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2)
"왔느냐?"
남매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남궁단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대단들 하구나."
"네?"
"고작 두어 달 안 본 새에 실력들이 놀랍도록 늘었어.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다."
남궁단은 본디 자식에게 칭찬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자식들이 자만할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문이 무너진 후, 그의 성격도 조금은 달라졌다.
세상은 험하다. 언제 가족과 헤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던 그의 아버지조차 그리 허망하게 가시지 않았는가.
서로 볼 수 있을 때, 있을 때 잘해야 한다. 그러고도 먼저 떠나보내면 더 잘해 주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이 혈육지간이다.
남궁룡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멀었지요. 제왕검은 익혀 볼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그건 당연하다. 제왕검은 본가 최고의 절학이야. 오히려 창궁검도 대성하지 못한 지금의 네가 제왕검의 구결 일부라도 이해하고 있는 것이 더 대단한 일이다."
"하하하."
남궁화가 투덜거렸다.
"얘도 이제 끝났나 봐요, 아버지."
"음? 무엇이?"
"그렇게 진중했던 애가 푼수가 다 됐잖아요. 아무래도 가주 자리, 얘한테 물려주지 마시고 그냥 저한테 주세요. 가문 한번 제대로 살려 보겠습니다."
남궁룡이 당황해서 말했다.
"푼수라니요? 그냥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을 뿐입니다."
"어허이, 이놈 이거 가주가 되고 싶긴 한 모양이네?"
"그게 아니라니까요!"
남궁단이 피식 웃었다.
"농담은 그쯤 해 둬라. 둘 다 예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네. 근데 저희도 저희지만……."
남궁화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아버지, 그 차림은 뭐예요?"
남궁단은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을 고수했다.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일꾼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오다가 봤을 것이다. 한창 공사 중이었지?"
"네."
"공사는 거기만 하는 게 아니다. 신교 외성도 한창 공사 중이지.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고 있는데, 이것도 얼추 이삼 년은 걸리겠더라."
"컥! 설마 아버지도 같이 일하시는 거예요?"
남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릴없이 밥이나 축내면 뭐 하겠느냐? 낮에는 인부들과 함께 일하고, 저녁에는 이곳 수뇌부들과 술 한잔 적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헤에."
남궁룡이 미소를 지었다.
"어째, 무척 편안해 보이십니다."
"허허, 그래 뵈더냐?"
"예. 그간 뵈었던 아버지의 표정 중 가장 밝아요."
남궁단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보내는 게 이리도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 남궁가의 가주로서 이리 시간을 보내선 안 되겠지만, 당분간은 이곳에서 인부들과 일 좀 하다가 갈 생각이다."
남궁화가 콧방귀를 뀌었다.
"신교 수뇌부들이 기고만장하겠어요. 천하의 남궁가주가 인부들과 함께 공사를 도와주고 있다니."
"이 녀석아, 그리 말하지 마라. 다들 교주님 뵐 면목이 없다고 한사코 말리더라."
"뭐어…… 그러기야 했겠지만요."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너희가 왔으니 내성으로 들어가야겠어. 따라들 오거라."
남궁단이 남매를 데리고 내성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호법원의 호위들이 고개를 숙였다.
"남궁가주를 뵙습니다."
남궁단이 손을 흔들었다.
"매번 그리 인사하지 않아도 되오."
"아닙니다."
"일전에 말했던 내 자식들이오.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물론입니다."
쿠구구궁!
성문이 열렸다.
신분 확인 절차가 지극히 간단했다. 아니, 거의 절차랄 게 없는 수준이었다.
외성도 외성이지만, 내성에는 수뇌부와 교주가 거하고 있는 만큼 절차가 훨씬 더 까다로워야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남궁단을 믿고 그냥 보내 준다는 것은, 그의 위상이 신교의 최고 수뇌부에 비견될 정도라는 뜻과 같았다.
"와……."
신교 내성을 둘러보는 남궁화의 얼굴에 황홀함이 어렸다.
"이게 천마신교구나."
확실히 내성은 외성과 달랐다.
딱히 더 화려하지는 않지만, 분위기부터가 다르다고나 할까. 건물들은 조금 더 고풍스러우면서도 실용적으로 보였고, 길가 곳곳에 세워진 석상들은 놀라우리만치 정교했다.
"괜히 두근거리는데요."
남궁룡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떠올랐다.
남궁단이 피식 웃었다.
"네가 그리 긴장하면 이곳 마인들이 오히려 섭섭해할 것이다."
"예?"
"진심 어린 호의를 보여 주는 주인에게 신뢰는 못 줄망정 잔뜩 긴장하고 노려보는 손님이라니? 섭섭하지 않겠냔 말이다."
"아……."
남궁룡이 헛기침을 했다.
남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 마음 역시 충분히 이해는 간다. 사람의 마음이란 각자의 위치에 서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 불편하면 불편한 티를 내도 괜찮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마치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남궁화는 아버지의 말에서 은근한 현기(玄機)를 느꼈다.
‘달라지셨어. 확실히.’
무공이야 원체 뛰어나신 분이니, 이전보다 더 성장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격차가 너무 커서 읽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성격은 확실히 예전보다 유연해지신 것 같았다.
‘천마신교가 무림 최강, 최악의 집단이라 불리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남궁화가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직접 보지 않고선 확신을 내리는 게 아니야.’
그때, 대로를 바삐 가로지르는 한 마인이 남궁화의 눈에 띄었다.
남궁화가 피식 웃었다.
"신교도 사람 사는 데가 맞긴 맞나 봐요."
