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21)
“호오.”
송금백이 찬탄을 내뱉었다.
“언제 봐도 참 잘 만들었어. 그렇지 않은가?”
천마신교의 외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인간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신인(神人)이 아닌 이상 누구도 이곳을 뚫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현재 천마신교의 영역은 전보다 훨씬 넓어진 상황이었다. 신교의 가족들을 거두기 위해 수십 리에 걸친 성벽을 쌓는 중인데, 거의 작은 나라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공야치가 말했다.
“아시겠지만, 과거 철혈성의 영역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교주님께서 철혈성을 보시고 크게 감탄하셨더랬지요.”
“그 얘기는 들었네.”
송금백의 얼굴에 아련함이 드리워졌다.
“철혈성이라…….”
기분이 씁쓸하면서도 새로웠다. 천하의 진정한 주인이 거하는 곳에서 과거 철혈성의 잔재를 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외성을 보는 주서윤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고향은, 예전 그대로인 동시에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동생.”
“네?”
여상린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정말 많이 변했다. 그렇지?”
앵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저는 몇 번씩 오가서 그런지 잘 모르겠네요. 하긴, 신교의 영역이 넓어졌으니 그 부분은 많이 변했지요.”
“허어, 허어!”
여상린은 마치 수염을 잔뜩 기른 노강호처럼 턱을 쓰다듬었다.
“오라버니, 우리 빙궁도 영역 확장 좀 하는 게 어때요?”
“아서라. 안 그래도 쪼들리는 예산에 무슨.”
“제가 잘 벌어다 주고 있잖아요.”
“사람들 복지에 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야,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중원지부에서 뭐 얼마나 보낸다고?”
“헐?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서운하죠.”
“말이 안 되는 말을 하잖느냐.”
“컹!”
말은 그렇게 해도 여강휘 역시 신교의 영역 확장이 부러운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위홍련이 손뼉을 쳤다.
“자, 이만 들어가 볼까요?”
“허허, 그러세나.”
그녀가 수문위사에게 다가갔다.
수문위사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신분을 밝히십시오.”
“마왕령주 위홍련. 패는 여기.”
그제야 수문위사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절차가 엄격해야 한다고는 해도 이 변화는 제법 심했다. 신교가 그간 수문위사들을 어떻게 교육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마왕령주님, 확인되었습니다. 한데 뒤에 분들은?”
위홍련이 손으로 한 명, 한 명 가리키며 소개했다.
“여기는 태장왕 전하. 전(前) 철혈성주시지. 그리고 이쪽은 검장왕 전하. 전(前) 오공녀이자 교주님의 사매야. 여기는 알지? 강서상회의 숨은 실세님.”
“아!”
“그리고 이쪽은 공야치라고, 하오문주이자 호북성의 실질적인 이인자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이 두 사람은 빙궁주와 중원지부장.”
수문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상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좋아.”
쿠구구궁.
외성 성문이 열렸다.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활기차군.”
외성 안쪽에서부터 느껴지는 생생한 생명력이 실로 맑고 기운찼다. 살벌한 마기와 밝은 기운이 공존한다. 그만큼 신교에서 살아가는 마인들의 삶이 괜찮다는 뜻이리라.
“자, 가시지요.”
위홍련이 일행을 끌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와아.”
주서윤이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여상린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감탄하실 게 있어요?”
“물론이죠.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잖아요.”
“그 정도로 변화가 큰가요? 물론 제가 보기에도 꽤 바뀐 구석이 있긴 하지만요.”
주서윤의 눈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언제나 신교로 돌아오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이번에 왔다 가면,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요.”
“…….”
“하나하나 전부 눈에 담고 싶어요.”
여상린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이번에 나가면 또 언제 올지 모른다. 그 말이 괜스레 여상린을 감상에 젖게 했다. 그녀 역시 중원지부를 맡은 이후 빙궁에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능력 있는 자의 숙명이랄까.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때로는 불쑥불쑥 고향이 그립기도 했다.
‘물론 검장왕 전하만큼은 아니지만.’
문득 여상린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네. 어쩌면 검장왕 전하의 모습이야말로 내내 고향을 그리워하던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인지도 몰라.’
사람마다 성정이 다르다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만큼은 다들 비슷할 것이다.
한데도 그녀는 빙궁 생각이 그리 많이 나지는 않았다. 그만큼 바쁘기도 했으나, 그건 주서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여상린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빙궁보다 중원을 더 내 집처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중원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원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중원이라.’
여상린은 과거를 떠올렸다.
서량과 마동필, 앵화와 함께 중원을 횡단하며 온갖 판을 벌였던 그때의 기억을.
‘정말 위험했고, 그만큼 재미있었지.’
그때, 위홍련이 송금백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태장왕 전하.”
“음?”
“마 호위장은 같이 안 온다고 하던가요? 그 양반, 지금쯤 맡은 일도 다 끝났을 텐데?”
“아, 마 호위장 말인가? 안 그래도 직접 찾아가 봤지. 거경가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임무 수행 중이라고 해서.”
“그래서 그 양반이 뭐래요? 오겠대요?”
“하루 늦게 출발한다고 했네. 아직 마무리 짓지 않은 일이 있다고.”
“헤에, 그렇군요.”
위홍련의 얼굴에 살벌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어쩌면 이미 내성에 들어와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 양반 신법, 보통 빠른 게 아니라서요.”
“그럴 수도 있겠지. 우리라고 황급하게 달려온 건 아니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복수전 해야지.”
“엥? 복수전이라니?”
“극마에 오르고 나서 마 호위장하고 비무를 많이 벌였거든요.”
송금백의 얼굴에 짙은 흥미가 일었다.
