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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650화 (완결) (649/774)

650화. 치세(治世) 속의 이야기 (25)

십 년 후.

“누구?”

“백팔(百八) 호(號)입니다.”

이제는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고구의 외양은 사십 대의 그것이었다.

고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팔 호라면 열흘 전에 잡혔던 그?”

“예, 그렇습니다.”

형법당주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으려 하지만, 이제는 눈빛만 봐도 후임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는 고구였다.

고구가 헛기침을 했다.

“어르신. 아무래도 잠시 다녀와야겠습니다.”

무담이 껄껄껄 웃음을 토해 냈다. 머리카락부터 수염까지, 온통 새하얗게 물든 그의 모습은 여전히 딱딱했으되, 세월이 주는 지혜와 자애로움을 담고 있었다.

“그러시게. 나야 남는 게 시간이니, 천천히 일 보다 오시게나.”

“알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광마존 어르신 퇴임식이 모레였던가요?”

“그렇다네.”

“허허, 선물이라도 준비해야겠군요.”

“선물은 바라지도 않을 걸세. 광마존 선배 선물 이전에, 오늘 저녁 강의나 잊지 말게. 호법원 위사들이 자네 강의 들으려고 난리야.”

“알겠습니다. 그럼.”

고구가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마자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보여 주는 표정과 공적인 자리에서 보여 주는 표정의 차이가 엄청나게 컸다.

“한데 백팔 호가 왜? 그놈, 사흘 뒤에 사형당하는 것 아니었나?”

“물론 그렇습니다만…….”

잠시 망설이던 형법당주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선배님께서도 아시다시피, 형법당에 수감된 놈 중 제정신인 놈이 없잖습니까.”

“뼈저리게 잘 알고 있지.”

“한데 그놈은 뭔가 달랐습니다.”

“다르다니? 뭐가?”

“그저 직감입니다만…… 교주님을 직접 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눈빛에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습니다.”

고구가 비릿하게 웃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자네가 그리 말할 정도면 확실히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일세.”

“송구합니다.”

“하긴, 최초로 교주님의 목숨을 노리고 침투한 자객 놈이니 뭔가 다르긴 다르겠지.”

사건은 열흘 전에 터졌다.

당대 천마신교는 천하 누구도 넘보기 힘든 성역이었다. 제국이 직접 신교를 국교(國敎)로 삼고 제국의 마지막 힘이라고 공표한 이후, 세상 사람 모두가 천마신교를 황궁만큼이나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애초에 당대 천마인 절대마신 서량의 무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날, 그가 중원에서 보여 준 무적의 무공은 세대가 바뀐다고 가볍게 평가될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일개 무림의 방파였던 천마신교가 황궁에 비견될 만한 위엄과 정통성을 갖게 된 것은 이번 세대가 처음이었다.

세간에는 이런 말들도 있었다.

“하늘 아래 황제가 있고, 그 하늘을 천마가 지키고 있다.”

“황제는 죽지만, 천마는 죽지 않는다.”

“각지에서 민란이 터지면 황궁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천마신교는 더 강해질 것이다.”

말하는 바는 달랐지만, 그 모두가 천마를 절대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있었다.

당연히 암살 시도가 있을 수 없었다. 황제를 향한 암살 시도는 몇 번 있었지만, 그간 교주를 향한 암살 시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십 년의 신화가 열흘 전에 깨졌다. 한 암살자가 천마를 암살키 위해 신교로 침투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듯, 당연히 그 암살 시도는 실패하고야 말았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야. 교주님을 제하더라도, 당금 신교의 경계는 전대 교주님 대보다도 더 철통같거늘, 그걸 기어이 뚫고 내성까지 이르렀으니.”

“그렇습니다. 아마 이십여 년 전 천하를 긴장케 했던 살왕(殺王)에 필적할 만한 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색사에서는 답변이 왔는가?”

“모른답니다. 이것저것 죄 조사를 해 봤는데, 그 암살자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흐음.”

무색사가 모르는 살수라?

“일단 만나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철컹!

뇌옥의 문이 열리고, 고구가 들어섰다.

‘흠.’

고구가 죄인 백팔 호를 바라보았다.

번쩍! 번쩍!

단전이 깨져 내공을 소실했음에도 백팔 호의 눈빛은 형형하기만 했다.

