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643화 (642/774)

643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18)

“음, 많이 나아졌구려.”

“아이쿠, 그렇습니까?”

“다만 아직도 잔열이 좀 있소이다. 현기증 나는 건 어떻소?”

“해가 지면 좀 띵하긴 합니다만,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자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벼운 병은 어지간하면 침과 약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이겨 내는 것이 좋소이다. 하지만 연세도 제법 있고 근래 드시는 것도 영 시원찮다고 하시니, 두통에 효과가 있는 약재와 보약을 드리겠소. 하루에 두 번씩 달여서 드시오.”

“아닙니다. 지금껏 받은 은혜만도 다 갚지 못할 것을…….”

“병을 가벼이 보지 마시구려. 그리고 은혜를 받으려 한 적도 없소이다. 그저 나중에 건강해지면, 근처 불당에 가서 시주나 좀 해 주시오.”

혜심이 웃으며 약봉을 건넸다.

“자, 별일 없으면 닷새 뒤에 봅시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환자를 보낸 혜심이 세필로 무언가를 적었다.

“그래도 많이 호전되어 다행이로군. 영양만 잘 보충하면 보름 내로 다 낫겠어.”

그가 적는 것은 환자 명부였다. 하루에도 찾아오는 환자들이 너무 많다 보니, 그들의 병세나 호전 정도를 일일이 적어 두지 않고서는 전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명부를 다 작성한 혜심이 입을 열었다.

“다음 환자분 들이게.”

그때, 문을 열고 혜광이 들어왔다.

“남은 환자분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 마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알았네. 슬슬 정리하세나.”

“알겠습니다, 사형.”

혜심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사형이란 소리는 그만해도 된다니까 그러네.”

“허허, 우리 모두 승적을 지웠다고는 하나 평생을 함께했거늘 호칭을 쉬이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이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십시오.”

“원, 사람 참.”

“밖을 정리하겠습니다. 정리하고 식사나 하시지요.”

“나는 주전부리를 집어 먹어 괜찮네. 자네들끼리 하시게.”

“허어, 그러다가 병나십니다.”

“떽! 그 정도로 약한 몸뚱이 아닐세. 잔소리는 그쯤 하고, 자네들이나 어서 가서 배를 채우게. 오늘도 고생이 많았어.”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혜광이 나가자 혜심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구먼.”

소림의 무상신공은 그의 몸 상태를 끊임없이 최고조로 유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 피로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힘든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받는 환자의 수가 너무 많았고, 그간 쌓인 피로 또한 만만치 않았던지라 천하의 혜심도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혜심은 침상에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잠시 후.

우우우웅.

그의 몸에 황금빛 서기가 어렸다.

그간 의술을 배우고 의학을 펼치면서 무공 수련은 딱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반야대능력의 경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혜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수련에만 힘쓴다고 성취가 느는 것은 아니지.’

소림의 무공은 불가 무학의 최고봉이다. 하나하나 신공절학이 아닌 게 없으며, 추구하는 바 역시 명확하다.

속세의 사람들은 소림 무공의 강력함만을 보았지만, 소림의 승려들은 신공의 깊이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신공의 깊이는 깨달음과 마음가짐, 그리고 무언가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자연스럽게 화경으로 접어들고 있구나.’

반야대능력이 아니라 다른 어떤 신공을 익혔어도 성취가 늘었을 것이다. 이유인즉, 그간 혜심이 살아온 삶은 또 하나의 수련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만일 무공의 성장을 위해 이러한 삶을 택했다면, 그 성취가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진지한 마음으로.

오로지 자비로운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고 그들을 치료하는 데에 힘을 쏟으니, 신공이 저절로 깨달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

‘인도(人道)란 곧 생도(生道)이고, 생도는 곧 불도(佛道)이며, 불도는 곧 무도(武道)와도 닿아 있는 법이니.’

무(武)란 생에 녹아 있는 법이었다. 생을 일심으로 잘 살아가면 자연스레 무도가 개화한다.

혜심은 어느덧 그러한 경지에 올라와 있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던 어른, 적송대사가 걸었던 길을 그 역시 비슷하게 걷고 있는 것이다.

스르르륵.

황금빛 찬란한 서기가 어느새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미소 짓던 혜심은 문득 드는 생각에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깨달음도 좋지만, 현실에 닥친 어려움도 생각해야 하거늘.”

현실이란 다른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돈이 너무 부족하구나.’

참으로 세속적인 걱정거리였다. 하지만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돈이 있어야 궁핍한 환자들을 도울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한 의술이나마 돈이 없으면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팔대호원의 수장들이 돌아가며 여기저기서 돈을 벌어 오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슬슬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내가 나선다고 뚜렷한 해결 방안이 나오지도 않을 터인데.’

사형제들이 돈을 벌어 오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바로 벌목과 사냥이었다. 제아무리 승적에서 이름을 지웠다지만, 수십 년간 불도를 닦은 그들이 나무를 베고 짐승을 사냥하는 것은 너무나도 께름칙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로 인해 불도(佛道)에서 더 멀어진다 한들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슬슬 결정할 때가 되었다.’

혜심은 인근 상단이나 부호들에게 직접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이 혜심을 도와줄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도와줄 것이었다면 진즉에 도왔을 것이고, 혜심 역시 자신을 소림의 전대 방장이라고 소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간 모아 둔 돈이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환자들을 치료하기는커녕 그들도 굶어 죽게 생겼다.

‘구해 보고 또 구해 보는 수밖에.’

