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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617화 (616/774)

617화. 숙적(宿敵) (5)

"흐음."

황궁을 올려다보는 여극도의 얼굴이 미비하게 굳어졌다.

"과연, 희대의 악종 담사영의 마지막 거처다운 위용이다. 진기가 다 빠져나가 껍데기뿐인 진법인데도 이 정도…… 그야말로 엄청나구나."

그때, 여상린이 말했다.

"천룡무혼(天龍無魂)."

"음?"

여극도와 여강휘가 그녀를 보았다.

황궁 전체에 흐르는 안개를 둘러보는 여상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천룡무혼진이에요. 만일 천룡기로 꽉 채워져 있었다면 천룡유혼(天龍有魂)이라 불렀겠지만."

여강휘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

"조사해 봤으니까요."

"조사?"

"오라버니가 천위에 오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몰랐거든요. 교주님께서 언제 공격에 들어갈지도 모르고요. 그렇다면, 내 무공 수련 이전에 적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죠."

"호오."

"다행히 하오문주가 천룡궁에 대해 이것저것 조사를 해 놨더군요. 그 양이 너무 방대해서 당장 처리하지 못할 정도래요. 그걸 다 받아 봤죠."

여강휘는 혀를 내둘렀다.

"하오문주씩이나 되는 사람도 다 보기 어려운 양을 그새 전부 찾아본 것이냐?"

"하오문주는 바쁜 사람이고요. 저는 시간이 널널하니까요."

말이 쉽지, 어지간히 똑똑하지 않으면 단시간에 그 많은 양의 정보를 머리에 담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여상린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천룡궁의 진법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만큼 눈썰미가 대단하다는 뜻이리라.

"중요한 건, 저 진법이 설령 껍데기뿐이라 해도 위험하다는 거예요. 천룡궁의 진법은 천룡기와 본질을 같이하기 때문에, 아예 깨부술 목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 이상 어지간한 기운은 전부 흡수해 버릴 거예요."

"음."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어떠세요?"

여극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다. 흡수는 모르겠지만, 빙백무(氷魄武)가 아니고서야 통하질 않겠어."

빙백무라면 통한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여극도, ‘자신의 빙백무’가 아니면 통하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여강휘 역시 천위의 경지에 올랐지만,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을 감행한다 한들 별소용이 없을 거란 뜻이기도 했다.

"대단하군요. 천위의 고수가 맹공을 퍼부어도 쉬이 뚫리지 않는 진법이라……. 린이 말대로 진기까지 품고 있었다면, 가히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했겠습니다."

"그랬겠지. 하지만……."

여극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 교주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서량의 경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하 어떤 사람도 서량이 이룩한 경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분석할 수도 없는 경지에 오른 절대자.

‘하지만 서 교주는 형(形)은 물론 기(氣)의 흐름마저도 선점하는, 말하자면 예지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게 확실하다. 게다가 지난번 철혈성 전투에서 천재지변을 연상케 하는 무공을 구사했다고 했어. 그렇다면 심검(心劍)을 구사할 수도 있다는 소리.’

여극도의 눈이 깊어졌다.

‘심검의 일격이라면 제아무리 대단한 진법이라도 일격에 양단이 가능할 터. 한데도 부수지 않고 황군만 빼내 돌아갔다.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겠지만…… 정말 그럴 필요가 있었던 건가.’

그때, 여강휘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래."

여극도가 등을 돌렸다.

쿠르르릉.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부옇게 피어올랐다.

여극도가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더 빠르군. 저들 역시 이 싸움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었던 모양이야."

서서히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황군이 아니군요."

"아니, 황군도 함께다."

"예?"

"선두에서 오는 사람의 기파가 너무 강해서 묻혀 버린 것이야. 기감을 더 날카롭게 세워라."

우우우웅.

여강휘의 몸에서 은은한 백광(白光)이 피어올랐다.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군요."

"그래."

화아아아악!

보이지 않는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듯했다.

