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화. 천하를 발아래 두다 (2)
"……재미있군."
담사영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자리 잡았다.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모습. 신(神)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능력을 손에 넣었지만, 결국 그의 본질은 인간이었다.
"재미있어. 그저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만으로 내 힘을 넘어섰다? 그게 극마다?"
서량은 대답 없이 담사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순간 담사영은 불같은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서량의 눈빛.
살왕 시절에 자신을 보던 눈빛에는 패배감과 공포, 분노와 혼란이 가득했었다.
교주가 되어 처음 자신을 보았을 때의 눈빛 속에는 모든 한을 해소한 위정자의 위엄이 가득했다. 다만 껍데기만 남은 분노 역시 분노인지라, 왜 자신을 해묵은 감정 가득한 눈으로 보는 건지 의아해하긴 했었다.
그리고 지금.
천룡궁의 모든 힘을 퍼부어 용신(龍神)이 된 자신의 상상조차도 아득히 초월한 강자가 되어, 마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지금.
진천룡기를 완성하며 정신과 마음이 한층 성숙해진 자신의 깨달음이 무색하게, 과거 자존심만 강했던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었다.
"웃기지 마라!"
담사영이 버럭 외쳤다.
"네놈이 날 죽여? 감히 날?! 가축만도 못한 놈을 거둬 그럴듯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더니, 배은망덕하게도 주인을 몰라보고 물어뜯으려 드는 것이냐, 이놈!"
서량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심유한 눈으로, 자존심밖에 남지 않게 된 한 ‘인간’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보다 강해져? 그저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만으로 나보다 우위에 섰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증명해 봐라! 이따위 같잖은 진법 속에서 주인을 희롱하려 들지 말고, 어디 정정당당하게 날 짓눌러 보란 말이다!!"
악에 받친 포효였다.
그야말로 온갖 감정이 실려 있는 한 인간의 절규였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 있나?"
"닥치지 못할까! 나는 신(神)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내 위에 선 자가 존재해선 안 돼! 나야말로 이 강호에 어울리는 최고의……!"
"그렇다면 해 봐라."
이제는 서량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살기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욕설을 퍼부으려던 담사영은, 문득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
담사영이 깜짝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주변 풍경이 십만대산으로 변했다. 폭풍을 일으키며 다가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백여 장 밖에는 거대한 규모의 고성이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냐?"
"판마정을 거두었다."
"……!!"
"명백한 현실이란 말이다. 유진도형을 이용, 확장시킨 판마정의 영역을 본래대로 축소했다."
우우우우웅.
서량은 어느새 허공에 떠 있었다.
공중부양이었다. 술법 최고의 경지 중 하나이자 경신술 계의 심검(心劍)이라 할 수 있는 극한의 깨달음을 숨 쉬듯 자연스레 구사하는 그였다.
"판마정으로 데려왔을 때 벌어졌던 전투에서도 난 널 억압하지 않았다. 너의 힘을, 너의 술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고 박살 냈을 뿐."
"……."
"다만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어디 한번 덤벼 보도록 해라."
"이놈!"
"대신 조건이 있다."
번쩍!
서량의 두 눈이 재차 흑백이 뒤바뀐 마신안으로 변했다.
그 빠르고도 무서운 변화에 담사영은 순간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진정 자신보다 강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압감 하나만큼은 진짜였다.
"그 한 수로 내게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면, 나는 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다."
"……."
"죽음이란 곧 생의 종결이자 안식이다. 모든 생명은 그 안식을 약속받고 세상에 나왔지. 그러나 넌 도를 지나쳤어. 너 같은 쓰레기를 안식의 땅으로 보내는 것은 지나치게 자비로운 처사지."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내게 티끌만 한 상처라도 입힌다면, 그때는 죽여 주마."
"……."
"시작해라. 내, 네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니라.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데, 네 상단전에 자리하고 있던 고루마존의 군림마황기는 방금 수거했다."
"……!"
"네놈의 술법이 무용지물이 될 일은 없다는 뜻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덤비도록 해."
담사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파지지지직!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 그물 같은 번개가 휘몰아쳤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뇌술이라."
"……이놈."
"그래, 원하는 대로 해 봐."
"이놈!"
번쩍!
담사영의 두 눈이 피처럼 붉어졌다.
‘네 모든 것을 내가 가져가리라!’
천룡기를 전부 퍼부어도 상처를 입히긴 힘들 것이다. 아니, 일격에 죽이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승부였다.
그렇다. 담사영은 인정했다.
치솟는 분노와는 별개로, 어떤 파괴적인 술법을 난사해도 서량에게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들다는 걸.
그렇다면.
공격형 술법이나 환술도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이혼대법!’
이전의 시도는 진법 때문에 실패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애초에 이혼대법은 경지의 높낮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절대적 변화를 추구한다.
막을 수 없다. 설령 서량이라도.
이번만큼은 체내에 들끓고 있는 모든 진천룡기를 퍼부을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죽어라!"
번쩍!
하늘 높은 곳에서 시뻘건 벼락이 내리쳤다.
파지지지직!
붉은 벼락이 서량의 몸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그때, 담사영이 주(呪)를 외웠다.
‘네놈의 오만이 내게 기회가 되었구나!’
화아아아아아악!
무형의 진천룡기가 허공을 격하고 서량의 몸뚱이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퍽!
"어?"
담사영이 순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본래 대법 도중에는 상대와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뭐지?"
