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1)
석 달 후.
"날씨가 정말 좋군요."
남궁룡이 감탄 어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원 북부는 아직도 쌀쌀한데, 광동성은 놀랍도록 따뜻해요. 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은 덥다고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입니다."
"그러네."
남궁화의 얼굴에도 은근한 흥분이 어렸다.
"광동성은 처음 와 봐. 너도 처음이지?"
"아시잖아요. 만날 폐관 수련만 한 거. 광동성만이 아니라, 아직도 안 둘러본 지역이 많아요."
"그렇긴 하다만."
남궁화의 흥분은 일종의 설렘이었다.
장강 이남은 대대로 마도 무림이 장악한 지역이 많았다. 특히나 호남성과 광동성은 마도 문파들의 힘이 무척 강한 지역으로, 어지간히 배포가 큰 정파 무림인들도 들어가길 꺼리는 지역이었다.
그중에서도 마도의 영향력이 가장 큰 지역이라 하면, 단연 광동성을 들 수 있었다.
광동성에는 십만대산이 있다. 그리고 십만대산에는 천마신교가 있다.
말하자면 광동성, 나아가 광서성 지역까지 전부 천마신교의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파 무림인들이 중원 최남단인 광동에 내려오려면 변장까지 해야 할 정도로 신교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한데 변장은커녕 의복에 의천검세(義天劍歲)라는 네 글자를 새긴 채로 당당히 활보할 수 있을 줄이야 뉘라서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 그나저나 누님."
"왜?"
"아버지께서 누님께 검령(劍令)을 가져오라 말씀하셨다면서요? 챙기셨어요?"
남궁화가 품에서 작은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기 있지."
의천검령(義天劍令).
남궁세가가 새로이 제작하려는 신표이자 절대적 명령의 상징이다. 가주만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신물이며, 가내 모든 무사를 쥐고 흔들 수 있는 병권(兵權)의 상징이기도 했다.
남궁룡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단검을 보았다.
"이게 새로운 신물, 의천검령이 될 단검이라고요?"
"맞아."
"어째 좀 조악해 보이는데요? 날도 안 서 있고. 그냥 통짜 철이잖아요, 지금은?"
남궁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신교에 중원제일의 대장장이가 있다고 하시더라고. 그분께 부탁한다고 하셨어."
"아? 지금 이게 완성품이 아닌 거예요?"
"엉. 야,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걸 신물로 삼기에는 좀 그렇잖아."
"저도 그래서 여쭈어본 겁니다. 그나저나……."
단검을 잘 살펴보던 남궁룡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보통 철이 아니군요?"
"들어 볼래?"
"예?"
남궁화가 남궁룡에게 단검을 던졌다.
얼떨결에 단검을 받아 든 남궁룡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어, 엄청나게 무겁네요?"
"그렇지?"
"용케 품에 넣고 다니셨습니다?"
"이제 익숙해서."
"대체 무슨 철이랍니까?"
"듣기로 현철(玄鐵) 칠 할, 오철(烏鐵) 이 할, 그리고 백색한철(白色寒鐵)을 조합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어정쩡한 색이 나왔나 봐."
남궁룡의 눈이 흔들렸다.
"현철을 칠 할이나요?"
"응. 서 교주님께서 구해다 주셨다던데?"
현철은 무림에서 귀하기로 유명한 만년한철(萬年寒鐵)보다도 구하기 어려운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희소성에서 만년한철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며, 특히나 그 강도와 무게가 전무후무하다는 평가를 받는 금속이기도 했다. 현철 한 관 무게를 구하기 위해서는 금(金) 수십만 냥, 심지어 백만 냥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세상에…… 저는 현철로 만들어진 검 자체를 처음 봅니다."
"나도 처음 봐. 이렇게까지 무거운 줄도 몰랐어."
"현철을 녹이는 것 자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저 사천의 등(登) 노사(老師)께서 가진 화로가 아니면 며칠을 달궈도 녹지 않는다던데요?"
