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화. 천하를 발아래 두다 (5)
"문주님!"
공야치의 얼굴에 다급함이 일었다.
"어떻게 되었다던가?"
초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겼습니다! 담사영은 교주님과의 전투에서 패배 후 수감, 교룡조는 철혈성과 황군의 공격에 전멸했고, 천룡 술사들은 물론 천룡궁주까지 모두 사망했다고 합니다!"
쾅!
공야치가 탁자를 내리쳤다.
"됐어!"
그가 탄성을 내질렀다.
"으하하하!"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는 공야치.
초해는 그간 공야치를 모시면서, 그가 이렇게까지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초해가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문주님. 그간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다고 그러시는가. 고생이야 내 뒤치다꺼리해 준 자네가 더 많이 했지."
"그걸 아신다면 나중에 지분 좀 떼어 주십시오."
"하하하하! 자네, 지분 욕심도 있었나?"
"세상에 돈만큼 좋은 게 없다잖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자네 몫은 진즉 챙겨 두고 있었으니."
"역시 문주님밖에 없습니다."
한참이나 웃던 공야치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언제나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그의 얼굴에 비로소 해방감이 깃들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교주님.’
* * *
"바뀌었군."
황좌(皇座)를 올려다보는 주청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정말, 많이 바뀌었어."
비록 그 영향력은 천하에 이르지 못했으나, 제국의 버팀목으로서 출중한 위엄을 자랑했던 황실.
황궁 전역에 드리워진 전화(戰禍)의 불길이 황좌에도 이르렀다. 그래서일까? 과거, 주청이 기억하던 그 위엄과 장엄함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음침하고 어두웠다. 벽 곳곳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고대의 언어들이 붉은색으로 빽빽이 적혔으며, 천장에 달아 놓은 황금색 비단 두 장에는 각기 천(天)과 용(龍)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주청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대장군."
"예, 폐하."
"저 빌어먹을 비단, 당장 뜯어내게."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소공휘의 양손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찌이이이이익!
거대한 비단 두 장이 너풀거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베일 듯 날카로운 눈으로 비단을 내려다보는 주청. 그의 옆모습을 본 소공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황궁이 이 꼴이 된 것은 천룡궁과 담사영 탓이었다. 그러나, 그와 손을 잡은 주천양의 잘못이기도 하며 주천양 휘하에서 움직인 자신 탓이기도 했다.
감히 황제 폐하의 존안을 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장군."
"……하문하시옵소서, 폐하."
"황궁이 다시는 이런 꼴을 당하지 않도록, 앞으로 힘써 주기를 바라네."
소공휘가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황궁의 대장군으로서 당연한 소임입니다. 추후 그 어떤 역도라도 황실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전을 기하겠나이다."
"그래."
주청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야지."
그때였다.
"먼 훗날이라면 몰라도, 향후 수백 년간은 황궁의 위엄이 역도들의 발에 짓밟힐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주청이 고개를 돌렸다.
송금백이 무릎을 꿇었다.
"철혈성주 송금백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오체투지까지는 아니지만, 강호 최고수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였다.
소공휘는 그의 인사가 탐탁지 않았지만, 주청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아닌 말로,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자신들을 쓸어 버릴 수 있는 강자가 송금백이었다. 그런 그가 무릎까지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은, 사파 무림 전체가 황실에 무릎을 꿇은 것과도 같았다.
주청은 흡족한 얼굴로 송금백의 인사를 받았다.
"일어나시게."
"예."
"그나저나, 방금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송금백이 웃으며 말했다.
"대승(大勝)을 경하드립니다."
"대승?"
"천룡궁주 무명 이하, 천룡 술사 모두를 잡았다고 합니다."
"……!"
"나아가 담사영이 천마신교의 교주 서량의 손에 패배하여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주청의 눈이 일렁였다.
"사실인가?"
"물론입니다. 혹, 믿기지 않으신다면 직접 물어보시지요."
"직접이라니?"
그때였다.
"호오, 이게 바로 황제만 앉을 수 있는 태사의란 말이지?"
주청과 소공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서량이 태사의를 보며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누가 황좌 아니랄까 봐 사치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군. 저 자리에 앉으면 기분이 아주 삼삼하겠어."
주청이 입을 떡 벌렸다.
"자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어때? 앞으로 황제로서 천하를 통치할 텐데, 내가 한 번만 앉아 봐도 되나?"
소공휘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 무슨 망발이오!"
그때, 주청이 손을 들어 소공휘를 막았다.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담사영은 어땠나?"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강하더군. 하지만 내가 더 강했지."
"수감을 시켰다고?"
"그래."
"왜 죽이지 않았지?"
"죽이는 건 너무 쉽잖아. 아마 지금쯤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보고 있을 거다."
주청이 흐릿하게 웃었다.
"뇌옥에 가둔 게 아니로군."
"뇌옥이라면 뇌옥이지. 중요한 건 그놈의 영혼이 수백, 수천 년 동안 고통을 받을 거란 사실이야. 단순히 미치게만 만들지는 않는 곳이거든."
"그렇구먼."
그제야 주청의 얼굴에도 후련함이 깃들었다.
"참으로 고생 많았네."
"그래, 고생이 많았지."
"한데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나? 그간 벌어졌던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자네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말이 안 되는 듯하네만."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도록 만들어야지. 그래야 세상을 다스릴 수 있지."
