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16)
“교주님.”
“…….”
“……?”
“…….”
“교주님?”
“흐으음.”
“교주님!”
“커헉! 뭐, 뭐야? 으잉? 자네 언제 왔나?”
“조금 전에요. 아니, 근데 밭에서 뭘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꽃 보고 있지.”
“……?”
“마치 천재지변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나약한 인간의 눈빛을 보는 듯하구먼. 내가 꽃 구경하는 게 그렇게 믿기 힘든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교주님과 꽃은 안 어울리거든요.”
“참나.”
“그런데 그 꽃은 뭡니까? 무슨 꽃이 그렇게 색색이…….”
“십색지화(十色祉花).”
“십색지화라면…… 설마 담사영이 키웠던 그 마물(魔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엉.”
“컥! 그 꽃을 마신궁 후원엔 왜 들이셨습니까? 아니, 종자는 어디서 구하셨대요?”
“이 사람아, 내가 천마신교의 교주야. 구하려면 황제 속곳도 구해.”
“그거야 황제한테 부탁하면 줄 거 아닙니까.”
“주겠지. 날 희대의 변태라고 욕하면서. 내 그 꼴은 죽어도 못 보지. 아니, 애초에 그런 더러운 건 필요치도 않아!”
“그런데 그걸 왜 키우고 계세요? 언제부터 키우셨습니까?”
“두어 달 됐지, 아마? 쓸 데가 있어서 말이야.”
“혹시 반란 세력이라도 찾으셨습니까? 아니면 누가 뒤에서 교주님 욕했어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반란 세력이 있으면 보자마자 다 작살냈겠지. 그리고 뭐, 신교의 교주를 욕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윗사람 욕하는 재미로들 사는 거지.”
“그러면 대체 그걸 왜 키우고 계시는 건데요?!”
“십색지화를 잘만 만지면 심장병에 탁월하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엉. 거의 뭐 만병통치약 수준으로 괜찮아진다고 하던데? 혈관에도 좋고.”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대요?”
“담사영한테.”
“……예?”
“물어보니까 줄줄 토해 내던데? 뭐, 지금은 완전히 맛이 갔어. 그 맛 간 것도 얼마 안 됐지만.”
“…….”
“새삼 대단하지 않나? 담사영의 그 정신력 말이야. 판마정의 시간은 제멋대로 흐르는지라 현실의 반 시진이 그곳에선 수년일 수도 있고, 일각이 찰나와 같을 수도 있어. 내가 놈을 가둔 곳은 그 정도로 시간의 흐름이 제멋대로인, 한없이 지옥 같은 곳이야.”
“예, 전에 들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계산해 보니, 놈은 삼백구십구 년을 버텼더군. 그러고도 용케 미치지 않더니, 이제야 완전히 맛이 가 버렸어.”
“어, 엄청나군요.”
“술력은 죄 뺏겼지만 그 술력을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정신력은 남아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궁금한데? 나도 한번 갇혀 볼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해. 적어도 그놈보단 오래 버티지 않겠어?”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킬킬킬.”
“그럼 지금 담사영은, 그 상상하기 힘든 공간에서 미쳐 버린 겁니까?”
“다시 제정신으로 돌려 놨어.”
“……!”
“그 정도론 모자라지 않겠나? 나 죽을 때까지 뺑뺑이 돌아야지.”
“…….”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나 원래 나쁜 사람이야.”
“압니다.”
“……막상 들으니 섭섭하군.”
“하긴, 그놈 하나 때문에 생지옥을 겪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듭니다. 억겁을 고통받아도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내 말이. 뭐…… 놈에 대한 내 분노는 진즉 사라져 버렸지만.”
“커험!”
“그래도 그놈은 당해도 싸더라고.”
“그렇긴 합니다. 그나저나, 담사영은 그렇다 치고 갑자기 심장병은 왜요?”
“원로원주 때문에.”
“……?!”
“그 양반, 본인도 모르고 있는 것 같더군. 하긴 아무도 몰랐겠지. 누구 하나라도 알았으면 진즉 혈혼각으로 보냈을 테니까.”
“그만한 고수가…… 심장병이 생길 수 있습니까?”
“보통은 그렇지 않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더라고. 게다가 그 양반 곧 백수(白壽)야. 그 나이에도 누구보다 바쁘게 지내고 있으니, 몸에 무리가 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그렇군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활기차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인생이란 게 그렇지. 평생 놀고 마셔도 백 살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강 챙겨 가면서 살아도 마흔 전에 죽는 사람도 많아.”