"그건 좀 과장이고. 어쨌든, 중원에서 현철을 다룰 만한 작업장을 가진 사람이 다섯을 넘지 않는 건 맞아."
"그리고 그중 하나가 신교에 있고요?"
"그렇다나 봐."
남궁룡이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십만대산이 보였다.
가만히 십만대산을 보던 남궁룡이 툭 던지듯 말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뭐가 또?"
"전에 후기지수 모임 때 말입니다. 천중지회에서요."
"응."
"그때, 서 교주님은 내년에도 다 같이 모이자고 했었죠."
"그러셨지."
"하지만 정작 모이지 못했어요. 솔직히 저,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남궁화가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어쩔 수 없지. 그 뒤로도 중원 전체에 온갖 일이 다 터졌잖아."
"그렇지요."
"다시 뵙지는 못했지만, 아직도 서 교주님의 그 자신감 가득한 눈빛과 목소리가 생생해. 내 생에 그런 독특한 사람을 볼 줄은 몰랐지 뭐야."
"그건 저도 그렇…… 음."
"왜?"
남궁룡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님 설마, 서 교주님께 관심 있으십니까?"
남궁화가 눈을 끔뻑였다.
"아니? 왜?"
"……."
"뭘 바라는지 모르겠다만, 나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다."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쉽고 어렵고가 어디 있어요?"
"어? 한 방 먹었네?"
"히히."
"뭐…… 사실 서 교주님도 나쁘지 않지.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디 가서 그런 신랑감 구하려면 쉽지 않겠지."
"역시 그렇죠?"
"응. 그래도 난 서 교주님과는 혼인 안 해. 뭐, 그분도 나랑 혼인할 생각은 없을 테지만."
"왜요?"
남궁화가 눈을 찡긋거렸다.
"너무 바쁜 남자는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으니까."
남궁룡이 피식 웃었다.
"권력자라면 그렇겠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서 교주님이 권력자가 아니란 거야?"
"정정하죠. ‘평범한’ 권력자라면 그렇겠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남궁룡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천하 최고의 권력자, 황제보다도 위에 있는 분이잖아요?"
"……?!"
"서 교주님은 그저 군림할 뿐, 다스리지 않아요. 그게 신(神)이 할 일이라나 뭐라나."
"허어."
"아직 천하인 대다수가 그분의 진짜 모습을 모르겠지만, 뭐…… 조만간 다들 알게 되겠지요.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 뒤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괴수가 있다는 사실을요."
남궁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너."
"예, 누님."
"어째 너야말로 서 교주님한테 반한 것 같다."
"그럼요. 혹시 압니까? 서 교주님께 잘 보이면 멋진 자리라도 하나 내어주실지."
정말이지 동생도 많이 바뀌었다. 농담이라도 저런 말을 쉽게 꺼내지 않던 녀석이, 이제는 제법 능글맞게 얘기할 줄도 안다.
남궁화는 그런 동생의 변화가 기꺼웠다. 사람이 너무 강해지면 언젠가 부러지기 마련,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겸비하는 것이 좋다.
"쓸데없이 말이 많았구나. 조금만 더 가면 신교야. 후딱 달려 보자."
파아아앙!
남궁화가 신법을 펼쳤다.
남궁룡이 깜짝 놀라 황급히 따라붙었다.
"같이 가요, 누님!"
순식간에 십만대산 근교로 접어든 남매는 이내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허?!"
수많은 인부가 여기저기서 망치를 두들기고 있었다.
수십 리에 걸친 대공사였다. 저 멀리 우뚝 솟은 천마신교의 고성 앞, 또다시 거대한 성벽을 쌓는 모양이었다.
남궁룡이 혀를 내둘렀다.
"영역을 넓히려는 걸까요?"
"넓힌다기보다는, 서 교주님의 꿈을 실현하는 거지."
"꿈이요?"
"아버지한테 들었어. 서 교주님이 철혈성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철혈성의 외성에는 양민들이 살고 있잖아? 철혈성의 보호를 받으면서 말이야."
"아, 그렇죠."