실로 엄청난 기파였다. 비록 초입에 불과하다지만 천위의 경지에 오른 여강휘조차 긴장으로 몸이 얼어붙을 만큼 막강한 기파였다.

"느꼈느냐?"

여극도의 안광이 번뜩였다.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곳을 꿰뚫어 보는 절대자의 눈에, 폭풍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질주하는 한 사람이 보였다.

"저자가 바로 사파의 종주, 철혈성주 수라제 송금백이다."

그쪽 역시 이쪽의 기척을 느낀 것일까.

콰아앙!

그렇지 않아도 빨랐던 속도가 한순간 세 배는 더 빨라졌다. 지금껏 휘하 병력과 속도를 맞췄을 뿐,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우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에 세 사람의 머리카락과 의복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그리고.

쿠웅!

하늘 높이 솟구친 한 사람이 여극도의 전면 오 장 앞에서 내려섰다.

여극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지 못했구려. 내가 바로 빙궁을 맡고 있는 여 모외다."

그때란 바로 서량과 송금백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때를 말함이다.

당시 목숨을 건 서량의 맹공에 송금백은 결국 패배했고, 정예병과 함께 퇴각했다. 그리고 퇴각한 그들을 뒤쫓으며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전해 준 사람이 여극도였다.

여극도는 송금백을 본 적이 있었고, 송금백 역시 여극도의 기도를 느낀 적이 있었다.

구면이지만, 또한 첫 대면이기도 한 자리.

번뜩이는 눈으로 여극도를 보던 송금백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철혈성주외다."

"알고 있소."

송금백은 순수하게 놀랐다.

근거리에서 마주한 여극도의 무공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눈보라처럼 몰아치는 존재감만으로도 신체 말단부가 차갑게 굳어지는 듯했다.

‘나의 아래가 아니다.’

북해빙궁이야말로 새외제일의 무력 집단이라더니, 과연 그런 평가를 받을 만했다. 심지어 자신은 천룡기를 제거하며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었는데도 여극도와의 승부에서 우위를 점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이지, 세상에는 강자가 참 많소이다."

감탄 어린 송금백의 말에 여극도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나 말이외다. 송 성주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그새 더 발전하셨구려."

"그건 여 궁주도 마찬가지인 것 같소."

여극도가 여강휘의 어깨를 두들겼다.

"누군가를 가르치며 느는 경우도 있더이다."

"아드님이로군."

"그렇소."

가만히 여강휘를 보던 송금백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또 말도 안 되는 천재로군. 서 교주 이후로 그만한 괴물은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늘, 요새는 화경이 유행인가?"

여강휘가 고개를 숙였다.

"빙궁의 소궁주 여강휘가 철혈성주를 뵙습니다."

"반갑네."

짧게 고개를 끄덕인 송금백이 이번에는 여상린을 보았다.

여상린이 씨익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송금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은 여전하구만."

"요새는 기가 많이 죽었어요. 시국이 시국이라서요."

"천성은 바뀌기 힘든 법이지. 과거, 처음 봤을 때의 패기만만한 모습을 하루빨리 되찾았으면 좋겠군."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래, 그럼 되었네."

쿠르르릉.

어느새 철혈성의 병력과 그 뒤를 따르는 황군의 병력이 시야에 잡혔다.

송금백이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좋은 요리에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소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구려."

"공통의 목적이 있으니 일부터 마친 뒤에 한잔하십시다."

"그럽시다."

두 절대자가 나란히 황궁을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문답무용이라면 성문부터 열어봅시다."

"같은 생각이었소."

휘이이이이이잉!

일순 불어온 시린 바람이 이내 살을 엘 듯한 폭풍이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쩌저저저저저적!

여극도 주변 땅이 허옇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빙백신공을 끌어 올린 것이다.

진기를 끌어 올리는 것만으로 반경 오 장이 넘는 땅을 순식간에 얼려 버린다. 상상을 초월하는 절대무공, 새외제일의 강자라는 여극도의 신위였다.

화르르르르륵!

