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11)
“후우.”
마신궁으로 돌아온 서량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얼추 할 일은 다 끝냈군.”
지역마다 배치할 인원들을 정했다.
주서윤의 경우는 다소 긴가민가했다. 다만, 호북에는 하오문의 본진이 있었다. 공야치와 힘을 합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행정을 보여 줄 것 같았다.
게다가 지역을 다스리는 수장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품성과 결단력이다.
‘호북의 물길은 넓고 길다. 그런 만큼 상업이 활발하고 자금의 흐름이 격렬해.’
공야치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신교의 후계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제왕학(帝王學)을 비롯한 각종 전문 지식을 배운다. 물론 그것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제대로 배운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주서윤이었다. 적어도 이론에 있어서는 서량보다도 훨씬 해박할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천지 차이인 법. 주서윤을 장(長)으로 두고 공야치를 참모로 세우면, 그럭저럭 괜찮은 조합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주서윤에겐 무당파를 재건해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무당의 도사 중엔 본래의 선함을 간직한 자가 꽤 많다. 그들과 교류하며 민심을 안정시키면, 호북도 예전처럼 살 만한 지역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서량이 눈을 빛냈다.
‘아주 천천히, 무당파를 관부화해야겠지.’
무림을 없애겠다면서 무당파를 재건한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겠지만, 이것은 꼭 필요한 단계였다. 적어도 소림과 무당의 상징성은 강호제일, 그러한 문파들이 자발적으로 제국의 품에 들어가면 무림을 무너트리는데 가속이 붙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온갖 잡음이 튀어나오겠지만.
쿠르르릉.
느닷없이 대전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호요성이 뛰어 들어왔다.
“교주님.”
서량이 혀를 찼다.
“이제는 뭐 막무가내로 들어와 버리네.”
“바빠서요.”
“쯧, 그래서 무슨 일인데?”
“여기, 결재 하나만 해 주세요.”
“알아서 하라니까 뭔 결재야?”
“알아서 하기에는 건수가 너무 커서 그렇죠. 한번 보세요.”
호요성이 건넨 문서를 훑어보던 서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옴마? 이거 진짜여?”
“예.”
호요성이 입맛을 다셨다.
“예전에 이 비슷한 얘기를 하긴 했는데…… 진짜로 진행할 줄은 몰랐습니다.”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 양반들도 알지? 무림을 없애고 중원을 제국의 이름 아래 통일시키겠다는 거.”
“아마 알걸요?”
“무슨 대답이 그래?”
“전쟁 때보다 딱 두 배 더 바빠요. 한계라고요. 요샌 제가 밥을 먹었는지도 긴가민가합니다.”
“천하의 만뇌서생도 늙었구만.”
“한 번만 무례를 저질러도 됩니까?”
“……아니.”
“양심이 있으십니까?”
“안 된다니까 냅다 저지르고 있네.”
“이 정도 되면 사람 좀 뽑아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이 많은 일을 저 혼자 다 처리해요? 저 요새 잠도 더 줄였습니다. 하루에 반 시진밖에 못 잔다고요. 그런데 늙었다니요? 복지라도 좀 어떻게 잘…….”
“총군사.”
“예.”
“미안하네.”
“그게 답니까? 저 두 달 만에 몸무게가 두 관이나 줄었어요.”
“그 마른 몸에 두 관이 더 줄었다고?”
“두 달 더 지나면 뼈밖에 안 남을 겁니다.”
“구유마공 알려 줄까? 그게 회복력이 끝내주거든.”
“됐거든요!”
호요성이 빽 소리를 질렀다.
서량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어지간하면 이리 길길이 날뛰진 않을 텐데, 확실히 힘들긴 힘든 모양이었다.
“사람 뽑는 건 기대도 안 하니까 이거 결재나 해 주시란 말입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허가하실 겁니까, 안 하실 겁니까?”
“……하지 뭐.”
“고심도 안 하고 그렇게 냅다 대답하시는 겁니까? 천하 경영이 장난이에요?”
“설마 빙궁 댁이 우리 가슴에 비수를 박겠어?”