적어도 배포 하나만큼은 놀랍도록 대단한 자였다. 고구는 그의 눈빛에서 꺾이지 않은 강인함과 투철한 생존 본능, 그리고 강력한 목적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백팔 호인가.”

“당신은 누구요?”

열흘 동안 음식물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을 텐데, 목소리에는 힘이 넘쳐났다.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고구라고 한다. 전(前) 형법당주이자 당대 호법원 고문이지. 뭐, 말이 고문이지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마인 나부랭이라 보면 될 걸세.”

백팔 호는 고구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고구가 그 앞에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교주님을 뵙고 싶다 했다고?”

“그렇소.”

묘한 녀석이다.

분명 강단 넘치는 녀석인데, 말투를 들어 보니 예의를 아주 모르는 자는 아닌 듯했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당당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데, 목소리는 또 암살자가 아니라 차분한 문사(文士)를 연상케 했다.

“교주님을 뵈어서 무엇 하시게? 설마 죽이지 말아 달란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오. 애초에 암살을 시도한 순간부터 죽음을 각오한 몸이외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고구는 백팔 호의 얼굴에서 본능적인 두려움과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초연함을 읽을 수 있었다.

고구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당주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군.’

보면 볼수록 뭔가가 다른 녀석이다.

뛰어난 실력은 둘째였다. 이 녀석에게서는 당주 말마따나 뭔지 모를 사연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아가, 왠지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 녀석이기도 했다.

“교주님께 따로 할 말이 있다…… 설마하니 자네, 본인의 처지를 잊은 건 아니겠지? 자네는 본교 입장에서 대역죄인이나 마찬가지일세.”

“알고 있소.”

“교주님께 전할 말이 있으면 지금 내게 하게. 그대로 전해 드림세.”

“그럴 수 없소.”

“왜지?”

“나는 교주님을 직접 뵙고 판단을 내리고 싶소. 그 전에 이리 잡혀 버렸지만, 이 암살도 그분이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면 죽이려 했을 뿐, 그게 아니라면 얌전히 목숨을 내놓을 작정이었소.”

교주도 아니고 교주님이란다.

고구의 얼굴에 흥미가 묻어 나왔다.

“즉, 교주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시는지에 따라 자네가 할 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로군.”

“그렇소.”

고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보게, 당주.”

“예, 선배님.”

“이놈 그냥 죽이게.”

형법당주의 눈이 번뜩였다.

백팔 호 역시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리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반응도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고구가 차갑게 말했다.

“오만한 놈! 허울뿐인 쓰레기 따위가 어딜 감히 교주님을 뵙고자 하는가. 기세가 제법이라 뭔가 있을 줄 알았더니, 결국 환상에 사로잡힌 머저리에 불과했군.”

백팔 호의 눈이 흔들렸다.

고구가 몸을 돌렸다.

“죽기 전에 알아 두어라. 교주님은 물론 본교의 누구도 흥정 따위 하지 않는다. 하물며 본교의 신을 죽이려 한 네놈에게, 몇 마디 말이라도 건네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도록.”

“…….”

“교주님께서 연좌죄(緣坐罪)를 없애라 명하지 않으셨다면, 네놈을 고문하여 네놈의 가족과 친지를 모조리 찾아내 구족을 멸했을 것이다.”

백팔 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부탁하오. 교주님을 뵙게 해 주시오.”

고구는 그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했다.

“당주. 금일 저녁에 시간이 나면 호법원으로 오게. 강의 끝나고 밥이나 한 끼 하지.”

“알겠습니다.”

백팔 호가 재차 외쳤다.

“부탁하오! 어차피 나는 죽을 몸이 아니오! 나는 반드시 교주님을 뵈어야 할 이유가 있소!”

그때였다.

척.

고구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자비로우신 건지, 호기심이 많으신 건지.”

형법당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고구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교주님께서 저치를 데려오라고 하시네.”

“예?!”

“방금 전음을 주셨네.”

형법당주의 얼굴에 경이로움이 어렸다. 반면 백팔 호의 얼굴에는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이곳에서 마신궁까지의 거리가 얼마인데, 이곳에서 벌어진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단 말인가? 들었다 한들, 이 먼 거리에 전음까지 날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다.

“당주. 백팔 호를 풀어 주게.”

고구가 입맛을 다셨다.

“저놈을 판마정(判魔亭)으로 이송하게나.”

쿵!

백팔 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양팔과 발목을 묶은 쇠사슬의 무게만도 상당했다. 게다가 꼬박 며칠을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셨더니, 가볍게 미는 손짓에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들어가라.”

