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8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23)
앵화의 요리는 과연 대단했다.
그간 바빠서 직접 요리한 지가 꽤 오래되었을 텐데, 오히려 그 실력이 더 늘어 있었다. 열 가지가 넘는 요리를 착착 만들어 내는데,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송금백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거의 황궁 숙수들에 비견될 만한 실력이구먼. 특히 육고기 다루는 솜씨는 황궁 숙수보다 나은 것 같아.”
“호오? 싸구려 술도 날름날름 잘만 마시더니만, 몇 년 고급진 음식 먹었다고 혀가 엄청 예민해졌구만?”
송금백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 황궁에 들어가기 전에도 고급진 음식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일세.”
“그랬나?”
“이래 봬도 사파 무림의 총수였어.”
“그래도 사파 무림의 총수보다는 황제의 의형제란 자리가 백배는 낫지 않나?”
“아니라고 하면 폐하께서 서운해하실 걸세.”
“없는 사람 얘기 해서 뭐 하나?”
“자네가 이를 거잖나.”
“킬킬킬.”
여강휘가 앵화에게 말했다.
“부회주. 나중에 심심하면 본궁에 한번 놀러 오시는 게 어떤가? 자리 하나는 제대로 된 놈으로 마련해 놓지. 와서 우리 가족이랑 요리도 만들고 술도 한잔하면서 노후를 보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앵화는 그저 웃어만 보였다.
여상린이 핀잔을 주었다.
“앵화가 뭐가 아쉽다고 본궁에 오겠어요.”
“아니, 그래도 사람 인생이라는 게…….”
“와서 숙수나 해 달라는 소리를 너무 포장하는 거 아니에요?”
“커허허험! 절대 그런 거 아니다.”
“속이 훤히 보이는구만.”
“이 녀석, 못 본 새에 입담이 더 매서워진 것 같구나.”
“나는 원래 이랬어요. 오라버니가 일부러 안 보고 있었던 거지.”
두 사람이 연신 티격태격했다.
서량이 주서윤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나저나, 아까도 말했지만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몇 달 쉬다가 가지 그러냐?”
주서윤이 미소를 지었다. 신교를 집이라고 말해 주는 서량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저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죠.”
“호북을 그 정도로 안정시켜 놨으면 이제 알아서 굴러가지 않겠어?”
“그게 또 그렇지만도 않더라고요.”
서량이 턱으로 공야치를 가리켰다.
“저이가 원체 일을 잘하잖냐? 맡겨 두고, 혹시라도 큰일 터지면 그때 가도 늦지 않을 듯한데?”
공야치가 넉살 좋게 그의 말을 받았다.
“교주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자잘한 건 제가 다 처리할 테니, 교주님 말씀대로 몇 달 쉬었다 오시지요.”
송금백이 코웃음을 쳤다.
“안 온다고, 안 온다고 난리를 쳤으면서 교주 앞에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구먼.”
“당연한 것 아닙니까. 교주님이신데요.”
“더럽게 서럽구먼.”
“하하,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습니까? 일각만 덜 자면 됩니다. 게다가 교주님께서 가끔 보약을 보내 주셔서 체력은 더 늘었지요.”
주서윤이 미소를 지었다.
“공야 문주께서 일각이라도 더 잘 수 있게 노력해야지요. 그래도 나름 윗사람인데요.”
서량이 대견하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말하진 않으마.”
“며칠로도 충분해요. 대신,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올게요.”
“언제든 환영이다.”
송금백이 마동필을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호남성에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자네 정말 무지막지하구만?”
“예?”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한 걸음의 전진이 힘들어지는 법이지. 한데 자네는 그런 상식을 넘어섰어. 오 년 새에 눈에 띄게 강해져 버렸네. 과연 마도제일검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해.”
마동필이 고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저는 마도제일검이 아닙니다.”
“왜? 서 교주가 있어서?”
“아닙니다. 교주님은 애초에 그런 세속적인 평가에서 벗어나신 분이잖습니까?”
