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화. 숙적(宿敵) (3)
"헉!"
무담은 깜짝 놀라 상체를 세웠다.
‘이게 무슨 일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무수히 많은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난 무담은, 순간 그들이 왜 쓰러졌는지 깨달았다.
‘술?’
무담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신교에 남은 수뇌부들 모두가 술에 취해 쓰러졌다. 코 고는 소리와 지독한 술 냄새가 위엄 넘치는 대전을 축제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곳처럼 보이게 했다.
"이런 일이……."
그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호요성이 있었다.
"총군사."
"대단한 정력이십니다. 구대마존 어르신들도 아직 꿈나라에 계시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오?"
절로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신 입에서 새는 실소가 무담의 황당함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호요성이 고개를 저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수뇌부 전원이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은 교주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교주님께서?"
"그렇습니다."
"도, 도대체 어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당대 누가 있어 교주님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듣기로, 마기를 발하여 분위기를 부드럽게 푸셨다고 합니다. 품고 있던 일말의 긴장조차 해소했으니, 자연스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시더군요."
무담이 궁금한 건 정작 ‘어떻게’가 아니라 ‘왜’였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들으니 새삼 교주님의 능력에 놀라게 된다. 마공처럼 먹이 사슬 관계가 철저한 무공이 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극마에 이른 고수들의 기분까지도 자유자재로 조절하시다니?
‘과연.’
일도(一刀)에 산봉우리를 날려 버리셨다 한들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진정 천마(天魔)에 어울리는 힘이다. 본교의 앞날이 실로 밝구나.’
내심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무담이 이내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한데 어찌……?"
"적이 왔거든요."
"적?"
"그렇습니다. 담사영이 본교에 들어왔습니다."
"뭐, 뭐라고?!"
우우우웅!
무담의 몸에서 즉시 무시무시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그만한 마기를 쏟아 내고 있음에도 곯아떨어진 누구도 깨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이다.
"담사영, 그 악랄한 놈이 본교에 들어왔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현재 교주님께서 그와 독대 중입니다."
"이런!"
기함한 무담이 서둘러 대전 문으로 향했다.
그때, 호요성이 외쳤다.
"가만히 계십시오!"
무담이 움찔했다.
"그 무슨 말씀이오? 담사영이 왔다 하지 않았소?"
"교주님께서 왜 수뇌부를 전부 재워 버리셨겠습니까?"
"……?!"
"홀로 맞이하러 가신 겁니다. 교주님 스스로 원하신 바이니, 대호법께서도 여기서 기다리시지요."
여유롭게까지 느껴지는 말에 무담의 눈이 충혈되었다.
"교주님의 안위가 걸린 일이오!"
"교주님께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
"신교의 대호법으로서 교주님의 안위를 누구보다도 걱정하시는 마음은 잘 압니다만, 지금은 이곳에서 기다리시지요. 잠자코."
무담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하니 교주님께서 수뇌부를 재운 이유가 홀로 적과 조우하러 가기 위함일 줄은 몰랐다.
‘교주님.’
무담은 서량을 믿었다. 그가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을 것임을, 저 위험천만한 악적인 담사영과의 전투에서 당당히 승리하고 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신적 존재를 향한 무한한 신뢰와 호위라는 의무에서 비롯된 걱정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대체 교주님께서는 어찌?"
"쓸데없는 피해를 막고자 하심입니다."
쓸데없는 피해라…….
이를 악물었던 무담이 이내 몸에 긴장을 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알고 있었소. 만일 담사영이 찾아오게 되면, 그는 능히 교주님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힘을 손에 넣은 이후이리란 것을."
"제가 말씀드렸으니까요."
"그렇소. 하나, 총군사가 말해 주기 전에도 느끼고 있었소. 나 역시 담사영이라는 악적이 승산 없는 승부에 임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그렇군요."
"이제는 총군사도 알 것 같으니 물어보겠소."
무담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었다.
"교주님께서는 어찌 그가 이만한 힘을 얻을 때까지 놔두신 것이오? 또한 어찌하여 그를 본교로 초대한 것이오? 굳이 외단 마인들을 교외로 보낸 것은 어째서이며, 우리를 재운 이유는 또 무엇이오?"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교주는 곧 신(神)이요, 신의 명령에 이유를 따져서는 아니 되는 법.
하지만 근래 서량이 내렸던 명령은 상식을 벗어나도 너무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입장에서야 굳이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다지만, 그간 쌓인 의문이 너무나도 많았다.
물끄러미 무담을 응시하던 호요성이 유독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짐작은 짐작일 뿐이오. 내 분명히 말하건대, 이제는 알아야겠소. 그러니 괜한 말로 답변을 늦추지 말아 주시길 바라오."
호요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길이야말로 담사영이 도망치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오?"
"담사영은 밑바닥에서부터 정파 무림 정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정파 무림의 모든 힘을 손에 넣은 후, 한동안 세력을 확장하지 않았지요."
"그게 어쨌다는 말이오?"
"달리 대단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담사영은 그간 안분지족했던 것입니다. 그 자리, 그 위치에."
"……!"
"아시겠습니까? 정파 무림은, 어떤 의미로는 우리 마도 무림보다도 보수적인 사회입니다. 담사영은 오직 그곳의 정점에 오르겠다는 욕망을 갖고, 실제로 오르고야 만 무서운 인물이란 말입니다."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능력을 떠나, 담사영에게 가장 무서운 무기는 바로 욕망입니다. 자존심과 욕망으로 똘똘 뭉친 존재인 그가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은 무언가를 하겠다 결의한 순간이 되겠지요."
