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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644화 (643/774)

644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19)

여상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몹시 기품 있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어딘지 모르게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외모만 보면 아직 방년에도 이르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어린 처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풍기고 있는 자연스러운 성숙미, 출중한 기품과 지혜로운 눈동자는 어린 나이에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여인이 입을 열었다.

웃는 얼굴로, 차분한 목소리로.

“언니.”

“커헉!”

여상린은 자신도 모르게 가래 끓는 소리를 뱉었다.

여인, 앵화가 무안한 듯 말했다.

“죄송해요. 공사가 다망해서 한 번도 찾아가질 못했어요. 언니가 중원에 계신다는 거,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요.”

“그, 그래?”

“그래도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뵈니 기뻐요.”

보통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면 미안하다는 소리 이전에 호들갑부터 떨기 마련이다.

하지만 앵화는 그러지 않았다. 강서상회의 최고 실세로서, 중원 상권의 절반을 조종하는 초거대 상인으로서 수년 동안 온갖 경험을 쌓은 그녀였다.

이제는 기쁨보다 미안함을 먼저 건넬 줄 알고, 입보다는 귀를 열 줄 아는 뛰어난 사람이 되었다. 앵화의 그런 크나큰 변화에, 여상린은 새삼 세상이 격변했음을, 세월의 흐름이 파도와도 같음을 실감했다.

“나도 네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쁘구나.”

“고마워요.”

“그리고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 나도 먼저 찾아올 수 있었는데, 괜스레 바쁘다는 핑계로 못 온 것 같아서 면목이 없어.”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헤헤, 그나저나 우리 앵화 정말 엄청나게 컸구나! 이제는 정말이지 말쑥한 처녀가 되었어!”

“……언니랑 저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요.”

“그랬나? 하지만 내 기억 속 앵화는 언제나 어리고 수줍은 소녀였는걸.”

앵화는 그저 포근하게 웃어 보였다.

여상린은 그런 앵화의 변화에 놀라움과 대견함, 그리고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변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일이긴 하지.’

하긴, 어디 상계(商界) 쪽 일만 그러겠는가. 세상 모든 업종이 그렇다. 그 업계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선, 그리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천성마저도 제어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 걸 보면 앵화가 나보다 낫긴 낫네.’

여상린이 웃으며 말했다.

“기별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이렇게 뵙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헷, 그렇게 생각해 주면 다행이고.”

“정말이에요.”

“알겠어, 요 녀석아. 그나저나, 요즘도 엄청 바쁘지?”

앵화가 볼을 긁적였다.

“조금 그래요. 사실 저희 쪽 일이라는 게 안 바쁜 날이 없긴 하지만요.”

“하긴, 그도 그렇겠다. 말이 중원 상권의 절반을 지배하는 상단이지, 단일 상단으로는 전무후무한 조직이잖아.”

“그래도 이번 해는 수해 지원도 끝났고, 마무리도 잘 돼서요. 그나마 한시름 놨어요.”

“수해 지원이라니?”

“아, 호북 쪽에 매년 홍수가 잦잖아요? 그 수재민들을 매해 지원하고 있거든요. 다행히 이번에는 나름 대비를 철저히 해서 큰 피해는 없었는데, 그래도 수만 명이 생계에 곤란함을 겪고 있답니다.”

“헐, 그걸 강서상회에서 지원하는 거야?”

“네. 물론 대외적으로 알리진 않고요. 뭐, 암암리에 저희가 손을 쓰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긴 했지만요.”

여상린은 혀를 내둘렀다.

대놓고 알리지 않는 대신, 강서상회가 돈을 풀었다는 소문을 흘린단다.

때로는 직접적인 도움보다 은근슬쩍 퍼트린 소문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때가 있다. 만일 수년간 이런 일을 반복했다면, 강서상회를 보는 민중의 눈은 몹시 호의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저 소문이기 때문에, 설령 강서상회가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별 부담을 느끼지 않겠지. 또한, 제아무리 함께 걷는 동지라지만 황궁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을 터, 황궁의 불편한 시선을 완화해 주는 역할도 할 수 있어.’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전략이었다. 물론 그 적당한 소문을 내기 위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겠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네가 생각해 낸 거야?”

“네?”

“소문으로 강서상회의 존재감을 안개처럼 흐리게 만든 것 말이야.”

앵화는 그저 웃어만 보였다.

무언의 웃음은 긍정을 의미한다. 여상린은 앵화가 정녕 크게 달라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변한 것은 내 눈일지도 몰라.’

앵화는 변덕스러운 서량을 주인으로 모시며 온갖 눈치를 보았다.

사실 말이 눈치지, 서량이 원하는 것을 한발 앞서 준비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량은 다른 후계 후보들보다 유독 전략과 전술에 능했다.

앵화는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하나하나 지켜본 사람이었다. 보고 배우는 것이 많았으리라.

“그래, 어쨌든 잘 굴리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헤헤.”

“그나저나, 바쁘기는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 지나갔다고 했지?”

“네, 그렇죠.”

“그럼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야?”

앵화가 웃으며 말했다.

“신교로 가시게요?”

“헛! 그걸 어떻게 알았어?!”

“태장왕 전하와 검장왕 전하, 거기에 공야 문주님과 마왕령주님까지 함께하고 계시잖아요.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죠.”

“아무리 그래도 정보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정보가 생명이잖아요, 저희한테는.”

“허허.”

여상린은 혀를 내둘렀다.

“맞아,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서 신교에 가려고. 괜찮으면 앵화 너도 같이 갈래?”

앵화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두 달 전에 다녀왔어요.”

“헐? 그래? 생각보다 자주 들르나 보다?”