“……할 말 없게 만드는군.”
송금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면, 마도 무림에 자네보다 실력이 뛰어난 검객이 또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누군가?”
“철검 어르신입니다.”
“철검? 철검마존?”
“그렇습니다.”
위홍련이 피식 웃었다.
“정확히는, 검도(劍道)에 있어서는 확실히 우리 꼰대가 저 양반보다 훨씬 깊죠.”
“허어.”
“하지만 뭐…… 죽자고 싸운다고 하면 사부가 저 인간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네요.”
송금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인으로서 생사결을 벌인다면 철검을 이길 수 있지만, 검인(劍人)으로서의 깨달음을 논하자면 철검이 더 낫다는 것이구만.”
“더 낫다는 말 자체가 그분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철검 어르신의 깨달음은 과거 남궁의 검왕(劍王)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입니다.”
“허어! 그 정도란 말이지?”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송금백이 서량을 보았다.
“진짜 그런가?”
서량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엇비슷하기야 하겠지. 다만 마공의 특성상, 정파의 신공보다 이치에 이르기 어려울 수밖에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 만일 철검이 정파의 무공을 연성했다면 검왕 이상의 경지를 넘봤을지도 모르지.”
“허!”
구대마존은 곧 신교에서 활용할 수 있는 최강의 고수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마공을 익힌 마인이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검도(劍道)를 깨우쳤다는 건 진정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경지의 상승이나 무공의 위력을 떠난 문제였다.
“신교에는 인재가 참 많기도 하구먼.”
마동필이 웃으며 말했다.
“저 역시 간혹 철검 어르신과 검론(劍論)을 주고받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지요. 저의 얕은 깨달음은 어르신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걸요.”
“대단하군. 며칠 지내기로 했으니, 한번 만나 보고 싶어.”
“철검 어르신의 성격이 상당히 부드러워지셨습니다. 태장왕 전하께서 보고 싶다고 하신다면, 흔쾌히 만나 주실 겁니다.”
“허허허.”
서량이 손뼉을 쳤다.
“자, 좋은 음식에 술까지 놔두고 너무 말이 많았어. 다 같이 한잔하자고.”
“좋지.”
칭!
모두가 건배를 하곤 그대로 술을 넘겼다.
“푸화악!”
“콜록!”
“켁켁!”
그리고 절반 이상이 곧바로 술을 분출했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들 그래? 이상해?”
송금백이 멍하니 잔을 내려다보았다.
“이 술은 대체 뭔가? 내 살다 살다 이렇게 독하고 향기가 이상한 술은 처음 마셔 보는데? 말이 향기지, 이건 그냥 구린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앵화는 애써 술을 삼키긴 했지만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동필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주서윤은 내공으로 입 안에 감도는 주향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여강휘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 버렸고, 여상린은 정자 난간에서 헛구역질까지 하고 있었다.
오직 위홍련만이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왜들 그러세요? 좀 독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서량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지? 나쁘지 않지?”
“좋은 술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중에서 파는 싸구려 백주보다는 나은데요?”
“……망할 년.”
“왜, 왜 그러세요?”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또 실팬가.”
“실패라니요?”
“아니, 사부님께서 내게 육천심주의 제조법을 알려 주셨거든. 분명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들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 맛이 안 나더란 말이지.”
송금백의 눈이 충혈되었다.
“설마, 우리한테 시험해 본 건가?”
“이거 왜 이래? 내 입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대접한 거야. 이 술 담느라고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알아? 사람 성의를 몰라주네, 섭섭하게.”
“성의고 나발이고, 맛이 이따위인데 섭섭은 무슨!”
“이 양반들이? 야! 됐어! 마시지 마! 이런 술맛도 모르는 것들이!”
서량이 씩씩대며 병을 치웠다.
앵화가 서둘러 말했다.
“아니에요, 교주님. 저는 맛있었어요.”
“턱에 샌 침부터 닦고 거짓말해라. 줄줄 흐르고 있잖아.”
