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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649화 (648/774)

649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24)

거대한 대숲으로 들어온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하군.”

고죽림(孤竹林).

천마신교 최고의 비지이자, 신교의 시작을 알린 곳이기도 한 성지(聖地).

서량의 눈에 아련함이 어렸다.

“그때가 생각나는군.”

처음 고죽림에 들어왔을 때.

그때의 자신은 얼마나 어리숙하고 바보 같았던가.

능력과 생존 본능은 특출났으되, 세상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던 때였다.

단순히 경험이 많다고 세상을 아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알아야 하는 법. 자아(自我)를 제대로 찾지 못했던 당시의 서량은 그저 힘세고 경험만 많은 세 살배기 꼬마애나 다를 바가 없었다.

서량이 고죽림 안으로 진입했다.

스르륵.

곳곳에서 귀물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귀물들은 누구 하나 서량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외로, 놀라서 흩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없이 고요한 눈으로 서량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박사박.

발에 밟히는 댓잎의 감촉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서량은 단숨에 고죽림의 비처까지 진입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위험한 귀물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외측에서처럼, 더 위험하고 흉포한 귀물들 역시 숨어서 서량을 지켜보기만 할 뿐 접근도, 도주도 하지 않았다.

“참 좋은 곳이야.”

서량이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영기도 풍부하고, 기온도 적당하고.”

어지간한 무림의 고수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귀물들의 존재만 제외하면, 은퇴하고 노후를 보내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듯했다.

물론, 누구도 이곳에서 노후를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신교 최고의 비지라는 상징성 때문이라도, 여기서 사람이 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서량 역시 가끔 들르긴 해도 이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나라니까. 이런 곳에서 여덟 달을 보냈네. 진짜 동필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추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때는 하루하루 목숨이 위험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는데, 이 또한 지나가니 추억이 되었다.

“좋은 자양분이었어.”

우우우웅.

어느 순간, 서량의 몸에 희미한 진동이 어렸다. 가슴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진동이었다.

그리고 반 각이 더 지나자.

크르릉.

엎드려 있던 황금빛 여우가 고개를 쳐들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금호.”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금호가 서량에게 다가와 그의 가슴께에 머리를 비볐다.

무려 삼 년 만에 만나는 금호였다. 하지만 삼 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마신(魔神)과 요선(妖仙) 사이에는 아무런 어색함이 없었다.

“잘 지냈냐, 이놈아!”

서량이 금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꾸우우우!」

금호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것이 반가움의 표현이라는 걸 서량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서량이 자리에 철썩 주저앉았다.

그의 주변을 배회하던 금호가 서량의 바로 옆에 엎드렸다. 풍성한 꼬리가 서량의 몸을 반쯤 휘감았다.

따뜻했다.

“너는 여기서 맛난 거 많이 먹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냥 나 마실 술만 가지고 왔다.”

서량이 육천심주를 한 모금 마셨다.

“캬! 확실히 좋긴 좋아. 이런 걸 보면 참, 새삼 사부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니까. 정말 여러 방면에서 못 하는 게 없으셨지.”

술병을 내려놓은 서량이 비스듬히 누웠다.

털이 워낙에 푹신했다. 거처의 침상보다도 더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비스듬하게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던 서량이 입을 열었다.

“금호.”

금호가 심유한 눈으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난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야.”

그의 눈이 깊어졌다.

“아직 신화(神化)의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경지로도 느껴져. 내가 이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그리고 세상이 내게 무엇을 바랐는지도.”

생각해 보면, 그의 말마따나 서량만큼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이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참으로 지옥 같은 일들을 겪었더랬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의 주변에는 항상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그 역시 하루하루의 경험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은 서량의 정신력과 목적의식 덕분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인복이라는 것부터가 서량 스스로가 만든 것일는지도 몰랐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는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었다.

“검왕 노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양반과 검을 섞어 보지 않았다면 과연 이 경지에 오를 수 있었을까?”

서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송금백, 저 양반하고 생사결을 나누지 않았다면? 적송 노선배에게 일맥(一脈)이었던 불가 무학의 깨달음을 건네받지 않았다면? 사부님과의 비무가 없었다면? 그리고 중원에서 벌였던 온갖 싸움이 없었다면?”

그가 금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본디 오롯이 네 몫이었을 고죽림의 핵(核)을 내가 취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금호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그 신비로운 눈으로 서량을 볼 뿐이었다.

서량이 금호의 턱을 긁어 주었다.

금호가 눈을 감고 턱을 더 내밀었다.

“생각해 봤어. 암영기(暗影氣)에 대해서도.”

천살암영진결.

구파 무학의 비기들을 모아 만든 희대의 신공으로, 불가나 도가의 무공과는 달리 철저하게 살법(殺法)에 초점이 맞춰진 정파 무림의 그림자와 같은 무공이었다.

“담사영이 그랬지. 암영기를 제대로 익힌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었다고. 이 놀랍도록 뛰어난 절기를 익히고도 심신(心身)을 멀쩡히 유지한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어.”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아마 사부님께서도 아셨을 거야. 암영기의 특성을.”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던 별들이 한순간 더 선명한 빛을 내뿜는 듯했다.

