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화. 숙적(宿敵) (7)
"궁주님!"
교룡대장의 다급한 외침에도 무명은 말없이 술만 홀짝였다.
왜일까? 처음 술을 마셨을 때는 이 맛도 없고 정신까지 흐트러트리는 걸 왜 마시는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술은 취하라고 마시는 것이다. 그 취하는 맛이 상당히 일품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현재 빙궁주로 추정되는 고수와 철혈성주, 그리고 철혈성의 이천 병력과 황군이 황궁의 외성을 침범했습니다!"
"알아."
무명이 재차 술잔을 기울였다.
독한 화주에 뒷골이 다 땅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화주가 위장으로 넘어가 온몸으로 퍼지자, 기분이 더더욱 나른해졌다.
"대응하고 있어. 곧 뒤따라갈 테니."
"……!"
"혹시 모를 적습을 대비한 진법이 있다고 했잖아. 발동 조건, 전에 알려 줬지?"
"……정말 그렇게 합니까?"
"이곳을 지키고 싶다면 그렇게 해."
교룡대장이 이를 악물었다.
진법의 발동 조건은 다른 게 아니었다. 휘하 교룡조원들을 희생시켜야만 진법이 발동하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토대로 발동되는 천룡의 진법. 이미 그들은,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새에 무명의 술법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주군인 담사영이 돌아와 해체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술법에.
"와 주실 겁니까?"
"이 병을 다 비우면."
"……알겠습니다."
"그래."
교룡대장이 거처에서 나갔다.
무명이 코웃음을 쳤다.
"흥, 진법으로 막을 수 있는 놈들이었다면 굳이 너희의 생명과 연동시켰겠느냐. 멍청한 것들."
하여튼 중원 놈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술법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무작정 배척하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런 주제에 진정한 술법을 보면, 잡스러운 사술이라 매도하며 혀를 차기 바빴다.
‘오래 걸렸지.’
정말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는지 모르겠다.
‘몇 년째이던가. 그 많은 궁주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생을 연명해 온 세월이.’
무명은 이름이 없었다.
물론 까마득한 과거에는 그녀도 이름이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이름이.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잃었다.
신열을 앓고 육체에서 벗어난 그녀는, 천룡궁 내에서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궁주의 몸에 기생하며 살아왔다.
열 명인가? 혹은 열한 명인가?
어쩌면 열두 명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수 세대 동안 무수히 많은 궁주의 몸을 거친 그녀가 역대 궁주들의 지식을 하나씩 습득하여 불세출의 술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술계에서 말하는 귀신(鬼神)의 상태와 비슷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육신을 잃고 귀신이 되어 궁주들의 상단전에 머물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술법을 연성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천룡궁의 마지막 궁주 고인정(高仁靜)의 몸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자질 없는 고인정의 영혼을 완전히 집어삼킨 후, 역대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궁주로 명성을 날렸다.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무명의 동공이 탁해졌다.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그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쿠르르르릉!
황궁이 뒤흔들렸다.
그야말로 심상치 않은 진동이었다. 마침내 교룡대장이 휘하 조원들의 목숨을 담보로 진법을 펼친 모양이었다.
무명이 피식 웃었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천하가 내 손안에 들어올 텐데, 이까짓 황궁쯤이야."
또한, 그녀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정확히는 영혼과 육신의 결속을 억지로 느슨하게 했다. 또한 승천의 길을 막고 유혼(幽魂)의 술법을 항상 둘러쳤기에, 생각지 못한 죽음을 맞아도 사십구 일 안에 들어갈 몸을 찾으면 또다시 기나긴 생을 이어 갈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조차도 얼마 남지 않았지.’
무명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하를 손에 넣는 것. 드넓은 천하에 천룡의 기치를 세우는 것. 그것으로 지난 죄를 갚을 수 있다면, 그때는 나의 기나긴 생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겠지.’
수백 년 세월을 살아오며 몇 번이나 죽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간 그녀가 행한 죄가 너무나도 가증스러웠기 때문에, 그 죄를 천하라는 선물로 갚기 전까진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담사영이 마교주를 죽이는 순간까지만.’
탁하고 흐릿했던 무명의 눈빛이 일순 화려한 광채를 발했다.
"……아니, 마교주의 몸을 차지하는 순간까지만이라도."
담사영은 강하다.
대법을 시행한 후, 혈원기를 몽땅 흡수해 진천룡기로 개화시킨 담사영의 힘은 가히 역사상 최강을 논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담사영은 천룡의 전설에 나오는 진짜 용신(龍神)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 저 고금제일의 마신이라 불리었던 이천상 정도가 아니면, 서량이 둘이 있어도 상대가 안 될 거야.’
이건 자신감이 아니었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담사영은, 그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천재지변에 가까운 술법까지도 구사할 수 있는 무적의 괴수가 되었다.
천마의 무공? 아쉽지만, 그 무공이란 것 역시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담사영이 휘두르는 힘은 신(神)의 힘이다.
서량은, 십대천마는 절대로 담사영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무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일순 머리가 띵했다.
푸스스스스.
천룡기로 주기(酒氣)를 날려 버린 무명이 손을 휘둘렀다.
쾅!
방문이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튀었다.
하나뿐인 손으로 뒷짐을 지며 나아가는 그녀.
하지만 그도 잠시.
움찔!
방을 나서기 직전, 그녀의 걸음이 멈추었다.
"……뭐지?"
무명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의 고개가 서서히 남쪽으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야?"
무명의 입이 쩍 벌어졌다.
충격으로 가득한 표정이 실로 압권이었다.
"왜 갑자기 느껴지지 않지?"
