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7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22)
마신궁으로 들어온 일행은 화려한 대전을 지나 우측 회랑으로 향했다.
주서윤이 미소를 지었다.
“다른 곳은 많이 달라졌는데, 마신궁만큼은 예전 그대로네요.”
“물론입니다. 사실 신교 내부 여기저기를 뜯어고치면서 마신궁에도 좀 변화를 주려고 했는데, 교주님께서 단칼에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요?”
“예. 하긴, 제가 좀 주제넘기는 했지요. 교주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영역입니다.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이 신전(神殿)에, 어쩌면 앞으로도 보수는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꽤 독특한 관점이었다. 주서윤과 위홍련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마인의 사고였다.
후우우웅.
길쭉하게 이어진 회랑 끝에서부터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광동성은 지리상 가을에도 더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회랑 끝에서 불어오는 뭔가 달랐다. 강한 습도와 더위로 유명한 광동성의 바람답지도, 흔히들 생각하는 가을의 서늘한 바람답지도 않았다.
여상린의 눈이 커졌다.
‘봄바람 같다.’
따뜻했다.
기분 좋은 따스함과 더불어, 너무나도 은은하여 신경 쓰지 않으면 못 맡을 정도의 꽃향기가 배어 있었다.
그렇게 일행이 마음에 여유를 안겨 주는 바람에 취해 있을 때였다.
“굉장하군.”
느닷없는 송금백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감탄, 평온함이 뒤섞인 묘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당대 천하에 누가 있어 서 교주의 무공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나 역시 포함되는바, 지난 오 년간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했다고 생각했건만, 어째 교주와의 격차가 훨씬 더 벌어진 것 같네.”
여강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느껴지십니까? 서 교주님의 수준이?”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다만…….”
송금백이 고개를 저었다.
“과거,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와는 또 달라졌군. 설마하니 서 교주가 자신의 무공을 포기했을 리는 없으니, 그때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교주님께서는 언제나 위를 올려다보시는 분이지요.”
그렇게 일행이 회랑을 통과했다.
사각.
어느새 세상이 바뀌었다.
기화요초 만발한 마신궁의 후원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습도는 적당했고, 바람은 따스했다. 그리 맑지 않은 날씨임에도 세상이 밝아 보이는 것은 이곳의 광경과 날씨가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일행은 볼 수 있었다.
정자 옆, 작은 화단에 쪼그려 앉아 꽃 한 송이를 어루만지고 있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를.
“아이고, 허리야. 노친네들이 하나같이 말년에 꽃을 키우더니만, 도대체 이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군.”
허리를 토닥이며 일어나는 사내.
사내의 체격은 몹시 컸다. 어지간한 장정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키, 거의 칠 척에 다다른 장신은 드넓은 중원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떡 벌어진 어깨와 지극히 탄탄하게 단련된 육체 덕에 전혀 부조화하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딱 맞는 키, 딱 맞는 골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조화로운 육체. 전신에서 뿜어내는 존재감은 놀랍도록 대단하면서도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는다.
펄럭!
곤룡포가 바람에 펄럭였다.
사내, 서량이 몸을 돌려 일행을 보았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여어, 다들 오랜만이구만?”
참으로 그다운 한마디.
지난 오 년 동안 무공의 성취는 더 늘었을지 몰라도, 외양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마치 세월의 흐름을 거부하기라도 한 듯, 오히려 과거보다 더 젊어진 듯한 외모가 일행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달랐다.
오 년 만에 보는 서량의 눈빛은, 과거의 그와는 또 다른 깊이를 자아내고 있었다. 신체와 피부는 예전보다 더 어려졌을지 몰라도, 두 눈에 깃든 지혜와 총기는 그때보다 훨씬 더 깊고 맑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서 교주.”
“사형!”
“교주님.”
서량이 손을 흔들었다.
“우르르 몰려서 온다는 소리는 들었지. 먼 길 오시느라 고생들 했네.”
가장 먼저 서량에게 다가간 것은 주서윤이었다.
“사형.”
“오냐, 잘 지냈느냐?”
“네.”
주서윤의 눈이 글썽거렸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사형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간 그녀에게도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지만, 진짜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은 몇 없었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있어 서량은 집안의 가장이요,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만한 큰 오라비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었고, 동시에 그리움이 커 눈물부터 나왔다.
서량은 나직이 감탄을 터트렸다.
“굉장하구나. 고새 또 그만큼이나 늘었어? 야, 이러다 몇 년 새에 추월당하겠는데?”
“사형은 옛날보다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클클, 만날 좋은 거 먹고 빈둥거리기 바빠서 말이야. 네가 호북을 잘 다스려 주고 있으니 아무 걱정 없이 푹 쉬고 있다.”
주서윤이 활짝 웃음을 지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좋구나. 점점 도(道)에 가까워지면서도 누구보다도 사람답게 변하고 있어. 정말 보기 좋다.”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주서윤의 어깨를 두들기던 서량이 공야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야치가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일세, 문주. 그간 잘 지냈지?”
“물론입니다. 무척 바쁘긴 했지만요.”
“바쁜 게 좋은 거야.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이 밥값만 하고 놀 거야? 밥값 이상을 해야지.”
“하하, 여전하십니다.”
“뭘 바랐어?”
킥킥대며 웃던 서량이 이번엔 여강휘를 바라보았다.
“여어, 신임 궁주 어르신.”
반가운 마음에 한 발자국 다가오던 여강휘의 표정이 대번에 어색해졌다.
“놀리지 마십시오, 교주님.”
“이게 뭐 놀리는 거야? 여하간 축하해. 무공도 그렇고, 눈빛을 보니 확실히 예전보다 강단이 늘었구만. 빙궁의 수장으로서 부족함이 없어.”