"기다리고 있었지."
후우우우웅.
허초인 뇌술의 뇌기를 몽땅 날려 버린 서량.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섬뜩한 마신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네놈의 몸에 틀어박힌 천룡기는 그 끈질김이 군림마황기 못지않더군."
"……?"
"죽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내 능력으로도 천룡기를 몽땅 뽑아내긴 힘들더구만. 네놈 몸에 자리한 천룡기가 잠시라도 사라져야, 고루의 군림마황기가 아닌 나의 군림마황기를 집어넣을 수 있지 않겠느냐?"
"……!"
"말했다시피 난 널 편히 죽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영원토록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려면 널 무장 해제시켜야 하는데, 천룡기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언제든 부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퍽!
담사영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무언가에 맞은 게 아니었다. 그의 체내로 파고든 군림마황기가 그의 하단전과 중단전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 것이다.
고루마존의 군림마황기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량의 군림마황기와 동조가 가능하고 술법을 무력화시킬 순 있으나, 담사영이 지닌 힘의 근본을 없애 버릴 순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
파괴, 그 자체가 본질인 궁극의 마기.
선천(先天)의 영역에 도달한 최고 농도의 군림마황기가 아니면 담사영의 삼단전을 붕괴시킬 수 없다.
퍼억!
담사영의 고개가 한 차례 뒤로 튕겨졌다.
"컥!"
허물어지듯 쓰러진 담사영의 코에서 시뻘건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상단전의 파괴였다.
놀랍게도 담사영은, 상단전이 파괴되었는데도 명백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량의 군림마황기가 천룡기를 담는 그릇, 딱 거기까지만 부쉈기 때문이었다.
극도로 섬세한 진기 운용. 실로 신(神)의 경지에 이른 진기 운용이었다.
"살아 있어야지."
치이이이이익!
담사영의 몸에서 붉은 연기가 치솟았다.
"끄아아아악!"
삼단전이 파괴되고, 술력의 원천인 천룡기의 흔적까지도 강제로 증발하고 있었다. 천하의 담사영조차도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넌 살아야 해. 절대 편하게는 못 죽는다. 미쳐 버리든 어쩌든, 내 허락 없이는 저승도 마음대로 갈 수 없을 것이다."
"크아아악! 아아아아악!"
담사영이 땅을 구르며 몸부림을 쳤다.
푸스스스스스.
천룡기의 흔적이 증발하자, 동시에 공기 중의 자연기(自然氣) 밀도가 무섭도록 높아졌다.
혈원기 자체가 대자연에 퍼져 있는 일월오행의 기운을 합쳐 둔 것이었다. 그 모든 힘이 증발하니, 일순간 자연기의 농도가 몇 배나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무감각했던 서량의 눈빛이 어느새 서늘해졌다.
"이것이 바로 내 복수다."
"크르르륵!"
"허무하지? 그러나 네놈이 한 짓을 생각하면 거창한 마무리는 용납할 수 없다. 아니 그런가?"
"쿨럭! 우웨에엑!"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이나 하늘을 보던 그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어느새 마신안은 사라지고, 본래 그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네놈과의 길고 긴 악연이 끝나는구나."
"……죽여라."
그새 힘이 다한 모양이었다.
땅에 너부러져 꿈틀거리는 담사영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백발로 변해 있었다. 극도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머리가 세어 버린 것이다.
"지금 날 죽이지 않으면…… 언제고 부활하여 네놈의 뒤통수를……."
"그러지 못하도록 천룡의 흔적을 지우고 삼단전을 불살라 버린 것이다. 이제 넌,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제외한 어떠한 힘도 얻을 수 없어. 몸이 내공과 술력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 이놈……."
훅.
서량이 담사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재미있군."
담사영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서늘하게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마신의 미소가 그를 전율케 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지. 네놈이 천하와 하나가 되기 전에 죽이라고. 네놈의 천룡기는 천하에 존재하는 자연기의 총합이니 능히 천하와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천하에 어떠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
"진짜로 천하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곧 천하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내 몸뚱이를 네놈이 가져간다는 것. 네가 내 몸을 차지하고 중원을 평정한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터억!
담사영의 목을 움켜쥔 채 그를 일으킨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나를 넘을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너는 끝까지 타인을 이용하려고만 했지, 네 스스로 무언가를 완성하려 하지 않았다."
"컥!"
"그 말인즉, 네놈이 네 삶에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놈이라는 뜻이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담사영의 얼굴에 선명한 공포가 일었다.
"그 누구의 죽음도 책임지지 않았던 반쪽짜리 삶, 내가 완성시켜 주마. 선행은 보답받아야 하고, 악행은 징벌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몸소 깨닫거라."
화아아아악!
세상이 어두워졌다.
그 어둠의 공간으로, 서량이 담사영을 던졌다.
담사영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빨려 들어간다.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공간으로.
현실과는 시공(時空)이 다르게 흐르는, 마를 판별하는 죽음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담사영은, 자존심을 버리고 그 누구보다 솔직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살려 줘!!"
훅!
어둠이 사라졌다.
동시에 십만대산 전체로 확장되었던 판마정의 영역이 다시 본래의 범위로 돌아갔다.
수천 년 무림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악당, 의천무제 담사영과 함께.
"안 죽인다니까."
서량이 유쾌하게 웃었다.
"절대 안 죽으니까, 걱정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