“어지간한 일은 서신으로 주고받지만, 중요한 안건 같은 경우에는 제가 직접 가서 결재를 받거든요. 해마다 네다섯 번은 오가는 것 같아요.”

“그, 그래?”

여상린은 대놓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물끄러미 여상린을 보던 앵화가 풋 하고 웃었다.

“하지만 언니 말마따나 바쁜 건 좀 지나갔으니, 같이 가실까요?”

여상린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럴까! 이번에는 업무가 아니라 그냥 놀러 가는 걸로?”

“물론이죠.”

“푸하핫!”

여상린이 앵화를 냅다 끌어안았다.

“가자!”

“흐음.”

“어찌 그러십니까?”

“음? 허허, 아닐세. 인기척이 하나 늘어난 것 같아서 말이야.”

종리산이 희미하게 웃었다.

“대단하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군요.”

“허허, 이 사람아. 내 그래도 한때나마 천하제일을 논하던 사람이었다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송금백이 웃으며 물었다.

“아직 진전이 없으신가?”

“그렇습니다.”

“화경이나 극마나, 결국 한 단계 더 치고 올라가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창의성, 그리고 천운이 필요한 법일세. 내 이리 보기에 자네의 노력은 부족하지 않은 듯하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걸세.”

종리산이 고개를 저었다.

“극마에 오른다면야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요. 하나, 이제는 그러한 집착도 내려놓았습니다.”

“어허, 이 사람. 마공을 익힌 자가 어찌 집착을 내려놓는가. 더 큰 욕망을 품고, 더 이 악물고 달려 나가도 모자랄 판에.”

“허허, 극마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천성이 그러한 집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이만한 노력과 집착을 쏟아 봤으면, 이제는 편하게 가문이나 관리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허! 마인이 집착을 버렸다…….”

가만히 종리산을 보던 송금백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들 마인들은 참으로 신기하네. 규정된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이 없어. 생각해 보면 천마도 그랬고, 구대마존이나 마동필 호위장도 그러했지.”

마도칠가(魔道七家)는 천마신교를 떠받드는 마도 무림의 일곱 가문이었다.

그들 하나하나의 힘은 정파 무림의 멸망한 오대세가에 필적할 정도였다. 하지만 제각기 세력을 구축하던 그들과는 달리, 마도칠가는 전부 철저하게 신교에 복종했다.

과거, 서량과 한 차례 갈등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것은 비단 거경가만이 아니라 거의 칠가 모두와 싸움이 있었다고 하였다.

‘믿기지 않는군.’

종리산을 보면, 도무지 반역을 저지를 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태장왕이라는 신분으로 황궁에 거하고 있지만, 그 직전에 송금백은 종리산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거경가가 마도칠가의 맹주 격 역할을 하는지라, 한번 봐 두면 좋겠다 싶어 술자리를 함께했던 적이 있었더랬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송금백은 종리산이 마음에 들었다. 그처럼 진중하고 신중하며, 결단을 내릴 때는 단호한 사람이 세상에는 흔치 않았다.

“그나저나, 자네 아들은 어디에 있는가? 내 듣기로 한창 공부 중이라고 들었네만.”

“허허, 공부라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저보다 훨씬 뛰어난 녀석이라서요. 근 몇 년 안에 가주직을 이양할까 싶습니다.”

“가주직을 이양한다고? 허! 자네 아들, 약관을 넘긴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이십 대 청년에게 이리 큰 가문을 맡긴다라…….”

송금백의 얼굴에 부러움이 일었다.

“대단하네. 자네가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것은 다 그만한 능력이 된다는 뜻일 터, 후계자 교육 하나는 제대로 시킨 모양이야.”

“제가 가르친 것은 없습니다. 제 놈이 알아서 잘 컸지요.”

“사자도 새끼 때는 무력하기 마련일세. 부모에게 사냥하는 법을 배워야 비로소 그 재능이 개화하는 것이지.”

“그 사냥법을 교주님께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런가?”

“예. 물론 교주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지요. 사내는 세상에 나가야 어른이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싶습니다.”

“허허, 그렇기야 하지.”

송금백의 눈이 아련해졌다.

그 역시 제자가 있었다. 과거, 심마에 들어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던 사고뭉치 제자 놈이.

다행히 정신을 차린 녀석은 황궁 수비대의 대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했지만, 지금은 마음을 잡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어차피 무림이 사라지고 천하가 하나로 통일된다지만, 그래도 이들이 부러운 것은 나 역시 아직은 무림인이라는 뜻이겠지.’

송금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내, 여러 사람과 함께 천마신교에 가 볼 생각일세. 간만에 교주 얼굴도 보고, 술이나 한잔 나눌까 싶어서 말이야.”

“그러셨군요.”

“어떤가? 자네도 함께 가시겠는가?”

종리산이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아들놈을 신교로 보냈습니다. 녀석이 있다면 모를까, 없는 와중에 저마저 자리를 비우면 안 될 듯싶습니다.”

“허어, 그렇구먼.”

“신교에서 볼일 다 보시고 시간이 조금 남으면, 그때 한번 들러 주십시오. 제가 좋은 술을 대접하겠습니다.”

송금백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술이라면 절대 마다하지 않지. 그 약속, 꼭 지켜야 하네.”

“물론입니다. 한데, 더 데려갈 사람이 있으신지요?”

“음, 이제 슬슬 신교로 곧장 가 볼 생각일세. 왜? 따로 보낼 사람이라도 있는가?”

“보낼 사람이라기보다는, 마침 이 근처에 업무상 나온 사람이 있어서요.”

“누구?”

종리산이 미소를 지었다.

“당대 마도제일검객이 십여 리 밖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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