사실 그들 정도의 고강한 무공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돈을 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도둑질이라든지.

하지만 그건 정말 할 짓이 아니었다. 불도를 닦아서가 아니라, 양심상 차마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혜심이 탄식을 토로했다.

‘그들에게도 미안하구나.’

돈 많은 상단, 그리고 부호들.

돈이 많은 건 죄가 아니다. 또한, 가진 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풀지 않는 것 역시 죄가 아니다. 그 돈은 그들의 소유물이니, 그 돈을 어떻게 할지 역시 온전히 그들의 마음이었다.

그러니 그걸 억지로 내놓으라고, 왜 돕지 않느냐고 따지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혜심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부탁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서 미안했다.

‘이미 죄 많은 몸, 염치없지만 그렇게라도 해 보자.’

그때였다.

‘……?!’

혜심의 동공이 무섭게 확장되었다.

“혜광 사제.”

창가에서 혜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사형.”

“손님이 오실 모양일세. 막지 말고 안으로 들이시게나.”

“손님이요?”

“기다리면 알 걸세.”

잠시 후.

“헉!”

“다, 당신은?!”

창밖에서 사제들의 경악성이 들려왔다.

혜심이 눈을 감았다.

‘굉장한 강자들이로고.’

굉장하고, 또 굉장하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들의 느닷없는 등장에는 놀랐지만, 이미 그들 개개인의 기운을 접한 적이 있기에 또한 놀랍지 않았다.

“사형.”

“들이시게.”

“예.”

끼이익.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혜심이 눈을 떴다.

“오랜만이로군.”

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중년의 사내.

뒷짐을 진 채 미소 짓는 그 얼굴에 여유와 편안함이 묻어 나왔다. 자신의 힘과 지위에서 나오는 여유가 아니라, 번뇌를 씻어 낸 자의 안온한 미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혜심이 오체투지했다.

“태장왕 전하를 뵙습니다.”

“어허, 그러지 말게나. 내 폐하의 은총 덕에 왕 소리를 듣고 있긴 하지만, 중원 제일의 활불(活佛)에 비할 바는 아닐세.”

“허허,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활불이라니요.”

“활불이지. 지닌바 무공이 능히 천하에 이르렀음인데, 그 강력한 무공과 지난 인연을 전부 내려놓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힘쓰고 있어. 그런 자네가 활불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저 부처 흉내나 내는 속인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일단 일어나게.”

“알겠습니다.”

“여기 앉아도 되겠는가? 보아하니 환자석인 듯한데.”

“물론입니다.”

“하면 잠시 실례하겠네.”

그렇게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밖에 일행이 있네. 자네가 만나 본 사람들도 많지.”

“알고 있습니다.”

“괜스레 우르르 들어오면 부담스러울 듯하여 대표로 내가 왔네.”

“허허, 무엇이 부담스럽겠습니까. 다만 방이 좁으니, 제가 민망할 따름입니다.”

“민망은 무슨.”

송금백이 방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조촐하긴 하구만. 자네들이 지었는가?”

“그렇습니다.”

“약 향도 은은하게 도는 것이, 방은 작아도 확실히 의원이 거하는 곳 같긴 하네.”

“허허.”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송금백이 품에서 전낭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받으시게.”

“이것이 무엇입니까?”

“금자 스무 냥과 이런저런 보석을 넣었네. 대충 처분해도 금으로 만 냥은 될 것이야.”

혜심의 눈이 흔들렸다.

“전하.”

“왠지 이럴 것 같았네. 자네들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돈에 쪼들릴 거라 생각했지. 그렇다고 자네들이 도둑질을 하거나 강도짓을 저지를 것도 아니잖은가? 기껏해야 근처 상단이나 부호들에게 부탁이나 해 보겠지.”

“……허허허.”

“당분간은 이것으로 어느 정도의 자금난은 막을 수 있을 걸세. 더 해 주지 못함이 미안할 뿐이야.”

“아닙니다. 갚지 못할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허허.”

송금백이 창가를 힐끔거렸다.

“자네 사제들도 의술을 익혔는가?”

“다 같이 익혔습니다. 다만, 사제들보다는 제가 조금 낫기에 주로 제가 환자들을 보고 있지요.”

“그렇구먼.”

송금백이 입맛을 다셨다.

“가는 길에 근처 관청에 들러 얘기를 해 두겠네. 굳이 이곳만이 아니라, 호남성 전체에 돈 없는 병자들을 위해 조치를 취해 두라고 말일세.”

혜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전낭을 받았을 때보다 열 배는 더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음.”

잠시 망설이던 송금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실, 자네를 데리고 갈 곳이 있었네만, 상황을 보니 그러기도 힘들겠군. 훗날 기회가 있으면, 그때 또 만나세나.”

혜심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교에는 작년에 한 번 들렀습니다.”

송금백은 깜짝 놀랐다.

“신교로 향할 것이란 걸 어찌 알았는가? 혹, 그새 타심통(他心通)이라도 익혔는가?”

“허허, 그럴 리가요. 그저 그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신통방통하구먼.”

송금백이 웃으며 말했다.

“함께하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여길 들르기 잘했군.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면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겠네.”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닐세. 진즉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오히려 직무를 유기한 것 같아 내가 다 민망할 뿐이야.”

송금백이 몸을 돌렸다.

“나중에 보세.”

“살펴 가십시오.”

송금백이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여섯 개의 기척이 사라졌다.

혜심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혜광 사제!”

“예, 사형.”

“우리 돈 생겼다네!”

정말이지 생기 넘치는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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