“으아아아!”
호요성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충분히 고심한 거니까 걱정하지 말게.”
“……진짜요?”
“장난 아니라니까. 그리고 설령 비수 박겠답시고 날뛰어도 절대 그렇게 못 해. 내가 주기적으로 찾아갈 거거든.”
“…….”
“이 정도면 됐지?”
“좋습니다.”
호요성이 입맛을 다셨다.
“빙궁의 중원지부 건, 교주님께서 허가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도장 좀 찍어 주세요.”
“아? 잠깐만.”
서량이 한쪽 바닥에 나뒹굴던 도장을 주워 들었다.
호요성의 얼굴에 허탈한 기색이 어렸다.
“세상에…… 교주님 개인 직인이 그냥 맨바닥에 굴러다니네요?”
“어, 이 자리가 딱 줍기 좋아. 쓸데없이 어디 넣어 놓으면 찾으러 가야 하잖아.”
“밑에 애들 시키시면 되잖아요.”
“뭘 이런 사소한 것까지 사람을 시켜?”
“허허허.”
쿵!
도장을 찍은 서량이 직인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신기하게도, 바닥에 떨어진 직인은 처음 있던 그 자리로 또르르 굴러갔다.
“자, 결재했네.”
“후,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총군사.”
“왜요.”
“……반응 예술인데?”
“신경 날카로우니까 건드리지 마세요. 깨물어 버릴 겁니다.”
이 정도면 하극상 아닌가?
서량은 찝찝한 얼굴로 품에서 잘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자, 받게.”
“뭔데요, 그게.”
“보면 알아.”
호요성이 인상을 찡그리며 종이를 건네받아 펼쳤다.
곧이어 그의 눈이 커졌다.
“옴마?”
“그거 내 거야. 함부로 가져다 쓰지 마.”
“음마?”
“…….”
“이게 뭡니까?”
“뭐긴 뭐야. 요새 깜빡깜빡한다더니, 이제 글자도 못 읽나?”
“읽었으니까 이렇게 여쭤보겠지요? 뭡니까? 이 솜털 뽀송뽀송한 어린애들 이름 같은 명단은?”
“그럴 것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솜털 뽀송뽀송해. 제일 나이 많은 놈이 이제 약관에 이르렀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무슨 명단인데요?”
“자네 새끼들.”
“예?”
“잘 키우면 자네 업무 분담해 줄 수 있을 인재들이라고. 고르고 골라서 뽑아 놓은 거니까, 지지든 볶든 알아서 해 봐.”
호요성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왜? 감동했…….”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이건 또 뭔 헛소리야.”
“저 자르고, 이 중에 한 놈 고르실 생각이세요?”
“아, 피곤해.”
“진짜 자르시면 군사부 기밀 자료 다 불살라 버릴 거예요.”
“이제 막가자는 거지?”
“음, 안 자르시겠군요.”
호요성이 낄낄거리며 명단을 살폈다.
“한데 갑자기 웬 인원 보충입니까?”
“방금까지 나 들들 볶던 사람 맞아? 혼자선 힘들다며? 그래서 내 나름대로 구해 본 거야.”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틈틈이 조사도 해 봤고, 몰래 지켜보기도 했어. 그중 절반은 책임감이 투철하고 일머리가 좋은 애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좀 자유분방하고 싸가지는 없지만, 희대의 천재 소리 듣는 놈들이야.”
“헐.”
“쳐 낼 놈은 쳐 내고, 안고 갈 놈은 안고 가. 잠깐은 힘들어도 잘만 키워 놓으면 세상 편해지지 않겠나.”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눈물이 다 나려고 합니다.”
“눈 밑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
“진짭니다.”
“알겠어.”
“진짜라니까요?”
“알았다고!”
“아이참, 오늘은 그냥 쉴까요? 간만에 저랑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서량이 눈을 부라렸다.
“안 마셔!”
이각 후.
“캬! 좋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주도 좀 같이 먹어, 이 사람아.”
“예에. 그 전에 한 잔만 더 따라 주십시오.”
“에잇.”
