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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629화 (628/774)

629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4)

"안녕하시오."

흑백쌍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남궁단이 웃으며 말했다.

"서 교주를 뵈러 왔소이다. 약조는 했는데, 안에 계시오?"

"아마 지금은 안 계실 겁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소?"

"금방 돌아오실 테니,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남궁단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되겠소?"

마신궁은 천마신교 최대의 비지이자 가장 신성한 장소다.

신교 최고위 수뇌부들도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이상 거할 수 없는 장소가 마신궁이었다. 한데 그런 마신궁에 정파 최고의 가문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수장더러 들어와 기다리란다.

흑백쌍위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그대들은 교주님의 귀빈이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무담이 걸어오고 있었다.

무담이 웃으며 말했다.

"본교의 마인들에게 있어 마신궁은 신성불가침의 영역, 그러나 교주님의 손님들께도 우리 마인과 같이 고개를 조아리라 말할 순 없는 노릇 아니오?"

남궁단이 고개를 숙였다.

"대호법."

무담 역시 마주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언질을 주셨소. 제시간에 맞춰 못 올 경우 함께 차 한잔해 달라고."

"아, 그랬습니까?"

"들어가십시다."

"그럼, 염치 불고하겠습니다."

그렇게 네 사람이 마신궁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화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무담을 바라보았다.

무담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이 늙은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가?"

남궁화는 깜짝 놀랐다.

"헉! 아, 그게 아니고요."

"한데 어찌 이 늙은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고?"

"신기해서요."

당돌한 대답이었다. 무담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그리도 신기한가?"

남궁화는 본심을 보여야 할 때와 예의를 갖춰야 할 때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천마신교의 대호법은 마도 무림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엄격한 분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런가?"

"네. 그 무공은 능히 구대마존에 필적하여 태산이라도 무너트릴 만하고, 엄정함은 신교에서도 최고인지라 누구도 쉬이 눈을 마주할 수 없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닐세. 한때는 그랬지."

"지금은 아니란 말씀인가요?"

"믿음직한 후계가 있으니, 나도 슬슬 대호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네."

남궁단이 웃으며 말했다.

"일 조장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내 보기에, 대호법이라는 자리를 충분히 감당할 만한 것 같소만, 아직도 배울 게 많다며 일 조장 자리를 고집하고 있소이다."

"알 것 같군요."

"음?"

"사부란 곧 부모와 같지요. 부모가 편한 노후를 보냈으면 하는 것은 모든 자식의 바람이지만, 동시에 부모가 젊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자식의 마음이지요."

무담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직 모르겠소이다."

"하하, 나중에 일 조장과 따로 술 한잔하십시오. 제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터놓고 말하지 않으면 속내를 모르는 법입니다."

"조언, 감사하오."

웃으며 무담을 보던 남궁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마 호위는 어디로 갔습니까?"

무담이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그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갔다오."

* * *

"다 외웠느냐?"

"물론입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영역이든 똑같지만, 특히 술맛은 사소한 온도 차이, 발효 과정에 따라 크게 틀어지기 마련이다. 제대로 만들고 싶거든 귀찮아도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래."

이천상이 가만히 서량을 보았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어찌 그리 빤히 보십니까?"

"기억에 담으려고."

"예?"

"초대 이후, 최초로 마도천하를 이룬 남자의 얼굴을 되도록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그런다."

순간 서량은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마도천하를 이룬 건 아닙니다."

"이루었다."

"……."

"알고 있잖느냐? 너는 이미 마도천하를 이루었다. 다만 채색이 조금 모자랄 뿐이야."

"채색까지 끝내야지요."

"물론 그래야지."

"그러니 완전한 마도천하를 이룰 때까지, 어디 가지 마십시오."

이천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내가 어딘가로 영영 사라질 것 같더냐?"

"이미 우리 삶에서 사라지셨잖습니까? 다만 조금만 더 지켜봐 주시길 원하는 겁니다."

"내 이미 여한(餘恨)이 없거늘, 널 더 지켜봐서 뭐 할 것이냐."

서량이 애써 짓궂게 웃었다.

"무엇과 하나가 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답답하십니까?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해 주십시오. 간간이 제자가 생각날 때면 한 번씩 오셔서, 이렇게 술자리나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신교가 보고 싶었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네 옆에 있고 싶었다."

"……."

"그러나, 이 또한 순리(順理)는 아니다. 전무후무한 요선(妖仙)의 호의 덕에 인간으로 죽지 않고 반선으로서 세상에 녹아들었지만, 이리 자주 혼(魂)을 끌고 오는 것은 바르지 못한 일이야."

"존재 자체가 역천이신 분께서 이제 와 순리를 찾으시다니요."

"차라리 지옥에 가라고 욕을 하지 그러냐."

"제자 된 도리로 사부를 지옥에 보낼 수는 없지요."

이천상이 피식 웃었다.

"술은 얼마나 남았느냐?"

서량이 병을 흔들었다.

"한 모금 정도 남았어요."

"내놓거라."

"욕심 엄청 많으시네."

