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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628화 (627/774)

628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3)

"어디 보자."

펄럭!

거대한 솜이불을 펼치니, 그 크기가 종횡으로 일 장이 넘었다.

비단 이불 겉면에는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중원 최고의 침선장이 작업한 비단 이불은 그 자체로 천금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불 우측 끝단.

그곳에는 천마신교(天魔神敎) 삼십오대(三十五代) 교주(敎主) 유일마신(唯一魔神) 이천상(李天像)이라는 글자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음,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기실, 다 뜯어진 거적때기라도 그분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마음이니까.

하지만 이왕지사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십대천마씩이나 되는 놈이 아무 이불이나 가져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 황량하군."

초토화가 된 대지는 그야말로 죽은 자들의 도시를 보는 듯 묘한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무너지다 만 성벽이 세월의 흐름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고 멀쩡한 건물도 꽤 남아 있었지만, 건물 대다수가 부서져 나뒹구는 이곳의 광경은 거대한 묘지와도 같았다.

담담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서량이 땅을 내려다보았다.

"유독 기름지구먼."

묘지로 써도 되려나?

"묘지도 만들고, 동상도 세우는 게 낫겠지."

아마 사부님께서는 쓸데없이 수선 떨지 말고 네 할 일이나 잘하라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마도천하를 이룬 위대한 천마가 자신이다. 사부님을 위해 동상 하나 세우겠다는데, 감히 누가 있어 뭐라 할 것인가. 하물며 인부를 쓰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직접 만들 생각이니, 사부님도 혀를 차진 않을 것이다.

서량이 땅에 손을 대었다.

푸스스스스스.

반경 삼 장에 이르는 땅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갈라지거나 부서진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증발에 가까웠다.

땅이 쑥 꺼졌으니 서량 역시 땅 밑으로 곤두박질쳐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중 부양의 술수로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이불과 함께.

"이 정도 너비와 깊이면 충분하겠군."

마음 같아서는 수십 리에 이르는 신묘(神墓)라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천상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서량 역시 그 정도 유난은 떨고 싶지 않았다.

위대한 업적을 쌓은 영웅을 위해 동상을 세울 순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넓은 땅을 잡아먹으면, 양민들이 딱 그만한 크기의 땅을 잃는다.

지나치게 넓지도, 좁지도 않은 범위.

딱 이 정도 너비로 묘지를 만들고 옆에 커다란 동상을 세우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서량이 한옆에 가득 쌓인 거대한 돌들을 바라보았다.

운남 대리(大理)에서 직접 공수해 온 대리석(大理石)이었다. 하나같이 최상급의 대리석 판이 수백 개가 쌓여 있었다.

그가 손을 뻗었다.

우우우우우웅.

무거운 대리석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한 판의 무게만 족히 천 근에 달할 정도로 크고 널찍한 돌이었다. 그러한 대리석 판을 무려 열 개나 들어 올리는 데도, 서량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신(神)에 이른 무력, 전대 교주 이천상과 함께 고금제일을 다툰다는 염라마신의 능력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지만.

스르르륵.

서량이 대리석을 정교하게 움직여 구멍에 대 보았다.

"음, 좋아."

서량의 손가락이 원형을 그리며 움직였다.

쿵! 쿵!

동그랗게 잘려 나간 대리석 조각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원형이 된 대리석이 그대로 묘지 바닥에 놓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됐다."

서량이 묘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펼쳤다.

"여기가 맞지요?"

그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잔존하는 선천마기의 흔적을 읽었습니다. 필시 여기가 맞을 겁니다. 혹 아니더라도, 또 작업하긴 귀찮으니까 그냥 여기인 셈 치세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서량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곳, 딱 이 자리에서 이천상이 빛으로 화했음을.

인간 이천상이 죽은 그 자리가 이곳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펄럭!

이불을 깔고 다시 밖으로 나온 서량이 대리석 판 하나를 똑같이 잘라 내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서량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사사사사삭!

잠시라도 흙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내벽에도 대리석을 세웠다. 각이 져서 완벽히 맞물리진 않았지만, 구유마공의 화염으로 흙과 돌을 녹여 단단하게 고정시켜 두었다.

"음, 얼추 마무리는 되었고."

화르르륵.

일순 서량의 눈이 마신안으로 뒤바뀌었다.

쿠구구구궁!

주변 땅의 흙더미가 떠올랐다.

떠오른 흙에 구유마화의 불꽃이 일었다. 흙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더니, 이내 진득하게 늘어 붙었다.

서량은 거의 액체가 되다시피 한 흙으로 묘지를 채웠다.

치이이이이익!

대리석 표면과 맞닿는 부분은 최대한 온도를 낮췄다. 대리석이 워낙 두꺼워서 부서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량의 작업은 계속되었다.

카아앙! 치이이이이익!

몇 번의 작업을 거치자, 어느새 동그랗게 가공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묘가 모습을 드러냈다.

치이이익!

말이 대리석이지, 남은 걸 몽땅 깎고 녹여 냈다 식힌 탓에 특유의 광택은 나지 않았다.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는 봐주십시오. 꽤 고생해서 만든 거니까."

그래도 노력한 티는 났다. 빛깔은 다소 어두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표면의 광택이 살아나고 있었다.

가만히 묘지를 보던 서량이 술병 두 개를 허공섭물로 끌어왔다.

"육천심주입니다."

그중 하나를 딴 그가 묘지 곳곳에 술을 뿌렸다.

"사부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던 술이에요. 세상에, 생각해 보니 진짜 중요한 건 전수 안 해 주고 가셨네요? 이거 만드는 비법서도 안 남기셨잖아요?"

