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8)
쉬이이이익! 쿠르르르릉! 쾅!
사선으로 베인 바위가 서서히 미끄러지더니 이내 땅에 처박혔다.
“후욱.”
위홍련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땟물이 줄줄 흐르는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거의 거적때기라 봐도 무방할 만큼 걸레짝이 되었다. 드러난 맨살에는 여지없이 검상이 났으며, 검을 쥔 손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무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에 미치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혹독하게 수련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여기까지 왔구나.’
외양은 전장에서 한 달을 구른 사람처럼 볼품이 없었지만, 두 눈만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깊고 맑았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위홍련이 손에 쥔 검을 내려다보았다.
보름이 넘도록 기름칠 한번 해 주지 않았지만, 여전히 새하얀 보광(寶光)을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명검은 명검이구나 싶었다. 사신병기, 백호의 호포검은 그 전설처럼 불괴의 병기인 것 같았다.
“이제야.”
위홍련이 미소를 지었다.
지쳐 보이는 미소 속, 무언가를 성취한 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뿌듯함이 어렸다.
“이제야 네 주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아.”
우우우웅.
호포검이 가느다란 검명(劍鳴)을 터트렸다.
진기를 실은 게 아니었다. 검이 스스로 울고 있었다.
홀린 듯 검을 내려다보는 위홍련의 귀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하구나.”
위홍련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철검마존이 뒷짐을 지고 걸어오고 있었다.
“사부님.”
철검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외지물인 검(劍)에 마음(心)을 담는 것. 말은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어렵지. 실제로 대다수의 검사들이 자신의 검에 마음을 담은 줄 알지만, 그것은 그저 의념에 불과할 뿐 진짜로 마음을 담은 경우는 극히 희귀하다.”
“그런가요.”
“너도 겪어 봐서 알 것 아니더냐. 그간 그 흉포한 검으로 온갖 임무를 성공시켰지만, 정작 그 검에 마음은 깃들지 않았다. 그래서 네 검은 가벼웠다.”
위홍련이 다시 호포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동공에 새하얀 검신이 스며들 듯 박혀 들었다.
“어떠냐?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그 검의 느낌이?”
“…….”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지. 그때, 네 대답은 이러했다. 마치 네 몸과 하나 같다고 했어.”
“그랬어요.”
“지금은 어떠하냐?”
위홍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검은 검일 뿐입니다. 다만, 호포검이 제 손에 쥐어져서 다행이에요.”
“크하하하!”
철검마존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숲을 울렸다.
절제의 미덕으로 이름 높은 철검마존, 그가 자신의 마기조차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기쁘다는 뜻이리라.
한참을 웃던 철검마존이 돌연 호통을 쳤다.
“이놈! 이제야 네 녀석의 손이 검도(劍道)의 끝자락에나마 닿았구나!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다!”
“그런가요.”
“십 식(十式)의 용검(龍劍)이 제대로 된 위력을 내기 위해서는 검의 술(術)과 법(法)을 거쳐 도(道)에 닿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창안한 용검십식이다. 내 감히 장담하건대, 용검십식을 대성한다면 검으로는 능히 신교제일을 논해도 될 것이다.”
“대단한 자신감이신데요?”
“물론이다. 용검십식은 내 인생이 담긴 절학이다. 신교의 모든 검학을 집대성하여 열 가지 식으로 압축한 검이니, 그 깨달음을 구현하기 위해선 지고(至高)의 안목이 필요한 법. 정작 용검을 창안한 나조차도 칠 할을 채 깨우치지 못했다.”
차아앙!
위홍련의 눈이 깊어졌다.
사부가 느닷없이 검을 뽑았기 때문이었다.
“보이느냐?”
철검마존이 자신의 검을 가로로 세웠다.
“이 검은, 내가 백일곱 자루의 검을 부러트린 후에 쥔 검이다. 그게 이십 년 전이었지.”
“즉, 백여덟 번째의 검이네요.”
“그렇다. 난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일평생 보검을 쥐어 본 적이 없었다.”
위홍련의 동공이 서서히 확장되었다.
“……굉장해요.”
철검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무뚝뚝하기로는 무담보다도 더하다는 그가 이렇게 웃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무엇이 말이냐?”
“흔한 대장간에서 만든, 그저 그런 철검(鐵劍)이잖아요.”
“그렇다.”
“심지어 이십 년 전에 만들어진 검인데…… 왜 이렇게 강단이 넘쳐 보이죠?”
“그리 보이느냐?”
“네.”
“예전에는 별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잖느냐?”
“오히려 볼품없다고 생각했죠.”
“이제야 네 안목이 쓸 만해졌다는 뜻이니라.”
철검마존이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쓰다듬었다.
무척이나 잘 관리된 검이지만,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었다. 특별한 철도 아니고, 하다못해 강철도 섞이지 않은 철검의 검신에는 미세한 구멍이 곳곳에 뚫려 있었다.
“천하의 무수히 많은 신병이기와 부딪쳐도 날 하나 상하지 않은 검이다. 왜인 줄 아느냐?”
“사부님께선 단 한 번도 검에서 마음을 놓은 적이 없으시니까요.”
“동시에, 이십 년간 내 혼(魂)으로 제련되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 탄력과 경도가 높아져만 갔지. 적어도 내 손에 쥐어졌을 때는 말이다.”
웃으며 검을 내려다보는 스승의 얼굴을 보며, 위홍련은 알 수 없는 애잔함을 느꼈다.
스승의 눈에 어린 감정엔 애송이인 자신으로서는 유추조차 할 수 없는 역사가 중첩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검을 내려다보던 철검마존의 눈이 일순 기광을 뿜었다.
위홍련의 눈이 커졌다.