“네? 헉!”
서량이 탄식을 토해 냈다.
“제기랄, 예전보다 더 섬세하게 만든 것 같은데도 이 난리라니.”
확실히 제조법이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앵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서량 역시 어지간한 요리는 뚝딱 만들어 낼 만큼의 실력이 있었다. 워낙 손재주가 좋고 감도 좋아서, 뭐든 금방 배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놈의 육천심주는 도통 그 맛이 나지 않았다. 그 맛에 근접하기라도 하면 또 모르겠는데, 어째 매번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서량은 서러웠다.
“동필아. 가서 사부님표 심주 열 병만 챙겨와라.”
“알겠습니다.”
잠시 후, 이천상이 직접 담근 술을 마신 일행의 얼굴에 황홀함이 떠올랐다.
“캬! 이거지. 이게 술이지.”
“세상에…… 먹구름 낀 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줄이야.”
“무릉도원이 따로 없네. 술 한 잔에 세상이 달라 보여.”
“와, 새삼 느끼는 건데 이 술은 어떤 안주랑 먹어도 어울리는 것 같아요.”
“눈물이 다 납니다. 속곳에다 그대로 지릴 뻔했어요.”
서량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차이가 심하냐?”
일행은 대답 없이 술만 들이켰다.
무언의 긍정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정신이 팔려서 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서량이 버럭 외쳤다.
“에라, 이 망할 것들아! 다 처마셔! 처마시고 다 뒤져, 그냥!”
* * *
그날 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만취한 그들은 정자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온도가 워낙 좋기도 했고, 경치도 무척 아름다웠다. 게다가 오랜만에 진한 인연들끼리 만나니, 자다가 일어나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심지어 송금백조차도 완전히 취해서 정자 기둥에 기대 앉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억지로 내공을 제어해 취기를 돌게 만든 것이다. 그가 이곳을 얼마나 편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멀쩡한 사람은 셋이었다.
“후, 정말이지.”
호요성이 불콰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들, 알기는 할까요? 술에 취한 채 마신궁에서 뻗는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서량이 피식 웃었다.
“영광은 무슨.”
“확실히 다들 들뜨긴 했나 봅니다. 이렇게까지 빨리들 취할 줄은 몰랐어요.”
“들뜨기도 했을 것이고, 여독도 풀기 전에 대뜸 술부터 때려 부었으니까.”
“확실히 이들 모두가 교주님을 좋아하는 게 느껴집니다.”
“낯부끄럽게 무슨.”
“다들 좋은 인연이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 그건 그렇지. 지금에 와서야 안 좋게 볼 인연도 달리 없을 것 같네. 안 좋은 인연들은 이미 다 죽거나 망해 버렸으니.”
호요성이 입맛을 다셨다.
마동필이 미소를 지었다.
“이들 모두 각자의 거처로 옮길까요?”
“내버려 둬. 보아하니 자다 일어나서 또 마실 기세더구만.”
“저, 정말로 그냥 둘까요?”
“이 인간들 육천심주 마시고 눈알 튀어나온 꼬락서니 못 봤냐? 분명 또 마신다는 데에 내 손모가지 건다.”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들도 더 마실 거지?”
“어? 교주님은 안 드십니까?”
“당연히 드시지. 대신 자네들이랑은 그만 마시려고.”
마동필이 조심스레 물었다.
“따로 약속이 있으신지요?”
“약속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서량이 서북쪽을 바라보았다.
이곳 정자에서 서북쪽으로 십 리를 가면 거대한 숲이 나온다. 그리고 그 숲은, 신교 최고의 비지(秘地)였다.
“그간 못 만난 인연이 있거든. 오늘은 꼭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육천심주 두 병을 요대에 맨 서량이 한량처럼 건들거리며 걸어 나갔다.
“나 없다고 사람들 치우지 말고, 더 마시려거든 거기서 계속 마셔. 나도 적당히 마시다가 다시 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