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639화 (638/774)

639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14)

“후우우.”

명학(明學)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것이었구나.”

안개 가득한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담담한 환희가 어렸다.

“이것이었어. 이게 바로 태극혜(太極慧)였어.”

그가 고개를 내려 검을 보았다.

송문고검(松紋古劍)이 어두운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호구가 찢어져 흘러내린 피가 말라붙어 갈변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놀랍구나.”

명학이 탄성을 질렀다.

“무당(武當)의 무수히 많은 검을 원전(圓轉)과 무층(貿層) 두 개의 검도(劍道)로 축약하고, 그 두 개의 검도를 하나로 만드니 이것이 바로 음양의 태극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원무검신(元武劍神)이라 불리셨던 그분의 깨달음은 실로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어.”

그때,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신 분이죠.”

명학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름다운 여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검은색 도복을 입고 있는 여인. 이십 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날카로워 조금은 차가운 인상이지만, 항상 미소를 달고 있기에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풀어 헤친 머리카락은 자유분방해 보였고, 펄럭이는 도포 자락은 신선의 손짓을 연상시킨다. 요대에 장검을 매고 있는 모습 또한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검후께서 오셨군요.”

여인, 주서윤이 손사래를 쳤다.

“검후라니요? 부끄러운 호칭이에요. 그리 부르지 마시라니까, 왜 또 저를 놀리세요.”

“허허, 제가 어찌 검후를 놀리겠습니까? 다만 원전검(圓轉劍)에서 이제야 태극혜를 찾았는데, 검후께서는 무수히 많은 검결을 나누셨지요. 능히 검후라 불리실 만합니다.”

명학이 눈을 찡긋거렸다.

“실제로 화경에 이르시지 않았습니까? 그 연배에 화경에 오르신 것만도 놀랍건만, 깨달음은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 닿아 계십니다. 지금껏 단 한 사람을 빼고, 그 연배에 화경에 이른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서윤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 얼굴에 금칠을 하려고 작정을 하셨군요.”

“허허허.”

“그나저나 축하드려요. 드디어 원전검에서 태극혜검(太極慧劍)을 보셨군요.”

“그렇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자괴감보다는 환희가 더 큽니다.”

“늦지 않았어요. 전혀 늦지 않았죠. 제가 원전무층검(圓轉貿層劍)에 누구보다도 능통한 것은 할아버지께서 끊임없이 도와주셨기 때문이에요. 사 년 만에 태극혜를 깨우치신 명학 도장께서 더 대단하신 겁니다.”

“허허, 검후야말로 이 멍청한 도사 놈 얼굴에 금칠해 주지 마십시오.”

“호호.”

주서윤이 웃으며 명학 옆에 섰다.

그녀가 무당산 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보는 광경이지만,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기도 했다.

명학이 물었다.

“현천 태사조를 보십니까?”

“아니요. 할아버지는 오늘 아침에 뵈었어요.”

죽어서 무당산과 하나가 된 현천진인을 보았단다.

지금의 명학으로서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필시 주서윤만이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하면 지금은 무엇을 보고 계시는지요?”

“천하(天下)요.”

“허어!”

주서윤의 미소가 깊어졌다.

“요즘 들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 이래서 사형이 자꾸만 세상을 들여다보라고 하셨구나, 세상을 봐야 나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구나.”

“허허허.”

“사형이 왜 천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그 천하가, 검후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십니까?”

“바빠 보이네요.”

“허허허!”

“격동의 시기를 맞이했던 천하가 이제야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잖아요. 하지만 천하란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천하는 이토록 아름답고 역동적이네요.”

주서윤이 눈을 감았다.

“사형이 그린 천하, 적어도 제 눈에는 소박해서 좋아요.”

“그러고 보니, 근래 교주님께서는 무탈하시답니까?”

“호호, 고금제일을 논하는 고수에게 별일이 있으려고요.”

“헛?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몇 달 됐어요. 요새는 주로 총군사와 연락하죠. 뭐, 다 업무적인 연락이지만요.”

명학이 미소를 지었다.

“한 번씩 그립지는 않으십니까?”

“사형이요?”

“교주님도 그렇고, 신교도 그렇고요.”

주서윤이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 씁쓸함과 애잔함이 감돌았다.

“그리워요. 정말 많이 그립죠.”

사 년 전, 무당산으로 온 주서윤은 무당산 곳곳에 숨어들어 수양하던 도사들을 모아 무당파를 새로 세웠다.

뜻밖에도 도사들은 주서윤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녀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녀가 구사하는 검결이 무당 무공의 극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서윤이야말로 현천진인의 의발전인(衣鉢傳人)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주서윤은 그들에게 큰 어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사 년.

무당파는 과거 소실했던 무공 대부분을 복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현천진인의 깨달음이 집약된 원전무층검결에는 무당파의 모든 무공이 깃들어 있었고, 주서윤은 그 검결에서 내공심법, 검법, 권법, 장법, 보법, 경신술까지 하나하나 나누어 낼 수 있었다.

어쩌면 무당산과 하나가 된 현천진인이 도움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당파를 재건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무당파가 되살아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서윤은 서량에게 직접 호북성을 다스리라는 특명을 받았다.

검장왕(劍將王) 주서윤.

속세의 사람들은 검장왕이 여인인 줄 몰랐다. 애초에 여인에게는 왕(王)이라는 칭호가 주어지지 않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검장왕은 무공이 지극히 뛰어난 무림인 출신이며, 무당파를 다시 세우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물론 주서윤이 호북성에서 벌어지는 일 하나하나를 실질적으로 관리하지는 못했다. 대신 그녀 밑에는 무수히 많은 관리가 있었고, 그 관리들을 공야치가 제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큰 결정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주서윤이 나섰다.

