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5)
후우우우우웅!
바람이 불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마신궁 입구였다.
‘새삼 신통방통하군.’
담사영을 판마정에 가둬 버리고 호북 무당산으로 향했을 때.
그 먼 거리를 그야말로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주파했다. 싸움이 끝나기 전에 도달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자신은 있었지만, 방법은 알지 못했다.
이제야 알겠다. 자신이 어떻게 그만한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할 수 있었는지.
‘이것이 바로 진정한 축지(縮地).’
호사가들이 말하는 축지란 곧 도술로 땅을 접어 먼 거리를 줄여 버리는 방법이다.
하지만 무(武)로서 선(仙)의 경지에 오른 서량은 진정한 의미의 축지가 땅을 접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땅을 접는 것이 아니라, 지기(地氣)를 열어 그 속에 나를 집어넣고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의식을 집중해 공간을 지워 내는 것.’
무공의 상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무공보다 오히려 술법에 가깝다.
하기야, 궁극의 경지에 오른 서량에게 있어 무공과 술법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자주 쓸 건 못 되는군.’
축지술은 이치에 반하는 수법이다.
말하자면 대자연에 허락된 힘이 아니다. 어쩌다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밥 먹듯 써 대다간 필시 하늘의 제지를 받을 것이다.
그렇다. 서량은 이미 그러한 경지까지 오른 것이다.
신화의 문을 열지 않았음에도 하늘의 개입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경지에.
‘사부님께서 굳이 축지를 쓰지 않으신 이유가 있었어.’
존재 자체가 역천이었던 분이다. 굳이 축지를 써서 하늘의 개입을 가속시킬 이유가 없었다.
서량이 고소를 지었다.
‘그분이 엿보았던 경지 가까이 도달했거늘, 이제 그분은 없군.’
왜일까?
보내 드리기 전까지는 그리도 착잡했는데, 막상 보내 드리고 나니 생각보다 마음이 괜찮았다.
‘나 역시, 언젠가 그곳에 도달할 테니까.’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서량이 피식 웃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주접은 이쯤 떨었으면 됐다, 이놈아."
그가 뒷짐을 지고 마신궁 입구로 걸어갔다.
흑백쌍위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흑백쌍위가 교주님을 뵙습니다!"
"손님은 오셨나?"
"현재 대호법과 함께 있습니다."
"좋아."
서량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익숙한 내 집인데도, 어쩐지 낯선 곳으로 찾아온 것만 같았다.
"문 열게."
"존명!"
쿠구구궁!
마신궁의 대문이 열렸다.
천천히 열리는 대문을 보며, 서량은 처음 마신궁에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지.’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 마도 무림의 정점이라는 천마의 부름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더랬다.
‘그런 시절도 있었어.’
서량이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뒷짐을 지고 입궁하는 그의 모습은 위풍당당 그 자체였다.
처음 삼공자의 몸으로 들어와 판마정으로 향할 때의 그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차이였다.
‘이제는 정말,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지.’
자신이 신(神)이 되었음을.
마도 무림을 넘어, 천하 무림 모두가 두려움에 떠는 진정한 마신(魔神)이 되었음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오, 서 교주."
남궁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량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을 못 맞췄소이다. 미안하오."
"그리 말씀하지 마시오."
무담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고생했네."
"아닙니다."
"어떻게, 자리 피해 줄까? 한창 즐겁게 얘기 중이던 것 같은데."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해도 됩니다. 그렇지 않소, 남궁가주?"
"물론입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우리 일부터 끝냅시다."
"그럽시다."
서량이 남궁 남매를 바라보았다.
‘……!!’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소맷단을 움켜쥐었다.
남궁룡은 침을 삼켰고, 남궁화는 홀린 듯 서량의 얼굴을 보았다.
‘엄청나구나.’
그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
남궁화의 실력으로는 서량의 경지를 추측조차 하기 힘들다. 당대 무림을 살아가는 누구라도 똑같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서량을 아는 남궁화에게 있어, 현재의 서량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충격적이라는 말로도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몸도, 기도도, 존재감도 전부 달라.’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제일을 논한다더니, 과연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두 눈에 서린 위엄만으로도 서량의 강함이 상식을 벗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괴물……!’