"설마하니, 지금 내가 천룡궁의 술법에 걸린 것은 아니겠지?"
"꼬집어 줄까?"
"됐네."
주청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우렁찬 그 웃음에 환희와 서글픔, 분노와 허무함이 담겼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인생이 아닌가. 내 자네를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이지 어떤 꼴이 되었을까 궁금하네."
"좋은 꼴은 못 봤을 거야. 알잖아?"
"그래, 알지."
주청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소공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폐, 폐하!"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비참한 생을 이어 가고 있었을 게야. 다 자네 덕분일세."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 덕분에 우리도 일이 꽤 수월해졌어. 결국 서로를 도운 셈이니, 그런 인사는 됐네. 일국의 황제는 고개를 숙이지 말아야 하는 법이야."
허리를 편 주청이 황좌를 보았다.
"저기에 앉아 보고 싶나?"
"갖고 싶진 않지만, 한번 앉아 보고는 싶구먼."
"앉아 보게."
소공휘가 외쳤다.
"폐하! 그것은 아니 되옵……!"
"시끄럽다."
단 한 마디로 소공휘의 입을 다물게 한 주청이 황좌로 손을 뻗었다.
"황궁의 은인이요, 천하의 은인이다. 나라를 달라는 것도 아니요, 내 목숨을 가져가겠다는 것도 아니거늘, 고작 황좌에 한번 앉아 보는 것이 무에 그리 큰일이겠는가."
서량이 피식 웃었다.
"허락을 받았으니, 어디 한번 앉아 봄세."
"그러게나."
그가 태사의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사라락.
저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발치에 맴돌았다.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중원 최고 통치자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라.’
황궁, 황실, 황제.
마도 무림의 신(神)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저 황제의 권좌는 대단해 보였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사박.
계단을 한 칸 더 오르니, 발치에 머물렀던 바람이 그의 장포를 흔들었다.
펄럭!
그가 평소 입던 마왕보의가 아니었다.
지금 그가 걸치고 있는 장포는 바로 저 이천상이 걸쳤던 흑색의 곤룡포였다. 곤룡포 사이사이 마감은 흑색과 잘 어울리는 진녹색으로 되어 있었으며, 등에는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생생한 용(龍)이 황금빛 수실로 새겨져 있었다.
이천상이 걸쳤던 장포를 마도 최고의 침선장들이 모여 수선한 서량의 옷이었다.
천하를 손에 넣기 전에는 손도 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옷.
그 옷을 걸치고 황궁에 들어오니, 정말이지 세상을 전부 가진 것만 같았다.
사박.
또 한 걸음, 계단을 올랐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기실, 천마신교의 병력과 장강 이남 주민들의 민심, 그리고 자금력과 정보력 등을 생각하면 이미 천마신교는 하나의 제국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장강 이남 땅에서는 무소불위의 황제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를 중원 땅 절반을 차지한 제왕이라고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담사영은 물론 천룡궁을 물리치고,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 황제의 인사를 받은 이 순간.
서량은 비로소 확신했다.
자신이 천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이르렀음을.
사박. 사박.
흔들리는 곤룡포 때문에 등에 새겨진 용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사부님.’
이천상이 떠올랐다.
칠 척에 가까운 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 완전(完全)의 영역에 접어들었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궁극의 육신에 대자연 그 자체의 기운이라도 해도 무방할 선천의 마기를 담고도 신(神)과 같은 위엄을 유지해 냈던 무적의 마신이.
‘보이십니까.’
저 황제도, 황궁의 대장군도.
중원 최고수 중 하나인 철혈성주 송금백도 자신의 뒷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드디어, 천하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 이르렀습니다.’
우우우우웅.
멀찍이 놔두었던 천마도가 강렬한 도명(刀鳴)을 터트렸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이천상의 목소리가, 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너무나도 그다운 자상한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고생했다."
화려한 미사여구가 섞인 칭찬은 필요치 않았다. 만인의 축하도, 마인들의 함성도 필요치 않았다.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이천상의 그 한마디가 서량의 심금을 울렸다.
주르륵.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간의 지옥 같았던 인생이, 재미있었던 과거가,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천하에서 가장 비참한 곳에서 가족의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나 땅바닥을 전전했던 그가, 담사영이라는 악인 휘하에서 온갖 학대를 당하고 결국엔 비참하게 죽었던 그가.
새로운 삶을 얻어 마도 무림 정점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천하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지금까지.
‘이제야, 내가 꿈꿨던 자유와 바라지 않았던 권력 모두를 손에 넣었다.’
펄럭!
곤룡포를 펄럭이며 황좌에 앉은 서량이 황궁의 대전을 내려다보았다.
우우우웅.
서량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흘러내린 눈물은 증발하고, 꿈을 달성한 한 인간의 해방감이 그 위엄 넘치는 두 눈에 담겼다.
후욱.
천공으로 솟을 듯 뿜어져 나오던 존재감이 서서히 낮게 깔리며 황궁 전체로 퍼져 나갔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니, 몸부림치던 일생의 치열함도 결국 헛것이었구나. 그러나 그 하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몸부림도, 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 아홉 명의 천마(天魔)와 스물여섯 명의 교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비로소 하늘에 이르렀도다."
후우우웅.
일순 거센 광풍이 불어닥쳤다.
그도 잠시.
태사의에 앉아 있던 서량이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