"네놈 술 창고에는 산더미처럼 많은 술이 있잖느냐."

서량이 웃으며 병을 건넸다.

이천상이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

"량아."

"예."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놔두거라."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의미심장한 그 한마디가 가슴 어딘가를 쿡쿡 찔러 댔다.

병을 내려놓은 이천상이 환하게 웃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 미소는 지금껏 봤던 그 어떤 미소보다도 깊은 애틋함을 담고 있었다.

"알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착하고 여리다."

"지금껏 제 손에 죽은 사람 수만 만 단위가 넘습니다."

"희대의 살성이라 불릴 만하지.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넌 너만의 혼(魂)을 유지하고 있어. 그런 것은 누구라도 힘들지."

"……."

"그간 부족하게 살아온 것을 안다."

"돈을 좇아 본 적은 없지요."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너는 제대로 된 ‘관계’에 굶주린 삶을 살았다."

서량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어릴 때는 먹기 위해 싸웠고, 담사영 휘하로 들어가서는 죽지 않기 위해 싸웠다. 그 수십 년의 세월 간, 너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쌓아 본 적이 없다."

"……."

"너는 언제나 자유를 바랐다. 그러나 그 자유를 바라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들여다봤어야 했다."

"원인……."

"자유란 무엇이고, 평범한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 평범한 삶이란 결국 타인과의 관계 없이는 만들 수 없다."

"……."

"네가 바라는 자유는 결국,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량은 말없이 이천상을 보았다.

"어째, 저보다 저를 더 잘 아십니다."

"너는 생각보다 알기 쉬운 성격이다."

"하하, 많이 들어 봤지요."

"하나 물어보마. 지금에 와서도 넌, 네 어깨에 실린 짐을 던져 버리고 홀로 독야청청하고 싶으냐?"

"……."

"신교의 교주라는 직책을 버리고, 어느 시골로 들어가 논이나 일구며 살아가고 싶으냐?"

서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너는 그와 같은 삶을 바라 왔다. 한데 왜 지금은 그러지 않겠다고 하는 게냐?"

"지금의 삶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끝이냐?"

"그리고……."

서량이 눈을 감았다.

눈은 감았지만, 그간 관계를 쌓은 무수히 많은 사람이 생생히 보였다.

"제 짐을 덜어 줄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관계를 쌓았구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구나."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너는 이 나의 뒤를 이을 만한 천마다. 네가 욕심을 더 부린다면, 언제라도 신화의 영역을 열 수 있겠지."

"……."

"네가 마음만 먹으면 이백 년은 너끈히 살아갈 수 있을 터. 그때가 되면 네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죽을 텐데, 그때는 어쩔 생각이냐?"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별이란 누구에게도 익숙해지기 어렵다. 그저 참거나 정을 끊어 내는 수밖에 없지."

"……."

"너는 이별이 싫다고 네 사람들과의 정을 끊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헤어짐도 싫습니다."

"너는 이미 날 보냈다."

"여기 계시잖습니까."

"그렇다면, 그때와는 달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낼 수 있겠구나."

서량이 이를 악물었다.

이천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인간으로서 죽지 않고 반선으로서 세상 무언가와 하나가 되었지만, 계속 네 생각이 났다. 나는 네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지 못했어."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그리 생각해 준다면 고맙다만."

고개를 내린 이천상이 술병을 쥐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육천심주의 제조법만큼은 꼭 알려 주고 싶었지."

"……."

"죽음이란 곧 잊힘이다. 그 기억이 길어야 백 년이나 갈까. 그러나 전통과 역사는 천년을 갈 수 있다."

"……."

"내가 네게 육천심주의 제조법을 알려 주었던 것처럼, 훗날 네 제자에게 이 비법을 알려 주거라. 그로써 난 또다시 천년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량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천상을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땅 위에 놓인 빈 술병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자를 내려다보는 스승의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이 자리에 이불을 깔아 줄 날을."

"……."

"너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술이 진짜 이별주임을."

"알고 있었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주저하느냐."

가만히 빈 병을 보던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은 올리지 않았다. 이미 이천상이 죽을 때 마음을 담아 구배지례를 올렸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두 번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천마로서.

절대마신이라 불리며 신교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전대 천마를, 염라마신이라 불리며 신교 역사상 두 번째로 마도천하를 이뤄 낸 당대 천마가 마주하였다.

당당하게 이천상을 마주 보는 서량의 얼굴에, 더 이상의 미혹은 보이지 않았다.

이천상이 말했다.

"무엇을 바라느냐."

"더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느냐."

"제가 보고 싶은 것을 봅니다."

"무엇을 듣고 있느냐."

"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하면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이냐?"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다시, 신교로 향해야지요."

이천상이 서량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잘 있어라."

푸스스스.

이천상의 육신이 빛이 되어 스러졌다.

휘이이이이잉!

판마정으로 만들었던 환상이 한순간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판마정의 진력은 사라졌지만, 하늘로 올라가는 빛은 여전히 생생했다.

서량이 탄식했다.

"냉정한 양반 같으니."

그렇게 서량은 스승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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