?"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지. 부끄럽게 그런 말 하지 말게."

"얼씨구? 성격도 제법 유들유들해진 것 같고?"

"어차피 세상이 자네 것인데, 예전처럼 토닥거려 봤자 나만 손해 아니겠는가."

"토닥거리기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 놓고선."

"자넨 여전하구먼."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조심해. 죽지 말고."

"자네 무공을 그 경지까지 끌어올려 준 사람이 나라는 거 잊지 말게."

"이미 다 된 요리에 소금 한 톨 뿌린다고 맛이 달라진다던가?"

"진짜 한 마디도 안 지는군."

"내 인생에 더 이상의 패배는 없어."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야? 그것도 혼자서."

"추측해 보겠는가?"

"추측이고 나발이고,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서 온 거면 본교에 들렀다 온 건가? 게다가 정확하게 여기로 온 걸 보니 총군사와 독대라도 한 모양이지?"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나는 자네의 무공보다 그 눈치가 더 무섭네."

"총군사 성질머리가 지랄맞기로 유명한데, 기분이 상하진 않았나?"

"본성의 군사보다 훨씬 더 날 존중해 주더군. 그 길 그대로 납치할 뻔했다네."

"최상의 평가군. 총군사가 좋아하겠어."

웃으며 서량의 위아래를 훑어보던 송금백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보이는군."

"뭐가?"

"담사영과의 싸움 말일세. 그 정도 여유면 이길 수 있겠어."

"고양이가 호랑이 살펴보고 견적 내는겨?"

"고양이는 요물이라 하였네. 딱 보면 견적이 나오지."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 역시 예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것 같군. 보기 좋아."

"그런가?"

"그래서, 어쩐 일로 왔어?"

송금백이 품에서 자신의 서신과 호요성의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두 장의 서신을 살펴본 서량이 한층 깊어진 눈으로 송금백을 보았다.

"진심이야?"

"진심일세."

"……."

"굳이 자네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당신 식구들은 어쩌고?"

"내 식구가 곧 자네 식구 아닌가?"

앞으로 함께할 사이인데 굳이 식구의 구분을 두어야겠냐는 뜻이었다.

서량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한 방 먹었군."

"알아서 기어 줄 테니, 거한 자리나 한번 만들어 주게나."

"그건 걱정하지 말고."

서량이 양손으로 송금백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결단을 내려 주어서 고맙네."

송금백은 순간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서량은 지금 진심을 보여 주고 있었다.

‘참.’

지난날 서량과의 악연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결국 자신은 패배했지만, 그 패배가 그리 쓰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증오의 사슬을 끊고 함께 손을 잡으니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송금백이 슬그머니 손을 뺐다.

"그래서, 앞으로 더 기다리겠다고?"

"아니."

"……음?"

송금백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총군사에게 듣기로, 담사영의 출관을 기다리는 중이라 알고 있네만?"

"물론 그랬지. 하지만 더는 아니야."

"무슨 말인가?"

"나왔어."

"……나왔다고?"

번쩍!

서량의 마안이 북쪽을 향했다.

어두운 구름이 몰려드는 북쪽 하늘 아래, 서량의 눈에만 보이는 요기(妖氣)가 벼락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샘이 난 모양이야. 강호삼세의 주인 둘이서만 만나는 게."

"……?!"

"놈의 폐관이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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