고구가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이 문 너머에 교주님이 계신다.”

백팔 호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하니, 정말로 천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치리리링.

쇠사슬 흔들리는 소리가 귀를 아프게 찔렀다.

크게 심호흡을 한 백팔 호가 문을 열었다.

덜컹! 후우우욱!

열린 문틈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백팔 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이, 이럴 수가.’

사방이 탁 트인 선경(仙境)이 드러났다.

기화요초 만발한 세상은 그야말로 인세의 그것 같지 않았다. 아니, 십만대산에 이런 곳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었다. 광동성의 기후를 생각하면, 이 시기에 이런 시원한 바람이 불 수가 없었다.

덜컹!

문 닫히는 소리에 놀란 백팔 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헉!”

문은 물론 벽까지 몽땅 사라졌다.

반대편에는 널따란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신이 들어왔던 건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이, 이게 대체 무슨?!”

그때였다.

쩌어어어엉!

“으악!”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경망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팔 호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

그가 보는 곳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웃통을 벗은 칠척장신의 사내였다. 극한까지 단련된 상체 근육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을 못 차리게 할 정도로 강인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이제 방년을 조금 넘은 듯 보이는 처자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쳇, 역시 사형한테는 안 되나 봐요.”

“이놈아. 천하 전부가 덤벼들어도 내 팔 한 짝 가져갈까 의심스러운데, 설마하니 이 사형 몸뚱이에 긁힌 상처 하나 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그래도요. 뭔가 제대로 된 한 수를 보여 드릴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제대로 된 한 수, 잘 봤다.”

“정말요?”

“정말이다. 엄청나게 많이 늘었어. 얼마가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근시일 내로 극마의 벽을 뚫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여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정말이죠? 정말이죠?”

“나, 이런 걸로 빈말 안 한다.”

“에헤헤헤!”

아름답기 그지없는 외모인데, 웃음은 묘하게 헤프면서도 귀엽다.

“자, 일어나거라. 손님 오셨다.”

“아, 그럴까요?”

사내가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어? 근데 저도 있어도 돼요?”

“누가 나가라고 했냐? 심심하면 저기 호수에서 헤엄이라도 쳐.”

“힘들어요.”

“확실히 사람이 변했어. 옛날 같았으면 말이 끝나자마자 뛰어들었을 텐데.”

“저도 머리가 좀 컸거든요.”

“옛날의 순수하던 여민이가 그립다.”

“쿠쿠쿠, 저는 이제 아이가 아니랍니다.”

“됐고, 이번에는 떨어지지 마라. 천마대군장이라는 직책은 무공만 강하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저도 알아요. 이번 진급 시험은 제대로 해 보려고요. 최연소 천마대군장! 아직 포기 안 했답니다!”

“그래, 잘할 거라고 믿는다.”

화아아아악!

순간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닥치더니, 어느새 사내가 곤룡포를 걸치고 있었다.

백팔 호는 멍하니 사내를 보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데도,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내가 화려한 정자에 오르며 말했다.

“백팔 호라고 했나? 올라오시게.”

퍼뜩 놀란 백팔 호가 홀린 듯 정자로 향했다.

끼익. 끼익.

정자를 오르면서 차근차근 보이는 사내의 모습은 놀랍도록 거대했다.

몸도 몸이지만, 존재감 자체가 차원을 달리했다. 기도가 충격적이라거나 기파가 거세다는 느낌이 아니라, 아예 인세의 인간 같지 않은 존재감이었다.

‘……이럴 수가.’

백팔 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 나는 이런 자를 암살하려 했단 말인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질 지경이었다. 진기나 기도가 아닌, 반선(半仙)의 영역에 오른 천상(天上)의 영혼이 자신을 그대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백팔 호는 확신했다. 아마 마신궁에 들어 이자와 마주했다면, 그 즉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을 것이라고.

설령 화경의 고수라도, 이 자의 눈빛 한 번이면 오금이 저려 무릎을 꿇고야 말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 정도로 차원이 다른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다.

“호오.”

정자의 난간에 팔을 올리고 나른하게 기댄 자세로 잔을 채우던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로군. 그런 눈빛,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백팔 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천우영, 천우영이라 합니다.”

“이름 좋군.”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천마(天魔)다.”

“……!!”

“자네, 술은 할 줄 아나?”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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