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15)
“이런.”
언제나 바쁜 공야치였지만, 오늘만큼 급했던 적도 없었다.
정확히는 마음이 급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느닷없이 찾아온 네 남녀가 당대 중원에서도 비할 데 없는 명성을 쌓은 희대의 고수들이요, 황궁과 무림 양측에서 극강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태장왕 전하를 뵙습니다.”
“허허, 오랜만이구먼.”
“예. 그리고…….”
공야치가 웃으며 여강휘를 바라보았다.
“중원으로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궁주님. 다만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여강휘가 혀를 내둘렀다.
“한번 물어나 봅시다. 도대체 그 정보력, 어떻게 되어 먹은 겁니까?”
“업계 비밀입니다.”
“허허.”
여강휘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여상린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뵈어요.”
“여 지부장님.”
공야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빙상신녀(氷上神女)라는 명성이 예까지 자자하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아이참, 빙상신녀는 무슨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요. 여 지부장님께서 중원지부를 그리 크게 키우셨으니, 빙궁(氷)을 반석 위에(上) 올리신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여상린이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을 본 여강휘가 토악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공야치가 의아한 눈으로 주서윤을 보았다.
“검장왕 전하께서도 오셨군요?”
“그렇게 됐어요.”
“일이 있으시다면 서신을 보내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가 직접 찾아갔을 텐데요.”
주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업무차 온 게 아니라서요.”
“예?”
제아무리 똑똑한 공야치라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일단, 여기 앉으시지요.”
“그래 볼까?”
상석에 앉은 송금백이 코를 벌렁거렸다.
“다향이 무척 좋구먼. 이거, 내 기억이 맞다면 용정(龍井)인데?”
“그렇습니다.”
“팔자 폈구먼. 그 비싼 용정을 대접하다니 말이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 자리에 있다 보면 높은 사람을 대접해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아주 유용하지요.”
“지금처럼?”
“예, 지금처럼요.”
송금백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하오문 역사상 최고의 강골이자 독종에, 문무겸전의 천재라고 하더니만 보면 볼수록 보통이 아니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일세. 천마가 자네를 어찌 그리 총애했는지 알겠어.”
공야치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게는 지나치게 과분하신 분이었지요. 지금도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온갖 정보 조작으로 강호삼세를 쥐락펴락했던 하오문주답지 않게 왜 이러시나?”
공야치는 당황했다.
“쥐락펴락했다니요?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허허허, 괜찮네. 그저 장난삼아 한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송금백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간 황궁에만 있다가 중원에 나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무림의 마지막 전성기를 보낸 사람들이 함께 있어서 그런 건지, 그의 얼굴에는 한 점의 어두움도 보이지 않았다.
공야치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업무 관련 사항이 아니라면 어인 일로 예까지 직접 오셨습니까?”
주서윤이 송금백을 보았다.
“사실 저는 그냥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태장왕 전하께서 꼭 이곳을 들러야겠다고 하셨지요.”
“예?”
모두가 송금백을 바라보았다.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송금백이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원래는 그냥 우리끼리 가려고 했었네. 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네를 빼놓고 가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
“내 반쯤은 장난삼아 한 말이네만, 실제로 자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천마도 없었을 걸세. 어떻게 운이 좋아 지금의 무력을 쌓았을 순 있어도, 천마신교가 중원을 지배하는 상황까지는 오기 힘들었겠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할 필요 없네. 분명한 사실이니까. 아닌 말로, 하오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과거 철혈성이 그리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게야.”
과거의 철혈성을 논한다.
송금백에게 있어 철혈성은 고향이자 소속 문파였으며, 자신이 다스리던 나라이기도 했다. 당연히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지만, 정작 철혈성이 당했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만이 가득했다.
모든 번뇌를 떨쳐 버린 자, 무림 최강자로 손꼽히던 수라제 송금백의 그릇은 그렇게나 컸다.
“즉, 천마에게는 자네 역시 자주 보고 싶은 사람일 거란 말일세.”
공야치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음?!”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하면 지금, 네 분이서 천마신교로 가시는 중이었습니까?”
“넷이 아니지.”
여강휘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공야치를 가리켰다.
“다섯입니다.”
“컥!”
공야치가 사레들린 기침을 토해 냈다.
“저는…… 아, 아니 저도 그렇고 검장왕 전하께서도……?”
주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호북이 눈에 밟혀서 고민하긴 했어요.”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고민 엄청 짧더구만.”
“……어쨌든요.”
“크하핫!”
주서윤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잠시 휴가 냈다고 생각하고 오랜만에 천마신교에 가 보는 게 어떠세요?”
“……하하.”
공야치가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야 저도 가고 싶습니다만, 일이 여간 많은 게 아닙니다. 하물며 검장왕 전하께서 자리를 뜨신다면 더더욱 제가 이곳을 지켜야지요.”
“긴급활생(緊急活生) 대책은 어때요?”
“예에?!”
공야치가 입을 떡 벌렸다.
“다른 일도 아니고, 이런 일에 긴급활생 조치를 내린다고요?”
“……좀 그런가요.”
주서윤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여강휘가 물었다.
“긴급활생이 뭡니까?”