육천심주 한 병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묵직하고도 산뜻한 주향이 일대에 진동했다.

"읏차."

묘 앞에 털썩 주저앉은 서량이 남은 한 병의 마개를 따고는 그대로 들이켰다.

"크허! 좋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혹시 이건 아셨습니까? 육천심주, 얼 듯 말 듯한 온도로 마시면 그냥 마실 때보다 훨씬 부드럽습니다. 뭐, 워낙 독주를 좋아하셨으니 사부 입에는 안 맞을 수도 있겠네요."

웃으며 묘를 바라보던 서량의 눈이 서서히 일렁였다.

"꽤 오래 걸렸습니다."

대리석으로 만든 묘지의 광택이 이전보다 더 살아났다.

"훗날 이 자리에 이불을 깔아 드리기로 했었지요? 그 훗날이라는 게 저한테는 천하를 손에 넣는 때였지요. 아! 전에도 이 주제로 얘기한 적이 있긴 하군요."

서량이 턱을 괴었다.

"사실…… 이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사부님한테만 하는 말인데요, 담사영과 다시 만날 때, 아주 잠시지만 그 자리에서 놈의 목을 뽑고 중원 전체를 불태워 버릴까도 고민했지 뭡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담사영을 죽이지 않았다.

"애먼 사람이 다치게 될 테니까요."

사람의 목숨은 숫자로 비교해선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서량은 알 수 있었다. 무당산에서 담사영을 죽였다면 진짜로 중원 전체가 피로 얼룩졌으리란 걸.

그리고 그 싸움에서 헤아릴 수 없는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리란 걸.

서량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좀 돌고 돌아서 오긴 했지만, 어쨌든 목적지에 도착은 했습니다. 기분이 어째 싱숭생숭하네요."

가만히 묘지를 보던 서량이 이내 히죽 웃었다.

"앞으로는 다시 찾아뵙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애초에 다시 뵈려고 들지도 않을 거예요. 바쁘기도 바쁠 테고,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기깔나게 놀아 볼 생각인지라."

우우우우웅.

서량의 눈앞에 유진도형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

후우우웅!

판마정의 진력(陣力) 일부를 끌어오자, 묘지를 제외한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폐허가 되었던 땅에는 새싹이 돋아났다. 반쯤 무너진 성벽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활기찬 마을이 생겼다.

하늘은 푸르렀고, 온도도 좋았다.

그리고 묘지 옆에는 높이만 칠 장이 넘는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동상의 정체는 이천상이었다. 태사의에 앉아 나른한 표정으로 세상을 굽어보는 절대자의 모습이 마치 실제처럼 생생했다.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판마정의 진력으로 만들어 낸 이천상의 동상을 보니,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실제로 만들고 싶었다.

"이게 나냐?"

그리고 그 동상 옆.

왼손은 뒷짐을 지고, 오른손으로 동상을 쓰다듬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나타났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오셨습니까?"

"오냐."

"……오호? 신기하네요."

"무엇이 말이냐?"

"판마정의 진력으로, 제 기억 속에 있는 사부님을 불러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 계신 사부님은 ‘진짜’인 것 같은데요?"

"진짜이기도 하고 가짜이기도 하지. 일전, 네가 신화경에 오르다 곤두박질쳤을 때의 나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압니다. 그래서 좀 놀라고 있어요."

"그러하냐?"

"예."

이천상이 서량에게 다가왔다.

무뚝뚝한 표정은 과거의 그와 똑같았다. 하지만 왜인지, 그 안에 적송대사와 현천진인에게서나 느꼈던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털썩!

이천상이 서량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게 앉으니, 마치 묘지에서 이천상의 혼이 되살아난 것 같았다.

"아깝게 한 병은 왜 버렸느냐?"

서량이 피식 웃었다.

"드시라고 뿌렸습니다. 한데 지금 생각해 보니 별 의미 없는 짓이었군요."

"네 녀석이 마시던 거나 내놔 보아라."

"여기요."

술병을 받아 든 이천상이 그대로 내용물을 입에 쏟아 넣었다.

서량이 헛기침을 했다.

"많이 드시네."

"……음."

이천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차갑군."

"부드럽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순한 술이다. 차갑게 만들지 말고 미지근한 온도로 마셔라."

"이게 순하다고요?"

"이보다 약한 것은 술이 아니라 그냥 음료다."

"됐습니다. 저는 부드러운 게 좋습니다."

"산더미처럼 만들어 놨더니, 마실 줄도 모르는 놈 위장으로 들어가게 생겼구나."

"그렇습니까?"

가만히 서량을 보던 이천상이 유독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잘 들어라."

"예?"

"재료는 사천에서 나는 쌀이다. 다른 곳의 곡물을 다 써 봤지만, 사천에서 나는 쌀만큼의 맛을 내진 못하더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실, 진짜 중요한 것은 발효 과정이다. 쌀과 약재를 섞어 적당한 온도에서 제대로 발효시킨 후, 삼백 일 뒤에 사흘 동안 공기와 접촉시킨다. 일단 온도에 관해서 얘기하자면……."

서량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이천상은 지금 육천심주의 제조법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오직 이천상 자신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 낸 명주의 제조법이었다.

‘…….’

기분이 묘했다.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라더니, 이런 걸 보면 진짜 이천상이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새삼스레 마음이 흔들렸다.

"뭐 하고 있는 거냐?"

"예?"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명주의 제조법이다. 넋 놓고 있지 말고 제대로 듣도록 해라. 외우기 힘들 것이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집중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

"……."

"쌀은, 사천에서 나는 놈을 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천상의 강의는 반 시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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