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화. 숙적(宿敵) (4)
콰르르르릉!
단단한 청석 바닥이 두부 으깨지듯 부서졌다.
우두둑! 우두둑!
깍지를 낀 두 사람의 손에 굵은 혈관이 돋아났다. 그야말로 힘 대 힘의 대결이었다.
"호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이마에도 혈관이 불거져 있다. 어중간하게 들이받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새로 장만한 몸뚱이로도 제법 하는구만? 젊음이 좋긴 좋아. 그렇지?"
우두두둑!
맞잡은 손이 하얗게 변했다.
담사영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네놈은 무식하게 힘만 세구나."
서량의 신체야 진즉에 완성형에 도달했으니 힘쓰는 대결에서 밀릴 이유가 없지만, 그런 서량의 힘에 밀리지 않는 담사영의 신체 역시 놀라우리만치 대단했다.
특히 황태자 주천양의 신체로 이런 힘을 낸다는 게 더욱 놀라운 부분이었다. 단련도만 보면, 오히려 대법을 시행하기 전 담사영의 신체보다도 약한 게 주천양의 몸이었다.
바로 진천룡기(眞天龍氣)의 힘이었다. 진기의 농도는 서량의 마기에 크게 뒤지지 않으며, 술력(術力)을 바탕으로 하기에 의념을 싣는 만큼 진기의 바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일단은."
화르르르륵.
서량의 두 눈에서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몸 좀 풀어 볼까."
그의 무릎이 번개처럼 솟구쳤다.
콰앙!
담사영의 몸이 덜컥거렸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올려 친 슬격이 그의 가슴께에 명중했다. 극마의 고수도 일격에 흉골이 박살 날 정도의 힘이 담긴 막강한 일격이었다.
힘의 수준이 다르다. 당대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조차 일격에 죽일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몸풀기가 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흐음."
담사영이 흐릿한 눈으로 서량을 노려보았다.
막강한 일격을 맞았음에도 아무렇지도 않다. 천룡기의 내공 방벽, 극대화된 의념으로 당대 천하제일인의 일격을 해소해 낸 것이다.
"과연, 이 정도가 몸풀기란 말이지."
담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좀 실망이구나."
콰아아앙!
서량이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서량의 슬격이 정직한 강함을 품고 있었다면, 담사영의 반격은 유연함과 음험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숨결이 닿을 정도의 근접 거리에서 발끝을 올려 차는데, 그 정교함이 대단했다.
웃으며 서량을 보던 담사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서히 고개를 내리는 서량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쯧, 안 되겠다."
"……!"
"이 정도면 몸풀기도 안 되겠어. 일단 몇 대 맞고 시작하자고."
서량이 손에서 힘을 뺐다.
빠각!
"큭!"
담사영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박치기?!’
설마하니 이런 품위 없는 공격을 가할 줄은 몰랐다.
정신이 번쩍 드는 일격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꽤 충격이 큰 일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놈이……."
터어억!
담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큼직한 손이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도 빠르고 자연스러워서, 어떻게 잡혔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서량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담사영의 눈이 커졌다.
쾅! 콰앙! 콰앙!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상대의 멱살을 틀어잡고 안면을 향해 연신 주먹을 꽂아 넣는다.
무공을 한 수라도 배웠다면, 뒷골목 파락호라 해도 이런 식으로 싸우진 않는다. 멱살을 잡고 밀어붙이며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다니, 이건 무공이 아니라 막싸움이었다.
콰아앙!
담사영의 몸이 유독 크게 휘청거렸다.
제아무리 진천룡기의 방벽이 탄탄해도, 안면에 주먹을 허용할 리는 없었다. 와중에 팔을 들어 권격을 막는 담사영의 방어도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나 충격이 극심했다.
수천 근 바위가 고속으로 날아와 꽂히는 것 같았다. 어찌나 당황스러운지 일순 반격할 생각도 못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맞아 줄 수는 없었다.
퍼어어엉!
멱살을 쥔 서량의 손이 위로 튕겨 나갔다. 담사영의 장력이 그의 하박을 후려친 것이다.
‘이놈!’
당황해서 몇 번의 공격을 허용했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이런 식의 공격은 충격을 떠나 모욕적이었다. 자존심 문제인 것이다.