“그렇지요. 하면, 원로원주에게 귀띔이라도 해 주셨습니까?”
“아니.”
“그럴 줄 알았습니다만, 왜요?”
“그 사람 자존심 알잖아? 앞으로 이십 년은 더 현역으로 살겠다며 목에 힘주고 다니는 양반이야. 아랫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 절대 못 견딜 걸세.”
“으음.”
“원로원주는 본교의 역사야. 대우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해.”
“물론 그렇습니다. 그래도 의원에게 진찰이라도 한번 받아 보는 것이…….”
“이것까지 맥여 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보내자고. 그 사람 자존심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정도야. 괜히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네.”
“하긴, 교주님 말씀도 맞습니다. 한데 이리 들어 보니, 당장 위험한 수준은 아닌가 보군요?”
“엉, 그 정도는 아니야. 이 또한 노화라면 노화인지라, 당장 쓰러질 만한 병은 아니거든. 가만히 둬도 삼 년은 더 버틸 거야.”
“삼 년…….”
“다행히 십색지화의 구성 성분은 다 알아냈어. 뽑아야 할 독기도 적어 놨고. 빠르면 한 달, 늦어도 석 달 안에는 약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군.”
“다행입니다.”
“다행이지.”
“그래서 그간 마신궁을 그리 오래 비우셨던 것이로군요. 한번 떠나시면 몇 달씩 안 돌아오시더니요.”
“아, 그건 그냥 심심해서.”
“…….”
“여기저기 구경 좀 다녔어. 역시 세상은 넓더라고. 아주 멋진 경험을 했지 뭔가. 그렇게 쏘다녔는데도 들를 곳이 아직 많이 남았어. 나중에 천하가 더 안정되면, 새외랑 저기 서역에도 한번 가 볼까 봐.”
“…….”
“왜?”
“…….”
“아, 그렇게 좀 보지 마. 편히 쉬어도 되잖아, 이제!”
“휘하 교도들 고생하는 거 안 보이십니까?”
“거 뭐, 내가 대신해 줄 수도 없는걸.”
“컹! 정 그러실 거면 앞으로 저도 데리고 다니십시오.”
“어디서 개가 짖나. 자꾸 왈왈 소리가 나네.”
“왜요! 제가 같이 다니면 안 됩니까!”
“자네는 일해야지 가긴 어딜 가?”
“은퇴할 겁니다.”
“하지 마.”
“왜요!”
“안 돼, 하지 마. 본교의 총군사씩이나 되면서 은퇴는 얼어 죽을. 설렁설렁해도 좋으니까 평생 일해.”
“와, 진짜 너무하시네.”
“자네만 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 자네가 있으니까 내가 놀 수 있는 거란 말이야. 자네 은퇴하면 나도 못 놀아!”
“엄청나게 허탈한 이유네요.”
“허탈하다니? 그간 내가 얼마나 생고생을 했는데!”
“저도 생고생 많이 했거든요?! 그리고 제가 키우는 애들, 이제 다들 밥값 한단 말입니다!”
“고르고 고른 놈들인데 이제 겨우 밥값만 해? 더 해야지!”
“아, 피곤해.”
“클클클.”
“쳇. 됐고, 이거나 읽으세요.”
“또 뭔 일을 시키려고?”
“…….”
“읽을게, 읽을게. 사람 참, 손 좀 털자. 흙 범벅이다.”
“공무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번개가 따로 없으시네.”
“오호? 태장왕이랑 여씨 남매? 어라? 서윤이도 와?”
“거기에 공야 문주도 온답니다.”
“나 몰래 정기적으로 축제라도 여나? 갑자기 우르르 몰려오네?”
“교주님 뵈러 오는 거죠. 뭐, 태장왕은 아니겠지만.”
“잉? 그건 무슨 소리야?”
“제가 아프다는 소문을 냈거든요. 아마 그거 확인하러 오는 길에 다 끌고 오는 걸걸요.”
“자네 아파?”
“지나치게 건강해서 걱정입니다. 교주님께서 진짜 죽을 때까지 일 시키실까 봐 너무너무 두렵네요.”
“건강한데 왜 허위 정보를 풀었어?”
“중원 곳곳에 반역 세력이 은근히 있습니다. 저희 측 말고, 황궁을 노리는 세력이요.”
“호오.”
“그간 놈들의 움직임을 파악해 보니, 그치들이 계속 우리 눈치를 보고 있더라고요.”