"음?"
"보아하니 내공이 대단치 않은 것 같아서요. 어딘지 모르게 학자 같은 분위기인데, 엄청 허술해 뵈네요?"
"아, 저 사람 말이냐?"
남궁단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이가 바로 호요성이다."
"……네?"
"호요성, 천마신교의 총군사란 말이다."
"허억!"
남궁화가 깜짝 놀라서 호요성을 보았다.
헐레벌떡 뛰어가던 호요성도 이쪽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가주님!"
이건 뭐 이웃 주민이 따로 없었다.
남궁단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많이 바쁘시오?"
"괜찮습니다! 이따 밤에 또 한잔하실까요?"
"나야 좋소."
"하하! 그럼 밤에 뵙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호요성이 웃으며 남궁 남매를 보았다.
"보고는 받았습니다. 과연 대단한 인재들이로군요. 가주님께서 자랑하실 만합니다."
남궁단이 얼굴을 붉혔다.
"난 자랑한 적 없소."
"부끄러워하시긴. 그럼 전 이만 갑니다요!"
"그러시오."
호요성이 재차 대로를 달렸다.
남궁룡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저 사람이 천마신교의 총군사, 만뇌서생(萬腦書生) 호요성이라고요?!"
"그렇다."
"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말이 좋아 그렇게 안 보이는 거지, 대놓고 말하면 세상에 둘도 없는 얼치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런 사람이 당대 마도 무림의 체계를 세운 위대한 군사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남궁단이 혀를 찼다.
"외양만으로 그 사람의 능력과 인품을 단정치 말라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아니…… 그게요……."
"저래 보여도, 신교 최고 권력자 중 하나다. 교주에게 농담이라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저이가 유일하지."
"허억!"
"허허실실. 반드시 기억하거라. 무림에서 활동하는 악인 중, 오히려 겉으로는 선해 보이는 자들이 훨씬 더 많은 법이다. 외양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우를 범하다간 목숨이 성치 못해."
남궁 남매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 지식을 완전히 체득하진 못했다. 새삼 세상에는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자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화아는 의천검령을 가져왔느냐?"
"네! 여기요."
남궁화에게서 검령을 받아 든 남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남궁룡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한데 아버지, 신교에도 그렇게 뛰어난 장인이 있습니까?"
"음?"
"이 단검에 현철이 들어갔다면서요? 현철은 당대 최고 명공(名工)들도 쉽게 다루지 못하는 극상의 철이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신교에도 실력 좋은 장인이 많다. 하지만 이 검을 주조할 사람은 장인이 아니야."
"예? 그럼 누가 의천검령을 만듭니까?"
남궁단이 미소를 지었다.
"서 교주다."
"예에?!"
남궁 남매는 깜짝 놀랐다.
"서 교주님이 망치질도 할 줄 아세요?"
"물론 서 교주는 대장장이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나름의 방법이 있는 모양이지."
남궁단이 턱으로 대로 너머를 가리켰다.
"서 교주가 있는 곳으로 가자꾸나."
"예? 아, 예!"
두 사람이 남궁단의 뒤를 따랐다.
외성만큼은 아니지만, 내성 역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었다. 범부보다 걸음이 훨씬 빠른 그들이 한참을 걸어도 교주의 거처인 마신궁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 남매는 그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변 건물과 그 사이를 오가는 마인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신기하네."
남궁화가 혀를 내둘렀다.
"아무도 우릴 보고 긴장하지 않잖아?"
"그러게요. 이러니까 오히려 긴장한 우리가 더 바보 같아요."
"내 말이."
"이들 모두가 정파 측 인물과 친분을 나눈 게 아닐 텐데, 어떻게 저리들 무덤덤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남궁단이 말했다.
"천마신교는 천하의 핵심이다."
"예?"
"담사영이 사라진 지 고작 석 달이 지났을 뿐이지만, 천하는 무서운 속도로 안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천마신교가 있다. 또한, 황궁이 천마신교를 지지한다고 당당하게 공표했지."
"아!"
"마인들로선, 신교 내부로 들어오는 정파 무림인에게 더는 신경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남궁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분위기는 지나치게 평화로운 감이 있어요. 싸움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믿으니까."
"네?"
"그들이 신으로 모시는 교주의 힘과 능력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성 곳곳에 은신한 초고수들의 실력을 믿으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남궁화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수들이 은신해 있다고요?"
"물론이다. 심지어 그중 절반 이상은, 이 애비의 실력으로도 은신 장소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다."
"……!!"
"알겠느냐? 천마신교는 복마전이다. 강호의 그 어떤 고수도 천마신교를 상대로 난장을 칠 수 없어. 설령 은신한 고수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마신궁에는 고금제일을 논하는 또 하나의 마신(魔神)이 버티고 있다."
남궁단이 미소를 지었다.
"신교(神敎)라는 명칭 앞에 왜 천마(天魔)라는 이름이 붙었겠느냐. 서 교주 자체가 이미 천마신교다. 즉, 지금의 천마신교가 곧 고금제일인 것이다."
남궁 남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깨달았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서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음을.
놀라움과 부러움, 그리고 일말의 씁쓸함.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무적의 철옹성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나아가 그 단체가 천마신교라는 사실에 어쩔 수 없는 씁쓸함도 느껴졌다.
"자, 다 왔다."
남궁단의 눈이 빛났다.
"저곳이 바로 마신궁, 신교의 교주가 거하는 궁전이자 신전이다."
마침내 세 사람이 마신궁 앞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