곧장 거리를 벌려 장력을 쏟아부으려던 담사영은 일순 깜짝 놀랐다.
‘없다.’
전면에 있던 서량이 홀연히 사라졌다.
기척도 없이 사라지니 천하의 담사영이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천룡기를 완성한 그의 반사 신경으로도 서량의 움직임을 읽지 못한 것이다.
훅!
머리 위에서 불꽃 같은 마기가 번져 나왔다.
‘위!’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려던 담사영은, 순간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가 그대로 몸을 돌려 후방으로 팔꿈치를 갈겼다.
콰아앙!
담사영이 비틀거리며 대여섯 걸음을 물러났다. 상단에서 접근했다고 생각한 서량이 후방에서 나타난 것이다.
본능대로 후방을 노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당했다. 극도로 발달한 육감이 목숨을 살린 것이다.
"제법이군."
번쩍!
폭풍처럼 접근한 서량이 쌍권을 내질렀다.
"반응이 좋아."
콰콰콰쾅!
쏟아지는 연환권법에 폭음이 울려 퍼졌다.
화포가 터지듯, 아니 실제 일격의 위력이 화포 이상을 넘보는 무신(武神)의 공격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 아님에도 화기(火器)의 위력을 상회하는 주먹질,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위험하다는 천마의 무공이었다.
쾅! 콰르릉!
담사영은 좀처럼 반격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
파바바바박!
서량의 움직임은 빠르면서도 자연스럽고, 가벼우면서도 묵직했다.
그 정도 기운을 갈무리한 고수가 마음먹고 땅을 박차면 땅거죽이 뒤집힌다. 그런데도 땅을 박차는 발놀림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청석에 금 하나 가지 않았을 정도였다.
물론, 공격까지 가벼운 건 아니었다.
콰아앙!
곧게 들어간 일격.
이번 일격은 제법 묵직했다. 담사영의 몸이 붕 떠올라 오 장 밖으로 날아갔다.
서량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쿠우웅!
대지가 뒤흔들리자마자 그의 신형이 담사영 측면으로 돌아갔다.
대성에 이른 마황군림보였다. 전설상의 축지성촌(縮地成寸)을 구사하는 듯, 단 한 걸음에 오 장 거리를 주파한 것도 모자라 공격 준비까지 완벽하게 마쳤다.
담사영의 손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콰르르릉! 퍼어엉!
튕겨 나간 권경이 내성 성벽에 구멍을 뚫었다.
콰지지지직!
짓누르는 힘을 전부 해소하지 못했다. 담사영의 발 주변으로 거미줄 같은 금이 번졌다.
압도적인 승부였다.
본디 초절정고수와 극마지경에 달한 고수 간의 속도 차이는 크지 않았다. 초절정의 영역만 해도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낼 수 있는지라, 무공의 위력과 깨달음에선 차이가 나도 실제 속도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달랐다.
인간의 육신, 물리의 한계를 벗어난 공방을 주고받는다. 일격, 일격이 부딪칠 때마다 신교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파가 발생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놈.’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서량의 공격을 받아 내며, 담사영은 생각했다.
‘완전히 무르익었군.’
이놈은 살왕 시절에도 기예(技藝)만큼은 유독 특출났던 놈이었다.
거기에 무수한 실전으로 다져진 감각은 한동안 실전의 부재가 이어졌다고 떨어질 수준이 아니었다.
기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은 물론 압도적인 실전 경험, 살법에 관한 전무후무한 이해력과 본인의 초감각을 무공과 일치시킨 괴물 같은 창의력은 이미 하나의 종파(宗派)로 인정받아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근접 거리의 박투전에서는, 가히 고금제일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터.’
담사영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를 벌리지 않으면 내가 패한다.’
아직 지닌 힘의 삼 할도 보여 주지 못한 채 밀리고 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전신의 힘을 발산해 기공전으로 돌리려 해도, 도무지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상대가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드는 것.
실전에서 상대가 필살의 일격을 가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건 바보짓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숨 쉴 틈조차 안 주는 무공도 달리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흐름을 바꿔야 한다!’
우우우우우우웅!