그때, 서량이 물었다.
"두 사람 다 오랜만이군."
화들짝 놀란 남궁 남매가 포권을 취했다.
"교주님을 뵈어요."
"남궁룡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서량이 손사래를 쳤다.
"새삼스럽게 그 무슨 딱딱한 인사야. 됐으니까 허리 펴."
"에……?"
"본교 사람도 아닌데 예의가 너무 과한 거 아냐?"
두 사람이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량이 시큰둥한 얼굴로 남궁단에게 말했다.
"나 이런 거 싫어한다니까."
"허허, 어쩌겠소? 저희들이 인사한다는데."
"미리 언질 좀 주지 그랬소?"
"교주도 너무 그러지 마시오. 교주의 강함과 영향력을 떠나, 한 조직의 수장에게 당연히 갖춰야 할 예의외다."
"으, 딱딱해."
서량이 경망스럽게 손을 파닥거렸다.
"작업실로 갑시다."
"그럽시다. 한데 어디엘 다녀오셨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잠깐 사부님께 다녀왔소. 이제는 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남궁단이 한숨을 쉬었다.
사부란 곧 부모와도 같은 법. 이미 죽은 이천상을 두 번 보낼 순 없으니, 이제야 마음에서 놔주었다는 뜻이리라.
"고생이 많았소이다."
"남들 다 하는 고생인데, 뭘. 갑시다."
"그럽시다."
그렇게 네 사람이 마신궁의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의 정자에는 어느새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누가, 언제 차렸는지는 오로지 흑백쌍위만이 알리라.
"술 한잔하기 전에 물건부터 봅시다."
남궁단이 품에서 검령을 꺼내 서량에게 건넸다.
"흐음."
단검을 이리저리 살피던 서량이 이내 감탄을 터트렸다.
"굉장하군. 이렇게 형태를 만든 것만으로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어."
"교주께서 구해다 주신 현철이 아니오. 오히려 이쪽에서 처리하지 못해 민망할 따름이오."
"무슨 그런 말씀을."
"한데, 그것을 어찌 주조할 생각이오?"
"별로 어렵지 않소."
서량이 손으로 정자를 가리켰다.
"가서 앉아 계시오. 일각이면 끝나니까."
남궁단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일각 만에? 어떻게?’
궁금했지만, 나름대로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궁단이 남매를 이끌고 정자로 올라섰다.
후우우우웅.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단검을 잡은 서량이 손에 힘을 주었다.
카앙!
검병이 부서지고, 뭉툭한 검날만이 남았다.
서량의 눈빛이 바뀌었다.
쿠르르르르릉!
일순 하늘이 어두워지는 듯했다.
서량의 입이 열렸다.
"소천겁화(燒天劫火)."
화르르르르륵!
단검을 잡은 그의 손에서 시커먼 화염이 치솟았다.
구유마화에 필적할 정도의 엄청난 열기였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열기는 서량의 손에만 집중되었을 뿐, 주변으로 퍼져 나가지 않았다.
완벽에 이른 진기 제어였다. 단 한 줄기의 화염도 손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치이이이이이익!
시커먼 화염이 단검을 녹이기 시작했다.
남궁 남매가 입을 쩍 벌렸다. 남궁단의 얼굴 역시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걸 사람이 녹인다고?!’
녹는 속도도 엄청났다. 빠른 속도로 녹아내린 쇳물이 시커먼 화염에 휩싸여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순간 서량의 오른쪽 눈이 붉게 물들었다.
화르르르르륵!
소천겁화에 이은 구유마화였다. 땅에서 솟구친 새하얀 화염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쇳물로 침투했다.
화아아아악!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었다.
탁한 회색빛을 띠던 쇳물이 단번에 투명해졌다. 그 안에 현철 특유의 먹빛은 머금고 있었지만, 쇳물의 겉면은 유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서량이 주먹을 쥐었다.
꾸르르르륵.