무담의 눈이 흔들렸다.
"교주님은 그런 담사영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만일 교주님께서 담사영을 잡겠다고 병력을 일으켜 공격했다면, 분명 담사영은 어떤 기상천외한 수법을 써서라도 도주했을 겁니다."
"그것은 그저……!"
"물론 추측에 불과하지요. 진정 담사영이 교주님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
"아시겠습니까? 만일 담사영이 교주님을 피해 도주에 성공한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구려."
"담사영이 가장 위험하지 않은 순간, 그것은 그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당당히 만났을 때입니다."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눈앞에 보이면 잡아 죽일 수 있지만, 보이지 않을 때는 그 누구보다도 위험하지요. 교주님께서 지금껏 놈을 놔두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무담이 재차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위험한 자인 줄은 알았지만, 그리 신경 써야 할 정도인 줄은 몰랐소."
"거기서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음?"
"대호법께서도 생각하고 계실 텐데요. 지금의 교주님이라면, 설령 담사영이 훗날을 기약하며 호시탐탐 중원을 노린다 한들 절대 당하실 분이 아니니 말입니다."
"하면……?"
"우리 때문입니다."
여유작작하던 호요성의 얼굴이 서서히 흐려졌다.
기쁨, 착잡함, 송구함 등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담사영과의 대립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고통받는 것은 교주님 휘하 마인들, 즉 우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약 없는 전쟁 가운데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은 쪽을 생각해 보십시오."
"……!"
"외성 말단 마인 하나의 목숨조차도 귀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의 목숨조차도 잃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안고 가려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모시는 교주님입니다."
무담의 눈이 가없는 감격으로 일렁였다.
"그렇다면……."
"예."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를 본교로 부른 것이오? 외단 마인들은 전투에 휩쓸릴까 싶어 교외로 보내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우리는 왜 술에 취하도록 만든 것이오?"
"담사영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건 무슨 말이오?"
"드넓은 황야에서 마주하게 되면 그를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교에서는 아니지요."
호요성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자는 무조건 패배할 겁니다. 그리고 절대로 도주하지 못할 것입니다."
"……!"
"물론 수뇌부들 또한 외단 마인들처럼 교외로 보내 버릴 수도 있지요. 허나 그것은 제아무리 적을 죽이기 위함이라도 천년 역사에 오명을 드리우는 길입니다. 그래서 수뇌부들만큼은 교에 남도록 하신 겁니다."
입술을 깨물며 깊이 생각에 잠겼던 무담이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궁금증이 다 풀리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놈 하나 때문에 본교가 이 사달이 났구려."
"무공이 강한 적보다도 무서운 적이 바로 담사영 같은 적입니다."
호요성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빛이 어렸다.
"지금 그 난적이, 자신의 가장 위험한 무기를 버리고 직접 본교로 찾아온 것입니다."
* * *
"후우."
담사영이 길게 심호흡했다.
은은히 번지는 주향이 달큼했다.
"오랜만이군, 술을 이렇게까지 많이 마셔 본 것은."
"그런가?"
"이렇게 마시고도 취기가 돌지 않은 적도 처음이야."
"생각보다 잘 마시는군."
"술이 좋아서 그런 모양이지."
"그렇기도 하고."
서량이 항아리를 두들겼다.
"다 비었구만."
"그렇구먼."
못내 아쉽다는 듯, 담사영이 입맛을 다셨다.
"마음 같아서는 몇 동이를 더 마시고 싶구먼."
"그건 저승 가서 마시도록 하게."
미소 짓던 담사영의 표정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대접은 잘 받았다."
"누구한테도 이런 대접 안 해 줘. 영광으로 알아."
"이 정도 대접을 받았으니, 나 역시 보답을 해야 할 터인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허허허."
담사영의 눈이 번뜩였다.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말해."
"왜 그랬느냐?"
"뭘?"
"네놈이 내게 한을 품은 것은 안다. 그렇다면, 중원에 나와서 그 난장을 칠 것이 아니라 곧장 내게로 오면 그만 아니었더냐?"
"……."
"비록 내게서 도망쳤지만, 네놈의 실력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달리 없었다. 다소 위험하기야 했겠지만, 네놈의 실력이라면 손쉽게 의천맹의 경비를 뚫고 내 목숨을 노려 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물며 난 네놈이 죽은 줄 알고 있었으니 꽤 방심하고 있었을 것이고."
서량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절반밖에 남지 않은 육천심주가 영롱한 빛을 발했다.
담사영이 재차 물었다.
"왜 그랬느냐? 왜 바로 내게 오지 않았지? 어찌하여 중원에서 그 난장을 쳤으며, 지금에서야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냐?"
"운명을 믿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담사영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지금은 믿는다."
"나는 예전부터 믿고 있었다. 운명이 존재함을."
"그래서?"
"너와 나는 운명으로 얽혀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또 하나의 길이 펼쳐져 있었어."
"그게 무엇이냐?"
서량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세상을 손에 넣는 것. 너와의 악연이 운명이라면, 그것은 나의 숙명이었다."
"……."
"이해하겠나? 비로소 운명을 마주하고, 숙명을 이루게 된 내 심정을."
담사영이 싸늘하게 웃었다.
"준비는 됐느냐?"
서량이 마주 웃었다.
"물론이다."
콰아앙!
지근거리에서 충돌한 두 사람 주변으로 광포한 폭풍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