“만에 하나 검장왕 전하와 저 둘 중 한 명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리를 길게 비울 때, 휘하 관리들 만으로 호북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를 뜻합니다.”
“으응?”
“쉽게 말해서 ‘선조치 후보고’ 형태의 업무를 뜻합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수장들이 사라졌으니 휘하 관리들에게 더 엄중한 책임이 요구됩니다. 그에 따른 복잡한…….”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호북의 대표 관리들이 없을 때를 대비한 민생 안전 대책이란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면 되잖습니까?”
공야치가 입을 떡 벌렸다.
“긴급활생은 정말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면 써서는 안 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관리 체계의 혼란을……!”
그때, 송금백이 말했다.
“이 사람은 여 궁주 말에 동의하네.”
“태, 태장왕 전하.”
“긴급활생이라는 그 대책, 만들어 놓긴 했어도 지금껏 한 번도 써 보지 못했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면 지금 써 보면 되겠네. 휘하 관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험도 해 볼 겸.”
공야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민생 안전이 흔들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체계를 확인하자고 민생 안전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일을 감행할 순 없습니다.”
“그건 아니죠.”
주서윤의 말에 공야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절대적으로 자신이 있으니, 일 년 전에 그 대책을 마무리 지은 거잖아요?”
“커헉! 그, 그렇긴 하지만 이것은 종류가 다른 문제……!”
“말꼬리 잡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자신이 있어요. 민생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검장왕 전하.”
“또한, 우리가 호북 관리들의 대표긴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지나치게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라고 전에 말씀드렸죠?”
“……!”
“그래서 능력이 뛰어난 자보다 책임감 있고 성품이 좋은 관리들을 휘하에 둔 거고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 부분이 걸리긴 했어요. 하지만 저희가 언제까지나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순 없어요. 이번 기회에 긴급활생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도 할 겸, 한번 빠져 보는 건 어떠신가요?”
공야치가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되었든 호북의 주인은 주서윤이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거부하는 것은 수하 된 도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니까.’
그때 송금백이 슬쩍 끼어들었다.
“아닌 말로, 황실에서도 각 성의 우두머리들이 일정 기간 동안 타 지역의 정치와 민생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마련 중이라네. 관리들끼리의 교류도 될 수 있고, 서로 배울 수 있는 점은 배우도록 하는 것이지.”
“그, 그렇습니까?”
“뭐, 그 정책의 실효성 부문에 있어서는 여러모로 이견이 많네만, 세상 모든 정책은 양날의 검과 같은 법일세.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지.”
“으음.”
“이 기회에 다른 지역을 방문하며 견문을 더 넓혀 보는 것은 어떠한가? 호북을 이 정도로 안정시켜 놓았으니, 이제 현실에서 벗어나 미래도 봐야 하지 않겠나?”
송금백의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공야치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정히 그렇게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이번 천마신교 행에 저도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허, 잘 생각했네. 천마가 아주 좋아할 것이야.”
모두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전에.”
“으잉?”
“한 가지 일은 해결하고 가야겠습니다.”
공야치의 눈이 한순간 살벌하게 번뜩였다.
“이왕 이 자리에 중원을 대표하는 고수분들께서 와 계시니, 조금만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안 그래도 검장왕 전하께 오늘 보고를 올릴 예정이었습니다만.”
“어떤 일이기에?”
공야치가 공문 하나를 꺼내 주서윤에게 건넸다.
주서윤의 눈에서 살벌한 기운이 뿜어졌다.
“이것까지는 해결해 놓고 가야겠군요.”
* * *
“헉헉!”
호흡이 돌아오질 않는다.
‘이럴 수가.’
능적반의 눈이 흔들렸다.
‘일개 전투 부대의 대장이 저리 강하다니?!’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오 년 전, 중원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쟁이 끝나고도 능적반은 세상에 나설 수가 없었다. 이유인즉, 엄청나게 큰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철혈성의 상공을 뒤덮은 엄청난 범위의 뇌전과 불꽃을.
놀랍게도 그 뇌화(雷火)에는, 절대 섞일 수 없는 빙력(氷力)까지 담겨 있었다. 공존할 수 없는 기운이 합쳐져 대지를 휩쓸어 버린 마신의 무공은 그야말로 신(神)의 이능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신의 이능은, 도주하는 능적반도 피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거리가 한참 떨어졌기에 빙뢰의 위력 또한 많이 약해졌다는 것일까.
그 약해진 빙뢰 세 발을 맞고 사경을 헤맸다. 그리고 그때 입은 내상은 지금도 다 낫지 않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약해진 몸뚱이라도, 그는 과거 십대고수 중 일인으로 명성을 떨친 이였다. 소림 방장이 죽자고 덤벼도 이십 초 안에 죽일 자신이 있었다.
즉, 그와 싸운 전투 부대의 대장도 화경 혹은 극마에 오른 절대고수라는 뜻이었다.
‘망할 계집! 마교 놈들은 하나같이……!’
그때였다.
“호오.”
능적반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과연, 우리에게 왜 도움을 요청했는지 알겠어. 그리운 얼굴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쏟아지는 달빛 아래.
능적반은 다섯 명의 사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사신 무리의 중앙,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사납게 웃었다.
“오랜만일세, 명왕.”
능적반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송금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