그녀는 생각보다 통치에 재능이 있었다. 공야치도 한 번씩 그녀의 혜안에 놀랐으며, 호북성은 예상보다 일 년은 더 빨리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중원의 모든 지역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빠르고 안정적인 치세였다. 그만큼 주서윤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나 제아무리 바쁘다 한들, 어찌 고향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주서윤은 서량이 보고 싶었다. 종리영이 보고 싶었고, 채여민이 보고 싶었다.

별다른 친분이 없는 구대마존은 물론 은퇴한 전대 대호법 무담까지도 보고 싶었다. 그녀는 신교를 이루는 돌벽 하나, 풀잎 하나도 그리워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냥 휙 하고 떠나 버리기에는, 제 어깨에 드리워진 짐이 너무나도 많네요. 이럴 때는 정말 사형이 원망스럽기도 해요.”

씁쓸하게 웃는 주서윤.

명학은 그런 주서윤이 안타까웠다.

화경에 이른 무공. 누구보다도 드높은 검의(劍意)를 깨우쳤지만, 그녀는 아직 서른도 안 된 젊은 여인이었다.

보통 그 나이면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거나, 아니면 더 많은 걸 배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서윤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 나이에 무공과 학문이 누구 못지않은 경지에 올랐으며, 심지어 호북성을 통치하고 있기도 했다.

아직 젊디젊은 사람에게는 이런 부담이 또 없을 것이다. 때로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 걱정 없이 놀고 싶기도 할 텐데, 그녀에게는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가만히 주서윤을 보던 명학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무당파는 충분합니다.”

“네?”

“검후께서 보시기엔 아직 미덥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희 도사들도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의 무당파는 몹시 안정적이며, 새로운 도동(道童)들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명학이 미소를 지었다.

“무당파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호북성은 공야 문주에게 맡기시지요. 잠시 어깨에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천하를 둘러보고 오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주서윤이 마주 웃었다.

“말씀만 들어도 달콤하네요. 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물론 호북 곳곳에 워낙 많은 일이 터지니만큼 검후께서 나서 주셔야 할 일도 많겠지만…….”

“수십 년간 검을 연마하신 분께서 호구가 찢어질 정도로 검을 연마하시는데, 제가 얼마나 고생했다고 천하를 둘러보러 가겠어요. 어림도 없죠.”

명학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허허, 이것은 제가 부족한 탓이지 제 노력이 깊은 게 아닙니다.”

주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말씀만 감사히 받을게요. 그나저나 어서 손부터 치료하세요. 내공이 원체 강하시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라도 덧나면 큰일입니다.”

“신체의 상처가 덧나는 거야 치료하면 그뿐이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가 덧나면 쉽게 치료가 안 되는 법입니다.”

“…….”

“걱정하지 마시고, 신교에 다녀오십시오.”

주서윤의 눈이 흔들렸다.

어지간하면 이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신교를 그리워하는지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주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안 되겠…….”

그때였다.

“뭐가 안 된단 말인가?”

순간 주서윤과 명학은 깜짝 놀랐다.

“허어, 무당산은 또 오랜만에 오는군. 과연 절경은 절경이야. 화려하진 않아도 이 신비로운 안개와 산세라…… 수십 년을 봐도 질리지 않을 경관이 아니던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비단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황홀한 얼굴로 산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산세는 이리 고즈넉하고 신비롭거늘 정작 이 산에 사는 여아(女兒)의 마음은 너무나도 혼탁하고 어지럽구나.”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런가?”

주서윤과 명학이 무릎을 꿇었다.

“태장왕 전하를 뵙습니다.”

“어이쿠, 그러지 말게.”

송금백이 혀를 찼다.

“도사야 그럴 수 있다지만, 자네는 나와 같은 왕일세. 누가 보면 내가 차기 황제라도 되는 줄 알겠네.”

주서윤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한데 여긴 갑자기 어쩐 일로……?”

“자네 보러 왔지.”

“저, 저를요?”

“그렇다네.”

같은 왕이라지만 애초에 친분은 없었던 두 사람이다. 어지간하면 송금백이 이리 찾아올 일이 없다는 뜻이다.

자연히 주서윤의 얼굴이 굳어졌다.

“혹, 황궁에 일이라도…….”

“아무 일 없네. 허허, 자네도 그간 힘들긴 했던 모양이군. 그리 놀라운 무공을 쌓고도 눈이 맑지가 않아.”

“아…….”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기도를 죽이지 않았네. 자네라면 내 기도를 읽을 수 있을 터인데, 영 반응이 없더군.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예까지 올라왔다네.”

“아, 그러셨군요.”

“그건 그렇고.”

송금백이 엄지로 남쪽을 가리켰다.

“별일 없으면 나랑 같이 신교나 가세.”

“네?!”

“아, 오해하지 말게. 나와 둘이서만 가는 건 아니니까. 저기 산 밑에 여강휘 궁주와 여상린 지부장도 있다네.”

“……!”

“물어볼 것도 있고, 그 김에 술이라도 한잔할까 싶어 찾아가는 길일세. 어떻게, 자네도 별일 없으면 함께 가는 게 어떤가?”

주서윤이 놀란 눈으로 송금백을 보았다.

그때, 명학이 입을 열었다.

“검후.”

주서윤이 명학에게 시선을 돌렸다.

명학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운명인가 봅니다. 가십시오.”

멍하니 명학을 보던 주서윤도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디 그래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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