"교주님도 그게 좋아 보이셨던 모양이야. 사람이 살기 좋은 영역을 따로 만들고 싶으시다나. 물론 신교의 테두리 안에서 말이지."
"대단하네요."
"공사가 끝나려면 족히 십 년은 걸릴 거래. 하긴, 성벽 둘레만 해도 어마어마할 테니까. 그 안에 터전을 만들고 건물까지 지으려면 십 년도 모자랄 것 같긴 하다만."
"근데 이곳에 거주하게 될 양민들은 무작위로 선별하는 겁니까?"
"그건 모르겠어. 그리고 양민들 이전에, 마인의 가족들부터 이곳에 살게 한다던데?"
"억?!"
"신교 소속 마인들 대부분이 광동성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잖아. 그 사람들부터 안으로 들이겠다고 하셨대. 집이나 생활비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고 하니, 그 사람들로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겠지."
남궁룡이 부러운 눈으로 공사 현장을 둘러보았다.
"다르네요."
"뭐가?"
"서 교주님이요.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가 버리셨어요. 좀 상스럽게 표현하자면, 아예 노는 물이 달라요."
남궁화가 피식 웃었다.
"천하제일을 넘어, 전대 교주를 제외하곤 고금제일을 다투는 절대자가 되셨으니까. 심지어 전대 교주조차도 서 교주님처럼 천하를 발아래 두진 못했어."
"그건 그렇죠."
남궁룡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과 감탄, 기쁨과 열정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그런 사람과 같은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축복이라면 축복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넌 정말 대단한 거야. 아마 많은 사람이 서 교주님을 질투할걸."
딱 한 번이라도 서 교주님을 뵙고 나면, 감히 질투할 엄두도 못 낼 텐데."
"그건 그래."
"자, 가시죠."
파아아악!
두 사람이 순식간에 십만대산을 올랐다.
그간 뛰어난 성취를 얻었는지, 남궁 남매의 신법은 예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심지어 그런 속도를 내면서도 호흡이 지극히 안정적이었다.
가문이 적도들에게 유린당한 경험.
그 치욕스러운 경험은 오히려 두 사람이 더 높은 경지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당대 정파 후기지수 중 두 사람과 견줄 만한 후기지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철없는 어린아이의 코 밑에 시커먼 수염이 자라기 시작하고, 갓 혼인한 부부 밑으로는 어느새 마당을 뛰어다니는 아이가 생겼다.
만인의 찬사를 받았던 세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작게 시작했던 삼류 무관이 어느새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무림 문파로 성장하기도 했다.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세상. 변화의 바람은 느릿하면서도 확실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저깁니다, 누님."
"나도 알아."
파악!
힘차게 도약한 두 사람이 천마신교의 외성 정문에 섰다.
"와아……."
남궁룡이 입을 떡 벌린 채 성을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압도적인 외관이었다. 그 웅장함이 다른 단체와는 차원이 달랐다.
남궁화의 얼굴에도 감탄이 일었다.
"무시무시하다. 그치?"
"예. 마치 하나의 작은 나라를 보는 것 같아요."
"철혈성보다 더한 것 같아."
"그러게요."
멍하니 외성을 둘러보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수문위에게 다가갔다.
번쩍!
수문위사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남궁룡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수문위사의 눈에서 뿜어지는 마기가 실로 날카로웠던 것이다.
그는 새삼 실감했다. 세상이 점차 하나가 되어 가고 있음을.
남궁화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남궁세가의 자제분들이십니까?"
"네? 아,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수문위사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성문을 열어라."
쿠구구구궁!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성문이 열렸다.
수문위사가 고개를 숙였다.
"남궁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당황하여 눈만 끔뻑이던 남궁룡이 이내 남궁화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대답해요.’
남궁화가 입맛을 다셨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렇게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모를 것이다. 천마신교가 이렇게 쉽게 진입을 허가하는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최상부에서 명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외성을 통과하는 데에만 족히 반나절은 걸렸을 거란 사실을, 그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쿠구구궁!
또 한 번의 묵직한 굉음과 함께 성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