담사영이 무엇을 하는지, 그 행동이나 생각까진 읽을 수 없다. 제아무리 술법의 끝을 본 그녀라 해도 담사영이 도달한 곳은 중원의 남쪽 끝, 광동성 십만대산이었다.
하지만 담사영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언령(言令)으로 묶인 계약자이기 때문에 그 존재를 더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대, 대체 뭘 하는 거야? 어디로 간 거냐고?!"
……설마 죽었다고?
"아니야, 그럴 리가!"
담사영은 무적이다. 심지어는 그 스스로가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는 존재다. 자살을 선택하는 순간, 언령으로 묶인 술법이 그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 버릴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 담사영은 어디로 간 걸까? 왜 그 강력한 존재감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걸까?
파지지지지직!
무명의 몸에서 시퍼런 뇌광이 일렁였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뇌술을 구사하는 그녀였다. 비록 그 위력은 담사영의 뇌술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능숙함만큼은 담사영을 훨씬 앞서는 그녀였다.
쾅!
방 천장이 부서지며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쿠르르릉.
뇌진(雷震)의 술은 단순히 목표 대상을 파괴하는 데에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뇌술은 탐지용으로도 쓸 수 있다. 특히 담사영처럼 언령이 묶인 자의 상태는 뇌기(雷氣)를 이용해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파지지지직!
천공을 장악한 뇌기가 무서운 속도로 중원 남부를 향해 뻗어 갔다.
"헉!"
순간 무명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저기는?!"
이제야 비로소 담사영의 존재감이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담사영은 분명 광동성 십만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천마신교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담사영이 있는 곳은 천마신교인 동시에 천마신교가 아니기도 했다.
"……대체 당신, 거기는 왜 들어간 거야?!"
그때였다.
쩌저저저저저적!
부서진 방문 밖에서부터 스며드는 한기가 순식간에 그녀의 방 전체를 얼렸다.
무명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여어."
벽에 팔을 대고 기대선 중년 사내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 몸뚱이의 본래 주인도 본 적이 있다만, 지금 그 육체를 차지하고 있는 이도 한 번은 본 적이 있는 것 같군."
"북해제!"
"그래, 내가 바로 북해제다."
후우우우웅.
여극도의 손에서 섬뜩한 백광이 치솟았다.
"오랜만이구만, 천룡궁주."
무명이 이를 갈았다.
* * *
"쿨럭!"
담사영이 한 사발의 피를 쏟아 냈다.
"허억! 허억!"
부서진 건물에 기대어 선 담사영의 외양은 실로 참혹했다.
오른팔은 어디로 갔는지 어깨 아래가 휑했고, 배에는 동그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옷은 넝마가 된 지 오래였으며, 산발한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뜯겨 나가고 그을려서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신기하구만."
푸스스스스.
회흑색 구름을 만들어 내며 다가오는 마신의 걸음걸이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런 꼴이 되고도 용케 살아 있다니. 과연, 네가 완성한 천룡기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허억! 커허어억!"
냅다 욕을 날리고 싶어도 쉽게 나오질 않았다.
‘이, 이 괴물 같은 놈!’
먹구름을 가르며 내리친 일도(一刀)에는 가히 궁극의 무(武)가 깃들어 있었다.
간단한 동작에 만 개의 이치를 담아 휘두른다. 그 절대의 일격을, 담사영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힘의 크기나 농도가 아니라 무(武)의 이치(理致) 때문에 죽을 뻔했다.
끝없이 펼쳐진 죽음의 늪을 헤쳐 나가며 단련한 무신의 무공. 지금에 이르러 완성형의 무도(武道)를 이룩한 천마의 일도(一刀)는, 담사영 정도의 안목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대 무림을 살아가는 누군들, 설령 고금 최고의 강자라 한들 과연 피해 낼 수 있을는지.
"하지만."
파지지지직!
회흑빛 연기 곳곳에서 흑색의 뇌전이 발광했다.
"네놈의 힘도 여기까지인 모양이로구나."
담사영이 이를 갈았다.
"이…… 개자식!"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 퍼어어억!
"크아아악!"
담사영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극심한 내외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서 좌측 다리까지 날아가 버리니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서량의 안광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담사영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북풍한설처럼 차가웠다.
상대를 향한 분노와 한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눈빛.
오만하게 세상을 굽어보는 진짜 무적자의 눈빛은 그렇게나 사납고 위엄이 넘쳤다.
"길고 긴 악연이었다."
쿠르르르릉!
시커먼 먹구름이 무섭게 소용돌이치며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점차 뾰족하게 모이는 먹구름, 그 소용돌이가 향하는 곳에는 서량의 천마도가 있었다.
"이만 끝내도록 하지."
울컥!
땅을 기던 담사영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는 안 돼.’
뇌술? 풍술? 무공?
그렇다. 담사영 역시 그 나름대로 써 볼 만한 모든 수를 써 봤다.
하지만 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그에겐 아직 서량에게 보여 주지 못한 무수히 많은 술법이 있었다.
‘……이익!’
문제는 그 많은 술법을 서량에게 쏟아부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진짜 마신이 된 서량은, 그가 발하는 모든 술법을 무용지물로 만들 만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는 술법을 구사하려고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술법 전개가 되지 않았다.
‘정말이었단 말인가? 고루마존,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내게 군림마황기를 심었단 말인가?!’
순간 담사영의 두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이것도 막아 보거라!’
그가 발작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량과 눈을 맞춘 담사영이 하얗게 웃었다.
"널 공격하려는 의지는 막을 수 있어도, 너와 하나가 되려는 의지만큼은 막지 못할 것이다!"
번쩍!
순간 서량이 입을 떡 벌렸다.
흑백이 뒤바뀐 마신안이 담사영의 그것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그리고.
콰아앙!
담사영의 몸이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