“사부님……?”
그때였다.
카아아앙!!
“헉!”
위홍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느새 철검이 반으로 쪼개져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도 깔끔하게 쪼개진 게 아니라 쪼개진 부위가 죄다 부스러져 다시 이어붙이기도 힘들 것 같았다.
“사, 사부님! 이게 무슨 짓이에요!”
“더는 필요치 않다.”
“네?!”
철검마존이 흐뭇한 얼굴로 위홍련을 보았다.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검은 그저 신외지물에 불과하다고.”
“하, 하지만……!”
“같은 경지에 올라도, 그곳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제각기 다른 법이다.”
“……?!”
“너는 네 검을 신외지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너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심검(心劍)의 진입로에 들어선 것이지. 물론 세인들이 말하는 심검과는 다르다만, 네가 도달한 그 경지 역시 심검이라 아니 말할 수 없도다.”
“아…….”
“나는 달랐다. 나는 검이 신외지물이라 생각했으나, 검에 마음을 담았을 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검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
“알겠느냐? 같은 경지에 이르렀어도 깨달은 바가 이리 다른 것이다.”
철검마존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내, 너를 가르치며 많은 것을 깨우쳤다고 생각했거늘 또 한 번 이리 큰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도다. 깨달음은 돌고 도는 법, 검은 신외지물에 불과하다는 네 말을 듣고 나서야 나 역시 깨달았다. 그래, 검은 신외지물이지.”
푸스스스스.
부러진 철검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철검마존의 장력(掌力)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보는 그의 눈빛은 천하의 어떤 검도 견주기 힘든 신검(神劍)의 안광을 토해 내고 있었다.
“경지에 오르면 풀잎으로 거목을 베고 맨손으로 바위를 쪼개거늘, 굳이 검을 들고 다닐 필요가 있겠느냐? 그저 검에 마음을 담았던 지난날과 같이, 내 몸뚱이에 마음을 담으면 그뿐인 것을.”
철검마존이 돌연 탄식했다.
“이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데 이십 년 세월이 걸릴 줄이야.”
위홍련은 새삼 깨달았다. 무(武)의 경지가 상승하는 것은 곧 진기의 질적 향상을 뜻하니, 결국 검도(劍道)의 향상과는 다른 것이라고.
대개 무공이 성장하며 또 다른 경지로 진입하고 깨달음을 얻기 마련이지만, 스승처럼 별개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도 있었다.
‘하나에 미쳐야 하는 거야.’
불균형하다면 불균형한 성장.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을 뉘라서 탓할 것인가. 스승은 자신이 이룬 경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검도(劍道)를 깨달으신, 정녕 위대한 분인 것이다.
위홍련이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스승의 위대함, 스승을 향한 인사가 아닌 검도 선배를 향한 존경의 인사였다.
“홍련아.”
“네.”
“예전에 교주님께서 이 늙은이에게 해 주신 말씀이 있다.”
“교주님이요?”
철검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흉포하고 지나치게 성급한 면이 있는 녀석이지만 천성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지.”
위홍련이 미소를 지었다.
“천성이 그렇지 않더라도, 거칠게 살다 보면 천성도 변하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는 그렇겠지. 하지만 네 천성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저도 제 천성을 모르는데요?”
“나는 알겠다. 이제야.”
“네?”
철검마존이 몸을 돌렸다.
“따라오너라.”
위홍련은 의아한 감정을 누르고 스승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새삼 실감했다. 자신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과거의 그녀였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스승을 괴롭혔을 것이다. 어딜 가는 것이며 목적은 무엇이냐고. 조금 전의 내 검은 어땠으며, 사부님은 또 얼마나 높은 곳으로 향하신 것이냐고.
정말 입이 쉴 새가 없이 떠들어 댔을 것이다. 스승의 호통 소리를 듣고도 혓바닥을 내밀곤 혼자 주절거리길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리도 불안해했었구나.’
그렇다.
그녀는 언제나 불안해했다. 어린 시절부터 신교에 들어와 사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독해져야 했던 그녀는, 평화로운 분위기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움직여야 했고, 언제나 시끄러워야 했다. 분란이 없으면 누군가를 시켜서 만들었고,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직접 나서서 난동을 부렸다.
평화에 대한 면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약했던 거야. 불안했던 거다.’
평화와 고요란 곧 자신이 죽을 때에야 얻을 수 있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강해졌어.’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쌓게 된 강함.
위홍련이 눈을 감았다.
‘감사합니다.’
스승에 앞서, 서량에게 고마웠다.
그가 자신을 좋게 봐 주지 않았다면, 초면에 난동을 부리는 자신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면 이리도 고귀한 깨달음은 영영 얻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아마 죽어도 억울하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이 되시는가?”
“물론이에요.”
위홍련이 눈을 떴다. 지금껏 눈을 감고 철검마존의 뒤를 따랐던 그녀였다.
철검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검은 너무나도 상반되지만, 도달한 검도(劍道)가 비슷하니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네. 부디 부족한 내 제자를 잘 부탁하네.”
“제가 오히려 영광이에요.”
주서윤이 검을 쥐고 포권을 취했다.
“언젠가 꼭 한 번 더 겨뤄 보고 싶었어요. 위 령주님의 검을 받아 볼 수 있게 된 것, 삼생의 영광입니다.”
위홍련이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미친년과 검을 섞게 된 게 어찌 영광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많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이에요.”
웃으며 두 사람을 보던 철검마존이 등을 돌렸다.
“목숨만 건져 돌아오거라.”
순간 두 여인의 눈이 불꽃을 터트렸다.
차아아아앙!
무서운 속도로 검을 뽑아 든 두 여인이 정면으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