쇳물이 서서히 단검의 형태를 갖춰 갔다. 이전의 조잡하던 모양이 아닌, 지극히 날카롭고 화려한 생김새의 검날이었다.
그가 왼손 검지를 들었다.
치이이이이익!
화염의 벽에 구멍을 뚫으니, 그곳으로 찬 공기가 유입되었다.
동시에 뜨거운 연기가 잔뜩 피어올랐다. 그 연기만으로도 벽을 녹일 수 있을 정도였다.
서량은 섬세하면서도 철저하게 마기를 조절했다. 아주 약간의 열기만 새어 나가도 후원 전체가 불바다로 변할 것이다. 후원이 망가지는 걸 넘어, 남궁단과 남매까지 불살라 버릴 수 있다.
그가 다루는 화기(火氣)는 그렇게나 지독했다. 초절정고수의 힘으로도 찰나를 버틸 수 없을 정도의 힘이었다.
화르르르륵! 치이이이익!
그렇게 가열과 다시 식히는 과정을 몇 번이나 거쳤다.
"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됐군."
그가 주먹을 쥐었다.
후욱!
천하를 불태울 듯 타오르던 소천겁화와 구유마화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치이이이이익!
단검에서 엄청난 양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단순히 찬 공기가 닿은 게 아니었다. 서량의 선천마기로 온도가 뚝 떨어진 공기는 그 자체로 물과 같은 역할을 했다.
대량의 연기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밖에서 보면 마신궁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스르르르륵.
구유인화도법, 혈규대홍련의 구결로 검을 적정 온도까지 식힌 서량이 검날을 퉁겼다.
따아아아아아앙!
청아한 소리와 함께 칼날 표면에 붙은 재가 떨어졌다.
"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서량이 손을 휘저었다.
후우우우우웅!
정원을 어지럽히던 연기와 화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자, 어떻소?"
정자에 오른 서량이 남궁단에게 단검을 건네었다.
남궁단은 홀린 듯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굉장하군."
언뜻 보아도 검날이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혈조를 기준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검은, 얼핏 단조로워 보이면서도 극상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검병은 본교 대장간에 따로 말해 두었소. 나중에 맡기시오."
"고맙소."
"고맙기는. 오히려 내가 고맙지."
남궁단이 떨리는 눈으로 서량을 보았다.
"서 교주께서는 진정, 무신(武神)이 다 되셨구려."
사람들은 규격 외의 강자에게 무신이라는 칭호를 붙이곤 한다.
하지만 남궁단이 말하는 무신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세상에 정말 무(武)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서량의 몸을 빌려 태어났다고 해도 선뜻 부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검 한 자루 만드는 것쯤은 별일이 아니오. 진짜 중요한 것은, 앞으로 그 검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겠소."
"물론 그 말도 맞소."
남궁단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서 교주의 도움 덕에 본가의 의천검령이 완성되었소. 이제 내가 교주께 무엇을 해 주면 되는지 듣고 싶소."
"해 준다…… 사실, 가주께서 따로 해 줄 것은 없소."
"그게 무슨 말씀이오? 분명 교주께서 말하지 않았소. 검령을 만들어 주는 대가로 부탁 하나만 들어 달라고."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부탁이라면 부탁이지만, 결국 당연히 남궁이 해야 할 일이오. 하니 부탁이라고 하기에도 뭣하지."
"그게 무엇이오?"
"안휘를 관리해 주시오."
"……?!"
"이제부터 남궁세가가 안휘성의 왕부(王府)외다. 그리고 그 왕부의 주인이 바로 남궁가주시오."
남궁단의 눈이 흔들렸다.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왜? 마음에 들지 않소?"
"아니, 이건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소. 왕부라니? 혹 황제께서……."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황제도 알고 있으니까."
"……?!"
세 사람이 경악한 얼굴로 서량을 보았다.
서량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의천검령은 안휘의 왕을 상징하는 신물이오. 그리고 그 신물은 천하의 주인인 내가 만들었소."
"……!!"
"부탁이자 제안이고, 동시에 명령이오. 이제부터 안휘는 남궁이 다스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