서량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호요성이 감격한 눈으로 잔을 보다가 그대로 비웠다.
“크으, 얼마 만에 술인지.”
“쯧, 오늘은 그냥 이거 마시고 푹 자. 그러다 진짜 몸 상하겠네.”
“그럴까 싶습니다.”
“잘 생각했네.”
“한잔 따라 드릴까요?”
“혼자만 처먹으려고 했나, 그럼?”
“헤헤.”
호요성이 공손한 자세로 서량의 잔을 채웠다.
곧바로 잔을 비운 서량이 툭 던지듯 물었다.
“요새 오른쪽 어깨가 많이 쑤시지 않나?”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서량이 손을 내밀었다.
“손.”
“예?”
“맥문 내놓으라고.”
“아, 예. 순간 제가 개라도 된 줄 알았습니다.”
“나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지 않나? 개나 말 둘 중 하나겠지.”
호요성의 맥문을 쥔 서량이 내공을 일으켰다.
우우우우우웅.
호요성의 눈이 커졌다.
“어때?”
“엄청 시원한데요? 뭡니까, 이거?”
“자네 몸에 쌓인 탁기를 다 제거한 거야. 특히 간에 무리가 심했군. 운공조식 빼먹지 말고 하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상으로 돌아올 테니까.”
“허어, 간만 치료하신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머리가 엄청 맑아졌어요.”
“뇌호혈 인근이 많이 뭉쳤어. 그쪽 혈(穴) 싹 청소해 놨으니까 건강 관리 좀 하라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일순간 탁기를 증발시키고 오장육부의 뒤틀림을 바로잡았다.
신기(神技)에 이른 내공 운용. 심지어 두부(頭部) 쪽의 혈까지 모조리 청소해 놨단다. 두부의 혈은 지극히 세심하게 다뤄도 자칫 잘못하다간 폐인이 되거나 죽을 수 있다.
호요성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교주님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취할 때까지 마셔 볼랍니다.”
“그러든가.”
두 사람이 연신 잔을 부딪치며 술을 들이켰다.
확실히 서량의 기공 치료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호요성은 평소 주량을 훌쩍 넘기고도 멀쩡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교주님.”
“음?”
“기분이 어떠십니까?”
서량이 피식 웃었다.
“심심해 죽을 지경이지.”
“헐.”
“고생은 내가 아니라 자네들이 하잖나. 심심할 만도 하지.”
“아니, 그런 거 말고요. 기분이 어떠시냐고요.”
“그냥 뭐 그럭저럭.”
“생각보다 엄청 담담하시네요.”
“처음에는 기뻤지. 근데 뭐, 그거 며칠 안 가더라고. 자네들이야 업무가 두 배로 늘었지만, 난 평소 하던 일의 반도 안 하거든. 이런저런 생각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담담해진 것 같네.”
“그렇군요.”
서량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인생 뭐 있겠나. 산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산이고, 그 산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앞을 막고. 어차피 끝나지 않은 인생, 마음이라도 편히 먹고 살아야지.”
“도사가 다 되셨는데요?”
“그냥 그렇더라고.”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라도 편하게 먹고 살자……. 하긴, 교주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재차 잔을 기울였다.
처음에만 대화가 많았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 사이엔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오랜만의 술자리이니 할 말이 많을 법도 한데, 딱히 그런 기색도 없어 보였다. 서량이나 호요성이나, 서로의 잔을 채워 주며 맛난 안주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반 시진이라는 시간이 또 지나갔다.
“교주님.”
“음?”
“그간 못난 총군사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내게 너무나도 과분한 사람일세. 이렇게 고생시켜도 되는 건지 걱정될 만큼.”
“하하하.”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정말 수고 많았네.”
호요성의 얼굴에 뿌듯함이 어렸다.
천금의 보화보다, 천하제일의 무공보다도 가치 있는 선물이었다. 그 칭찬 한마디만으로도 호요성은 지난날의 피로를 전부 씻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교주님.”
“말씀하시게.”
“축하드립니다.”
서량이 웃으며 잔을 들었다.
“고맙네.”
찡!
잔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유독 맑고 고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