“놈들을 솎아 내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다?”
“교주님께서 아프다고 소문낼 순 없잖아요. 하긴, 낸다 한들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마는.”
“그건 그렇지. 근데 자네 아프다는 소문을 낸다고 그치들이 움직이겠어?”
“예.”
“…….”
“그럴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소문도 낸 거죠. 잘하면 일망타진도 가능할 겁니다.”
“역시 대단하네.”
“저는 누구와는 달리 성실하게 일하고 있거든요.”
“동필이 이 새끼.”
“마 호위장 말고요!”
“그나저나, 서윤이랑 공야치도 오는 거면 호북은 어떻게 해?”
“알아서 돌아가도록 다 조치를 취해 놨겠죠. 그 두 사람이 그런 것도 생각 안 했겠습니까.”
“왠지 나 욕하는 것처럼 들리네.”
“찔리십니까?”
“됐거든. 아니, 그건 그렇고 능적반인가 뭔가 하는 송사리 새끼가 호북에서 암암리에 난리 치고 있다며? 그놈 작살내려고 마왕령까지 파견했잖아? 서윤이랑 공야치도 그거 아나?”
“알고 있을 겁니다.”
“흠, 그런데도 온다는 거 보면 다 해결된 건가?”
“아마 지금쯤 마왕령주가 잡아 죽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시잖아요? 마왕령주 실력.”
“알지. 그 미친년 그거,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네. 나는 걔가 진짜로 극마에 들 줄은 몰랐어.”
“앞으로 마왕령주라는 직책도 어중간한 강자에겐 못 맡기게 되었습니다. 위 령주가 마왕령 수준을 너무 높여 놨어요.”
“쓸데없이 열정적이네, 그 새끼. 예전부터 그렇게 하지, 쌍.”
“잘하고 있는 사람한테 왜 자꾸 욕을 하십니까?”
“얼레? 뭐야?”
“왜요, 또.”
“흐음.”
“왜 그러시냐고요.”
“자네 혹시 위 령주한테…….”
“아, 진짜 죽어 버리고 싶네.”
“낄낄낄.”
“여하간 당분간 별일 없으면 마신궁에서 지내세요. 간만에 교주님 얼굴 뵈러 온다는데, 안 계시면 다들 섭섭해할 거 아닙니까.”
“나 보러 왔는데 막상 내가 없으면, 그것도 나름 깜짝 선물 아닐까?”
“가끔 보면요, 교주님께선 정말 사람 가슴에 대못 박는 재능이 어마어마하게 출중하신 것 같습니다. 거의 신화경 뺨쳐요.”
“장난이야, 장난. 근데 재미있을 것 같긴 하지 않나?”
“안 보고 싶으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다들 너무 보고 싶지. 돌이켜 보면 시간이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어. 그때로부터 벌써 오 년이나 지났구먼.”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 근데 여 지부장은 몇 번 만나셨죠?”
“린이? 많이 만났지. 석 달에 한 번씩은 꼭 들렀어. 지부 여기저기도 좀 봐주고.”
“……호오.”
“왜.”
“생각해 보면 말입니다. 교주님께서 벌써 속세 나이로 이립을 넘기셨지 않았습니까?”
“이립은 무슨. 칠순을 코앞에 두고 있지.”
“예?”
“뭐, 그런 게 있어.”
“여하간 교주님께서도 슬슬 혼인을 생각해 보실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린이랑 혼인하라고?”
“공격적이시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 아니야?”
“뭐, 맞습니다. 솔직히 어딜 가도 그만한 사람이 없어요. 아시잖아요?”
“그렇긴 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는 겁니다, 그럼?”
“이봐, 근데 혼인이라는 게 말이야. 내가 원하는 시기에 하면 안 되는 건가? 때가 됐다고 해야 하는 거야?”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요. 만에 하나 여 지부장이 기다리다 지쳐서 다른 남자랑 가정 이루면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새삼 느끼는 건데, 성격 진짜 시원시원하십니다.”
“알았으니까 이제 가 봐. 십색지화 좀 더 살펴보게.”
“킁, 알겠습니다. 아, 근데 이따 밤에 시간 되십니까?”
“널널하기 그지없지. 심심할 수도 있어.”
“한잔하실랍니까?”
“술은 내가 준비해 둘 테니까 안주는 자네가 가져와.”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어, 일 열심히 해.”
“……후우.”
그렇게 호요성이 마신궁을 나섰다.
진지한 눈으로 십색지화를 살피던 서량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 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