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화. 또 하나의 신(神) (6)
파아앙!
내지르는 장법의 투로가 그야말로 깔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쩌저저저적.
달리 충격파도 없었다. 무형의 장력은 고목으로 스며들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퍼석!
완전히 얼어붙은 고목이 그대로 쪼개졌다.
무서운 위력이었다. 정직하게 파괴하는 무공이 아니라 스며들어 폭발을 일으키는 음한(陰寒) 계열의 무공, 가히 침투경(浸透勁)의 극치라 할 만했다.
"나쁘지 않군."
여강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여인의 그것처럼 길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손 곳곳에 굳은살이 박였음을 알 수 있었다.
여강휘가 쓰게 웃었다.
‘끝이 없군.’
무도(武道)에는 정말 끝이 없다.
진기 운용이 극상승의 경지에 이른 그였다. 제아무리 장법 수련을 한다 해도 굳은살이 박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박였다는 건, 더는 내공을 끌어 올리기 힘든 상태에서도 물리적인 타격을 가했다는 뜻이었다.
"이런 무식한 수련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만 생각했는데……."
후우우웅.
새하얀 빙백의 신기가 그의 손을 에워쌌다.
치이이익.
굳은살이 연기를 내며 서서히 사라졌다.
굳은살은 신경이 뻗지 않는 곳이다. 칼로 갈라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즉, 내공을 전달하여 갈아서 없애 버리는 것 자체가 본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허공섭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수도 타인의 의복을 의지만으로 부스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경지에 오르지 않았다면.
천하 모든 무림인이 오르고 싶어 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무공의 한계조차 뛰어넘는 진정한 무극(武極)의 시작인 조화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놀랍구나."
여강휘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아버지, 여극도가 그곳에 서서 감탄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장하다. 드디어 네가 천위(天位)에 올랐구나."
여강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과정이라고 해야 할지, 어중간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미 한 발을 걸친 이상, 천위의 품에 온전히 드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렇군요."
여강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월이 뜬 밤, 북두(北斗)의 별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는 무언가 크게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위의 경지, 마인들이 부르는 극마지경에 오르기 위해서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깨달아야 오를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리 오해할 만하지."
"하지만 이런 식의 발전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저 몰입하고 또 몰입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서서히 나아가는 방법이요."
"나 역시 그랬다."
"아버지께서도요?"
"그래. 나 역시 너처럼 무도에 미쳐 스스로를 학대하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이 천위지경에 올랐음을 깨달았지."
"그러셨군요."
"어쩌면 그것이 본궁의 무공 특성일는지도 모르겠다. 내 아버지, 그러니까 너의 조부께서도 그렇게 천위에 오르셨다고 들었거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여극도가 여강휘의 어깨를 토닥였다.
"정말 고생했다. 장하구나."
여강휘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군요."
"음?"
"노력이요.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부딪쳐라. 죽도록 노력해야만 오를 수 있다…… 그리 말씀하셨지요."
"그래."
"서 교주 역시 그리 말했습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환경이 다르면 그 다름을 분명히 인식하고, 무공이 다르면 그 차이 역시 분명하게 인식해야 변화가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옳은 말이지만, 그때의 저는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머리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요.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여강휘의 미소가 짙어졌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나의 완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요."
여극도가 마주 웃었다.
"중원의 저 강자들은 우리와 달라.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우리의 방법이 있는 것, 하지만 너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지도 않았었다."
"그랬지요."
여극도가 부서진 고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푸스스스스스.
얼음 조각이 가루로 흩어지더니 이내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이전의 고목과 똑같이 생긴 얼음이 생겨났다. 신기(神技)에 이른 내공 운용이었다.
"생(生)과 사(死)는 한 끗 차이다. 무공도, 세상도 그와 같다. 세상이 도탄에 빠지면 평화를 위해 기꺼이 제 한 몸을 불사르는 영웅들이 태어나기 마련이고, 세상이 평화로우면 그릇된 야망으로 천하를 전복하려는 광기 어린 악인들이 나기 마련이지."
여극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곳의 싸움도 끝이 나려는 모양이다."
여강휘의 눈이 반짝였다.
"따로 연락을 받으신 겁니까?"
"서 교주가 중원의 황제와 세상에 나섰었다. 홀로 사천의 문파들을 멸문시킨 뒤, 황군 오만육천 병력을 빼돌려 안휘로 돌아갔다더라."
"과연……."
"결국 담사영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천룡궁의 술사들과 교룡조 외에는 말이다."
여극도는 그 외에 자세한 얘기를 전부 들려주었다.
여강휘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다면 이제 황궁을 쳐야겠군요."
"그렇다."
"황군만으로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철혈성주가 이끄는 철혈성의 병력도 있겠지만, 황궁에 드리워진 방어막이 그리도 막강하다면……."
"그래, 어찌어찌 이길 수는 있어도 피해가 극심하겠지."
여강휘가 반짝이는 별빛 같은 눈으로 여극도를 보았다.
여극도가 피식 웃었다.
"왜 날 그렇게 보느냐?"
"괜찮으십니까?"
"무엇이?"