“그래서? 전적은?”
위홍련의 얼굴이 곧장 일그러졌다.
“칠십이 전 칠십이 패 무승이요.”
“허허.”
“아, 처음 만났을 때는 진짜 한판 붙어 볼 만했거든요? 그런데 도대체 무슨 영약을 그리 처먹었기에 내공이 줄지를 않으며, 어떤 검법을 익혔길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공격이 들어오는지. 진짜 비참하더라니까요.”
“그게 뭐 영약이나 검법의 차이겠는가. 아직 자네가 마 호위장 실력에 도달하지 못한 것뿐이지.”
“진실로 비수 찌르기 있습니까?”
“현실에서 눈 돌리지 말게. 안 좋은 버릇이야.”
“킁.”
“그래도 그것 참 장관이었겠군. 극마의 고수끼리 무려 일흔두 번이나 대결을 벌였다…… 구경이나 한번 하고 싶어.”
“며칠 머물다 가실 거 아닙니까? 그사이에 한 판은 붙겠지요. 관전하세요.”
“허! 그래도 되나?”
“설마 태장왕 전하 정도 되는 실력자가 우리 무공 좀 본다고 뭐 훔쳐 갈 거나 있겠어요?”
태장왕 전하 정도 되는 실력자란다. 존칭은 뭐 하러 붙였나 싶을 정도의 말버릇이었다.
송금백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삼류 무사의 칼질에서도 배울 점이 있는 법이거늘, 자네들만 한 고수들의 대결이라면 많은 걸 배울 수 있겠지.”
“헤에.”
“기대하고 있겠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모쪼록 이번에는 이기길 기도하겠네.”
“그럴 리가 없다니요!”
“알잖아, 자네도?”
“쳇.”
그렇게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일행이 어느새 내성 성문에 다다랐다.
순간 일행은 깜짝 놀랐다.
“다들 오랜만에 뵙는군요.”
놀랍게도 내성 성문에는 호요성이 미리 나와 있었다.
위홍련의 얼굴이 밝아졌다.
“총군사님!”
“하핫, 위 령주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물론이죠.”
“명왕을 잡았다는 보고, 잘 받았습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그거 뭐 제가 했나요? 이분들 덕이지요.”
“하하하.”
두 사람은 생각보다 화기애애해 보였다. 심지어 위홍련은 그녀답지 않게 몸을 배배 꼬는 것이, 분위기가 영 묘했다.
호요성이 송금백을 보았다.
“태장왕 전하.”
그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 앞에서도 절을 올리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천마신교의 마인이었다. 그들이 모시는 사람은 오직 교주뿐, 속세의 왕이나 황제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호요성은 과거 황제 앞에서도 절을 올리지 않았다. 그 두뇌만큼이나 배포가 큰 그였다.
송금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보는구먼.”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인사하기에 앞서, 질문 하나만 하겠네.”
“저 안 아픕니다.”
“……허허. 알겠네.”
“오해하실 것 같긴 했습니다. 사전에 말씀드리지 않은 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걸 알아보러 온 길이긴 하지만, 사실 다 핑계에 불과했네. 나도 간만에 중원의 공기를 맡아 보고 싶어서 말이야.”
“하하,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그나저나, 아프지도 않으면서 어찌 그런 소문을 냈나? 은퇴라도 할 생각인가?”
호요성의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은퇴를 하고 싶어도 허가가 안 떨어집니다. 죽을 때까지 일만 해야 할 운명인가 봅니다.”
“허허허!”
“황궁을 노리는 모종의 세력이 있습니다. 반역 세력이라면 반역 세력인데, 그들이 본교의 눈치를 살피고 있어서 말이지요.”
순간 송금백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반역 세력?”
“예. 그들의 움직임을 보려고 꾸며 낸 소문입니다.”
“그런 놈들이 있었단 말인가?”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짜 위험했으면 먼저 말씀드렸을 테니까요. 저희 선에서 정리할 수 있으니, 마음 놓고 쉬시면 됩니다.”
“으음.”
“진짭니다.”
물끄러미 호요성을 보던 송금백이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그 거짓말, 믿어 주겠네.”
옆에서 위홍련이 툴툴거렸다.
“진짜라면 진짜인 줄 아시지, 거참.”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은근슬쩍 제 사람을 챙기는 위홍련의 모습이 귀여웠던 것이다.
“알았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 들어 보자고.”
“물론입니다.”
호요성이 주서윤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다가간 그가 주서윤의 양손을 살며시 잡았다.
“오공녀님.”
주서윤은 순간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타지에서는 자신을 검장왕이니, 검후니 하는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요성은 자신을 오공녀라고 불러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총군사님.”
“하하, 그새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아니에요.”
송금백은 어쩐지 위홍련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호요성이 웃으며 말했다.
“이왕 오신 김에 오래 쉬다가 가십시오. 다시 가셔도 한 번씩 놀러 오시고요.”
“감사해요.”
“감사는요, 무슨.”
주서윤의 손을 놓은 호요성이 앵화를 보았다.
앵화가 고개를 숙였다.
“총군사님.”
호요성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부회주님께서는 하실 일이 있으시지요?”
앵화가 씨익 웃었다.
“물론이죠. 저 먼저 들어갈게요.”
“하하하! 역시 똑똑하십니다.”
“헤헤.”
앵화가 먼저 내성 안으로 향했다.
호요성이 여씨 남매에게 시선을 돌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궁주님. 그리고 지부장님도.”
“오랜만입니다.”
“오래 쉬다가 가십시오. 편안하게, 내 집처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하,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지요.”
호요성이 손으로 내성을 가리켰다.
“자, 들어가시지요. 교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