“하하, 교주님만 하겠습니까?”
“당연히 나만큼은 안 되지. 어딜 비비려고 그래?”
“컥.”
서량이 여상린을 보았다.
“잘 지냈지?”
여상린이 씨익 웃었다.
“확실히 검장왕 전하 말씀이 맞네요. 몇 달 전보다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그런가? 사실 난 잘 모르겠어. 하루하루 원체 즐기면서 사는지라.”
여강휘가 놀라서 두 사람을 보았다.
“몇 달 전이라니? 설마 두 사람, 자주 봅니까?”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자주 보는 건 아니고, 몇 달에 한 번씩 부르긴 했지. 이 사고뭉치가 지부를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헐!”
여상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라버니한테 말은 안 했는데, 교주님께서 꽤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 그랬구나?”
여강휘의 얼굴에 대번에 밝아졌다.
“그래, 그랬어. 둘이 자주 만나고 있었어.”
여상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술 마시는 건 참 오랜만이네요. 아, 술상 차려 주실 거죠?”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술 한잔도 안 하고 갈 생각이었어?”
“흘흘.”
“이빨 다 빠진 노파처럼 웃지 마라, 징그럽다.”
“흥!”
“근데 요새도 많이 먹냐? 양 안 줄었어?”
“더 늘었는데요? 아니, 근데 제가 많이 먹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적게 먹는 거 아니에요?”
“됐다. 배 터지게 먹고 가라.”
혀를 차던 서량이 위홍련을 바라보았다.
위홍련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군림…….”
“일흔두 번 붙어서 다 졌다며?”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누구한테 들었겠냐?”
“이 망할 인간이!”
“붙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 이것아. 야, 그리고 일흔 번을 넘게 붙었으면 한 방 정돈 먹여 줘라. 어떻게 그동안 한 수도 늘지를 않냐.”
“교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는데요.”
“할 말 없어야지, 새꺄. 마왕령주씩이나 되는 년이 쪽팔린 줄 알아.”
“컹!”
“이 새끼가?”
위홍련의 이마에 알밤을 먹인 서량이 마지막으로 송금백을 바라보았다.
송금백은 이마를 감싸 쥐고 땅을 구르는 위홍련을 측은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랴, 전하.”
대뜸 튀어나온 무시무시한 호칭에 송금백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름 돋네.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르시게.”
“켈켈켈.”
“신수가 아주 훤하구먼?”
“물론이지. 너무 건강해서 따분할 지경이야.”
“자네는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구먼.”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댁은 많이 변했어. 확실히 사람이 안정을 얻어야 독기가 빠지는 모양이야.”
“허허허.”
“어때? 황궁에서의 생활은. 황제가 잘 대해 주던가?”
“지나치게 잘해 주셔서 가끔 무섭기까지 하네.”
“그만큼 댁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지. 앞으로도 옆에서 많이 도와줘. 지금도 잘하고 있겠지만.”
“걱정하지 말게. 이제 내게도 폐하는 혈육과도 같은 분일세.”
“생각해 보면 신분 상승 한번 무지막지하게 했네. 황제의 의형제라? 허!”
“다 자네 덕분 아니겠는가?”
“알면 됐어.”
두 사람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송금백은 서량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황궁과 관련된 일이나 신교의 일 등, 제대로 대화를 나누면 석 달 열흘이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서량을 만나니, 그간 묻고 싶었던 것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보니, 참 좋구먼.”
서량이 마주 웃었다.
“나도 그러네. 자주 못 봐서 그런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반가워.”
“허허허,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먼.”
“잘 왔어. 술은 많으니까 내 집이다, 생각하고 놀다 가.”
“고맙구먼.”
서량이 호요성에게 말했다.
“준비는 다 끝났나?”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한데 생각보다 바쁜 사람이 많습니다.”
“하긴, 나 빼고 다 바쁘지.”
“아시면 됐습니다.”
“이 사람이?”
그때였다.
“교주님.”
저 멀리서 마동필이 걸어왔다.
일행은 깜짝 놀랐다. 설마 마동필이 마신궁에 이미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동필이 입은 복장도 기가 막혔다. 대개 중원의 숙수들이 두르는 천을 허리춤에 둘렀는데, 여기저기에 자잘한 음식물들이 묻어 있었다.
“앵화 부회주가 말하기를 반 시진 안에 준비가 끝날 것 같다고 합니다.”
“어, 알았다. 엥? 너도 돕고 있었냐?”
마동필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혼자서 하기에는 양이 많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허허, 마도제일검이라고 명성이 자자한 인간이 그 멋진 칼질로 재료 손질이나 하고 있구먼.”
“교주님께서 드실 성찬이 아닙니까. 그리고 저는 마도제일검이…….”
“그냥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쓸데없이 겸손을 떨고 그래.”
마동필이 머리를 긁적였다.
일행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충격을 받았다.
“설마, 마 호위장이 요리하는 거야?”
마동필이 헛기침을 했다.
“그저 보조입니다. 간만에 앵화 부회주가 실력 발휘를 한다고 하니, 옆에서 거들기라도 해야지요.”
공야치가 혀를 내둘렀다.
“설마 마도제일검객이 직접 해 주는 음식을 먹을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오. 말했듯 나는 그저 보조…….”
그때, 위홍련이 버럭 소리쳤다.
“그 아까운 칼질, 요리에 쓸 거면 나나 줘요!”
딱!
“컥!”
위홍련이 다시 땅을 굴렀다.
피식 웃은 서량이 정자를 가리켰다.
“배고파도 조금만 참아. 요리 다 될 동안 올라가서 수다나 좀 떨고 있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