"본궁은 천마신교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즉, 아버지의 시대가 끝나고 제 시대가 와도 우리는 중원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다음 세대까지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다음 세대도 화합할 수 있도록 잘 가르쳐야겠지. 하지만 우리가 어찌 미래를 알 수 있겠느냐. 어떤 변수가 있어 갈등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번 황궁 공격, 저희가 한 손 거들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그쪽 병력의 손실이 있다 한들, 신교의 영향력이 줄어들기라도 할 것 같으냐?"
"물론 그렇진 않지요."
여극도가 고개를 저었다.
"네 여동생을 구해 준 것도 모자라 이 애비의 목숨까지 살려 준 사람이다. 나아가, 너 역시 그이에게 받은 것이 많아. 집단의 미래를 논하며 병력 유지를 위해 빠진다는 것은 소인배의 협잡만도 못한 짓거리다."
"알고 있습니다."
"이 애비를 시험해 보고 싶었느냐?"
"아닙니다. 다만 제가 중원에서 보고 느낀 것을, 아버지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구나 싶어서요."
"음?"
"정파인이든 마도를 걷는 마인이든, 결국 같은 사람이더군요."
여극도가 크게 웃었다.
"왜? 중원에 본궁의 지부라도 세울 생각이냐?"
"통째로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오."
당대 궁주인 여극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겁할 만한 소리였다.
하지만 여극도의 반응은 흥미로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만큼 아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녀석이 진정 빙궁을 옮기겠다고 판단을 내린다면, 분명 그에 맞는 사정과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 애비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러니 그 고민은 네가 궁주 위에 오르고 나서 해라."
"이미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쭈어본 것입니다."
여강휘가 웃으며 하늘을 둘러보았다.
"고향의 터전만큼이나, 중원의 하늘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럼 출발은 언제 하실 생각입니까?"
"이왕 네가 천위에 올랐는데 미룰 이유가 있겠느냐. 준비되면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토록 하자."
"알겠습니다. 어? 그런데 린이는요?"
"자고 있다. 네가 수련에 몰두하는 동안 린이 역시 크게 성장했다. 조만간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이틀간 쉬라고 했더니, 저리 잠만 자는구나."
"다행입니다."
우두둑.
여강휘의 주먹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야 진정한 강함을 획득한 빙궁의 소궁주. 빙궁 역사상 최연소로 천위지경에 오른 천재의 부활이었다.
"이왕이면 초전(初戰)은 저희가 맡았으면 좋겠어요."
* * *
"후우."
태사의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쉰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쿨럭!"
"드르렁!"
놀랍게도 대전 안에는 곯아떨어진 신교의 수뇌부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서량이 툴툴거렸다.
"잔치 한번 벌이자고 했더니만, 진짜 세상 끝장날 기세로 마시는군."
귀교한 서량은 남은 수뇌부들을 모아 놓고 연회를 벌였다.
말이 연회지, 딱히 대단한 음식을 깔아 둔 것도 아니었다. 시녀와 숙수, 하인들까지도 모두 교외로 돌렸기 때문이다.
결국 제각기 음식을 만들었고, 모두가 술에 취했다.
심지어 그들이 마신 것은 이천상이 담근 육천심주였다. 한 사람당 한 동이는 비웠으니, 이리 기절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물론 애써 주기를 뽑지 말라고 명한 건 서량이었다. 오늘만큼은 제대로 즐겨 보자는 의미에서였다.
"정말이지……."
서량을 제외하고 아직 기절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호요성이었다.
그가 질린 눈으로 쓰러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뱃속에 주충이라도 키우는 모양입니다. 저는요, 저 사람들이 술을 저렇게 잘 마시는 줄은 몰랐어요."
"긴장 풀고 마시라고 했잖아. 그러니 저리 들이부은 게지."
"긴장 풀란 말에 정말 푸는 사람들도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풀었네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호요성은 모를 것이다. 서량의 마기가 이들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마음을 안락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그나저나 자네는 왜 홀짝거리기만 해?"
"아무리 그래도 저까지 뻗을 순 없잖습니까."
"호오, 감히 교주의 명을 거역하는 건가?"
"거역은 아니고요. 그냥 평생의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알고 있었어?"
호요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요. 교주님을 모신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교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잘 알지. 너무 잘 알아서 가끔 소름이 돋아. 없어졌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어."
"하하하."
"……."
"진짜요?"
"그래서 가끔이라고 하잖아."
"섭섭합니다."
"뭐 어때? 자네도 내가 짜증 날 때 있었을 거 아냐? 사람 사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호요성은 저도 모르게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 사이라니? 천마신교의 교주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만인에게 신으로 숭배받는 자가 소탈해도 너무 소탈하지 않은가.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교외로 보낸 사람들은 잘 숨겨 뒀지?"
"물론입니다."
"궁금하지는 않나? 왜 그들을 쫓아냈는지."
"궁금합니다만, 곧 알게 되겠지요."
"총군사."
"예, 교주님."
서량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간 정말 수고 많았네. 진심으로.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도 없었을 거야."
호요성은 괜스레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제 수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잘 모시겠습니다."
"그래, 부디 그래 주게."
두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손님 맞이하러 가 볼까?"
호요성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긴장이 떠올랐다.
"……왔습니까?"
"그래."
스릉.
서량이 태사의 옆에 놓아 두었던 천마도를 들었다.
"애가 많이 닳았던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