“군림마황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암영기 역시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무공이야. 이런 것은 구결이나 법문을 보고 깨우칠 수 있는 게 아니지. 나 역시 이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면 몰랐을 거야.”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오로지 사람을 죽이는 데에 특화된 기운. 본디 기(氣)란 인간의 의념에 따라 성질을 바꾸게 마련이지만, 가끔은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도 있기 마련이지. 그런 면에서 암영기는, 인간의 영력(靈力)이 죽음 그 자체에 특화되어 있지 않은 이상 누구도 익힐 수 없는 무공이야.”

말하자면, 서량은 타고난 암살자였다.

말 그대로 사신(死神)이다. 서량, 아니 천하진은 사람을 죽이는 데에 있어 누구보다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놀랍게도 그것은 암영기 덕분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무공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데에 능했다. 그리고 일단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만 하면, 그 무공은 희대의 살공(殺功)이 되어 극한의 살법으로 변모하곤 했다.

경험이 많아서도, 암살자 출신이어서도 아니다.

재능 이전에, 그의 영혼이 누구보다도 죽음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는 암살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동시에 암영기를 익히지 않았다면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살성(殺星)이 되어 중원을 뒤집어 놓았을 것이다.

즉, 그가 겪은 경험과 익힌 무공들이 그를 살수지왕으로 만든 게 아니란 것이다. 그가 그리 태어났기에, 평범한 사람과는 혼(魂)의 영역에서부터 차이를 보였기에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후욱!

서량의 왼손에서 백색의 화염이 타올랐다.

군림마황기와는 완전하게 대비되는 순백의 화염이었다. 어떠한 잡티도 없는 그 화염은, 그 자신이 직접 창안한 구유마공의 불길이었다.

구유마공의 오 식(五式). 최후의 지옥문.

등천답영식(登天踏永式)에 든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구유마화의 극한, 백룡멸화(白龍滅火)였다.

“그것은 사부님과 같다.”

구대천마 이천상.

그의 욕망은 천하를 뒤덮었고, 나아가 과거와 현재, 미래마저도 뒤흔들 만큼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그런 이천상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유혹했고,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의 이천상은 하늘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천상은 신이 되었다. 신이 된 이후, 인간으로서 하늘에 저항할 수 있었다.

즉, 이천상은 욕망 그 자체였다. 욕망으로 태어나, 욕망의 힘으로 하늘에 저항했고, 욕망 덕분에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서량은?

“나는 죽음이다.”

죽음에서 태어나, 죽음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그 자신의 목숨까지도 불살라 버릴, 이 세상에 태어나선 안 될 존재가 그였다.

적어도 서량 자신은 그렇게 느꼈다. 이 또한 진정한 신화에 오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는 자신 역시 근본부터 엇나간 존재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부님을 만나고 난 이후, 나는 나의 근본을 바꿀 수 있었어.”

아마도 이천상은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처음 판마정에 발을 디뎠을 때, 자신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나선 안 될 존재라는 걸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바꾸었다. 죽음을 안고 태어났지만, 어떻게든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쳤던 자신의 뿌리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사신(死神)이 아닌 마신(魔神)이 되도록.

그 궁극의 재능을 기반으로 한 마신이 되어, 천하 정점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천재 무사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그분 덕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어. 천 년 동안 갚는다 한들, 억겁의 시간 동안 갚는다 한들 이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

스르륵.

백룡멸화의 불꽃이 사라졌다.

암영기는 진마공(眞魔功)과 섞여 살욕(殺慾)을 잃었다. 마동필이 구유마공을 익힐 수 있었던 이유였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하긴, 지금 그런 걸 따져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중요한 것은 현재이고 미래지.”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과거까지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저 사부님처럼, 위대한 구대천마처럼 삼생(三生)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지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조만간 그 자신 역시 심연의 입구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심연의 입구에서 고민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연, 신화라.’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던 서량이 재차 눈을 떴다.

“에라이! 그따위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 이제야 세상 사는 재미를 느끼는 참인데 신화경이 웬 말이냐!”

육천심주 한 병을 단박에 비워 버린 서량이 금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이놈아! 내, 그간의 고생이 억울해서라도 앞으로 백 년은 더 살아야겠다! 이승에서 누릴 거 다 누리고, 내 새끼들한테 해 줄 거 다 해 주고 떠나야겠다!”

「꾸우우우.」

“그때까지 심심해도 옆에 찰싹 붙어 있어! 알겠냐? 괜한 사고는 치지 말고! 고죽림 좋다고 여기 처박혀서 잠만 자 대지 말고!”

「크르릉.」

“어? 싫어? 그래도 안 돼. 조금 이따가 나랑 같이 마신궁으로 가자. 너도 바깥 공기 좀 맡고 살아야지?”

「꾸우우우.」

서량이 껄껄껄 웃으며 금호의 몸을 침대 삼아 대자로 뻗어 버렸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캬! 달빛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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