담사영의 등 뒤에서 무형의 돌풍이 일기 시작했다.
공격에 치중한 서량 모르게 구사한 풍술(風術), 회룡풍(廻龍風)이었다. 술계 풍술에서 제일가는 위력을 자랑하는 술법으로, 완성된 회룡풍은 전각 하나를 모래처럼 으스러트릴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최고급 풍술을 진천룡기로 구사한다. 그 위력은 형언 불가일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 작은 빈틈, 극도로 작은 빈틈만 보이면…….’
콰쾅! 콰아앙! 퍼어어엉!
‘곧바로 최강의 풍술이 널 날려 버릴 것이다.’
콰콰쾅! 콰르르릉!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담사영은 점차 기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놈 뭐야?!’
퍼버버버벅!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산타(散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대체 이놈은 언제 숨을 쉬는 것이야!’
공격이 끊이질 않는다.
말 그대로 호흡을 멈추고 후려갈기는 무호흡의 연타였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자연스레 후속 공격을 날리니, 연환 공격이 아닌데도 흐르는 물살처럼 밀려 들어와 반격할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량이 발이 탄력적으로 휘어져 올라왔다.
퍼퍼퍼퍼퍼펑!
길고 굵직한 다리가 허공을 가르는 것만으로도 대여섯 번의 충격파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놈!’
콰르르릉!
담사영이 전각 하나를 박살 내며 튕겨 나갔다.
퍼퍼퍼펑!
경악의 연속이었다. 전각이 무너지기도 전에 담사영에게 접근한 서량이 또다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더 빨라졌다!’
퍼퍼펑! 콰콰쾅!
양손으로만 갈겨 대던 공격에 각법이 추가된 것도 모자라 가일층 가속하기까지 했다.
맨손 백타의 연환 공격으로 산봉우리 하나를 허물 수도 있겠다. 숨 가쁘게 몰아치는 권각에 담사영은 점차 신체에 부담이 오는 것을 느꼈다.
‘벌써?!’
담사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벌써 흔들린다고? 내가?!’
신경 한 줄기, 근육 한 올에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진천룡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천룡술법의 완성형이라는 진천룡기는 무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무적의 힘을, 대단한 기공력도 아니고 고작 권각술만으로 파훼하고 있는 것이다.
‘이놈!!’
그때였다.
파지지지직! 콰아아앙!
실로 오랜만에 뻗어 내는 천마벽력권(天魔霹靂拳).
진천(振天)의 뇌화포(雷火砲)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한 위력을 자아냈다. 담사영의 몸이 청석과 흙바닥을 뒤엎으며 속절없이 밀려났다.
‘엄청나구나.’
이번 일격은 정말 대단했다. 천라무허신공의 내공 방벽까지 두르지 않았다면 팔 하나는 틀림없이 날아갔을 일격이었다.
‘엄청났지만…….’
흐으으읍!
드디어 서량이 숨을 쉬었다.
그조차도 무척 짧았지만, 분명한 빈틈이었다.
담사영의 눈빛이 한순간 싸늘해졌다.
‘끝이다.’
부아아아아앙!
담사영의 등 뒤로 거대한 용권풍이 일었다. 최강의 풍술, 회룡풍을 쏘아 내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화르르르르륵!
"헉!"
깜짝 놀란 담사영이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콰르르르릉! 치이이이이익!
하늘까지 치솟은 회룡풍이 어느새 핏빛 화염으로 물들어 있었다.
화염의 돌풍이었다. 회룡풍이 솟구치는 곳에서 구유마화가 치솟더니, 그 자체만으로도 위력적이던 돌풍에 화기(火氣)까지 끼얹은 것이다.
문제는 담사영이 구유마화에 대한 내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으면 회룡풍을 쏘아 내는 순간 담사영의 육신도 재가 되어 날아갔을 것이다.
두근두근.
담사영은 적잖이 충격받은 얼굴로 서량을 노려보았다.
"후우우우, 아쉽구만. 손쉽게 끝장낼 수 있었는데."
"……알고 있었던가?"
"이곳은 내 영역이다. 모를 거라 생각했나?"
"……!"
서량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음, 좋아."
발끝을 툭툭 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다.
"이제야 몸이 좀 풀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