송금백의 존재감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검붉은 진기를 끌어 올리는 송금백, 얼어붙은 땅 위로 극양의 기운이 번져 나가며 엄청난 수증기를 만들어 냈다.

크아아아아악!

환청처럼 들리는 괴물의 포효였다. 사파 최강의 무공, 묵혈괴룡공의 강림이었다.

"준비됐소?"

"물론이오."

"자, 갑시다."

두 사람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졌다.

콰아아아앙!

새하얀 눈 폭풍에 휩싸인 검붉은 용이 천룡무혼진과 함께 황궁의 성문을 그대로 휩쓸어 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우와아아아아!"

"진격하라!!"

철혈성의 이천 병력과 오만육천의 황군이 황궁으로 뛰어들었다.

* * *

"뭐 해?"

서량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안 들어올 건가?"

"……."

물끄러미 서량을 노려보던 담사영이 몸을 세웠다.

후두두둑.

고급스럽기 그지없던 황금빛 곤룡포는 어느새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의복까지 스며든 진천룡기 덕분에 옷이 많이 상하진 않았지만, 고귀했던 담사영의 인상을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대단하구나."

담사영은 솔직한 감상을 뱉어 냈다.

"정말 대단해. 네놈의 무공은 진실로 규격 외다. 이 정도 경지에 올랐으니, 앞으로 수십 년간 실전을 겪지 않는다 한들 떨어질 기량이 아니로다."

"물론이지. 다만, 여기까지 기어 올라오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생사결이 있었지."

"목숨을 걸고 살아온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힘이라, 이것이냐?"

"바로 그것이다."

서량의 눈이 차가워졌다.

"너와는 다르지. 나는 하루 매 순간 목숨을 걸고 힘을 단련했지만, 너는 타인의 목숨을 희생시켜서 힘을 불렸다."

"……."

"싸움 중에 주절주절 떠드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넌 절대로 날 이길 수 없어."

"웃기는 소리."

담사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과정이 어떻든, 도달한 곳이 드높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너나 나 정도의 경지에 오른 자들에게, 경험이 주는 힘 따위는 필요치 않아."

"내 손에 죽은 모든 자들이 너와 같았다. 자신이 얻은 힘에 도취되어 결핍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너의 경지는 나의 필적, 아니 어떤 부분에선 나보다 뛰어나다고도 볼 수 있겠군. 하지만 결국 그 힘조차도 껍데기에 불과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같은 결과라도 과정이 어땠는지에 따라 영향력이 달라지는 법. 과거의 의천맹주들을 보아라. 그들 역시 너처럼 의천맹의 수장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며 칭송을 받고 있지."

담사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반면 서량의 미소는 한층 짙어졌다.

"너와는 다르지? 그런 것이다. 결과가 같다 한들 너처럼 협잡으로 쌓아 온 명성은 십 년을 가지 못하는 것이고, 한평생 도덕과 협의를 중시한 그들의 명성은 천년을 가는 것이다."

"……닥쳐라."

"그리고 너의 힘 또한."

파지지지지지직!

서량의 양손에서 흑색 뇌전이 방전했다.

쿠르르르릉!

솟구치는 마기에 먹구름이 꿈틀거렸다.

"무수히 많은 죽음을 뚫고 얻은 나의 힘 앞에, 무용지물이 되리라."

담사영의 눈이 흔들렸다.

콰르르르릉!

천둥 번개가 휘몰아치고, 세상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군림마황기(君臨魔皇氣).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천마신교 최강의 무공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치 지금의 서량처럼, 군림마황기 역시 천년의 세월 동안 숱한 고난을 겪으며 완성된 무적의 절기였다.

그 무적의 힘이 외치고 있었다.

너는 죽는다고. 오늘, 바로 이곳에서.

"이놈!!"

콰르르르릉!

담사영의 등 뒤에서 오행(五行)의 힘이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쳤다.

"십 합 이내로 죽여 주마!"

콰앙!

담사영의 주먹이 군림마황기의 내공 방벽을 그대로 깨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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