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분란은 가슴에 있다 (2)
후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에 열기가 실렸다.
‘다르다.’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지금껏 항상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만 보여 주던 도헌.
그의 인상이 한순간 바뀌었다. 두 눈은 붉게 달아오르고 등 뒤에서는 붉은 듯, 어두운 듯 기묘한 광채를 머금은 연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
이상한 일이었다.
칼을 쥔 손이 무거웠다. 두 다리는 족쇄가 채워진 것처럼 쉬이 움직이질 않았다.
‘기(氣)다.’
그제야 이천상은 자신의 몸이 무거워진 이유를 알았다.
‘기의 압력 때문이군.’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세가 어느새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자신만이 아니었다.
기세를 일으키는 순간, 이미 이곳 일대의 공간이 도헌의 의지하에 놓였다. 보이지 않는 팔 수백 개가 일정 공간을 더듬어 가며 공기가 어디로 흐르는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도 가능했구나.’
처음 보았다. 진짜 고수의 기(氣)를 다루는 고차원적인 능력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상대를 동작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경지.
‘만약 이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다면.’
훨씬 더 높고, 훨씬 더 방대한 양의 기를 다룰 수 있다면.
그때는 기와 눈빛만으로 사람을 살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러지?”
눈빛과 분위기는 물론 음성까지도 달라진 것 같았다.
도헌의 목소리는 몹시 탁하고 진하게 들렸다.
“이 정도로 움직이지 못할 만큼 연약하진 않았을 텐데?”
이천상이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단전에서 잠들고 있던 진마공의 기운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도헌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역시.’
천하 무공 중 마공(魔功)만큼 서열 관계가 확실한 무공 체계는 달리 없다.
서열이라 함은 곧 먹이사슬 관계가 철저하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상위의 마공을 지닌 자에게는 하위의 마공을 지닌 자가 쉽게 덤빌 수 없다.
실제 실력이 한 수 위라 해도, 상대가 연성한 마공의 수준이 높다면 최소가 박빙이다.
이천상은 고작 기본공인 진마공을 익혔음에도 자신 앞에서 기세를 불태우고 있었다. 심지어 실력 차이가 확연한데도!
‘역시, 실망시켜 주지 않는구나.’
후우웅! 후우우우웅!
대나무를 스치고 들어오는 바람이 일순 투정 부리듯 세차게 하늘로 올라갔다. 두 사람 사이로 쉽게 들어오질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번쩍!
눈을 뜬 이천상이 공격을 시작했다.
팍!
경쾌하게 땅을 박찬 그가 도헌을 가슴을 향해 칼날을 밀어 넣었다.
도헌의 표정이 묘해졌다.
‘요것 보게?’
도(刀)란 찌르기보다 베기에 더 적합한 병기다.
물론 형태에 따라 찌르지 못할 것도 없다. 실제 난전에서는 상황에 따라 베고 찌르기를 자유자재로 해야 고수 대접을 받는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베기에 용이한 장도를 들고 첫 일격부터 찌르고 들어올 줄이야.
스륵.
도헌의 몸이 사선으로 움직였다.
이천상의 칼이 허무하게 허공을 꿰뚫었다.
그때였다.
‘……!’
도헌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어느새 이천상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좌하단.’
도헌의 반사 신경과 기감은 이천상보다 아득하게 높았다. 그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곧바로 자세를 내려 속도를 낮추곤 하단을 노린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이런 움직임은 관절에 심한 부담을 주며, 부담을 각오한들 쉽게 쓸 수도 없었다.
퍼억!
이천상의 좌장(左掌)이 도헌의 무릎을 때렸다.
도헌의 몸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훅!
위에서 아래로 꽂아 넣는 도헌의 주먹은 굉장한 기세를 담고 있었다.
이천상의 몸이 재차 움직였다.
팅! 쿵!
도헌의 주먹이 땅을 뚫었다.
사아악!
어느새 이천상이 도헌의 등 뒤로 접근했다. 주먹을 내지른 순간 칼등으로 주먹 끝을 튕겨 힘을 받아 회전한 것이다.
그 면적이 컸다면 칼이 부러졌을 것이고, 그보다 작았다면 이만한 힘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절묘한 움직임. 주먹에 실린 힘의 밀도를 정확하게 계산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못 할 일이었다.
도헌의 두 눈이 형형히 빛났다.
퍼버버벅!
주먹, 무릎, 칼날이 도헌의 등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천상의 공격은 단 하나의 유효타도 내지 못했다. 심지어 칼날에 조금 찢어졌을 뿐, 옷도 멀쩡했다.
도헌의 오른발에 힘이 실렸다.
부우우웅!
오른발을 축으로 후방 상단을 노려 올려 친 각법.
실로 위협적인 일격이었다. 사선으로 몸을 피한 이천상의 머리카락 몇 올이 각법의 경풍(勁風)에 휘말려 가루가 되었다.
하지만 이천상은 물러나지 않았다.
조금만 잘못 피했어도 머리통이 날아갔을 뻔한 공격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정확하게 피해 내고는 양손을 휘둘렀다.
서걱!
섬뜩한 소리.
혼신의 힘을 다해 칼을 휘두른 이천상은 곧장 뒤로 물러났다.
“……흐음.”
도헌이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베었구나.”
베었다.
피부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실제로는 두 동강을 낼 기세로 휘둘렀지만, 베인 것은 고작 옷자락에 불과했다.
외공을 익혀서가 아니라, 내공의 경지가 깊어서 마기가 전신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걸친 의복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육신을 장악하는 만큼은 못한지라 이렇게 베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내성 전투 부대에서도 최고를 다투는 광마대주 도헌의 옷을 한 자루 칼로 베어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살갗이 드러난 가슴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도헌이 고개를 들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멀찍이 떨어진 이천상이 한층 깊어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덤비지 않았느냐?”
“…….”
“방금은 무방비 상태였을 텐데?”
이천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대로 들리지 않는 듯했다. 심연처럼 깊어진 그의 눈은 도헌의 육신 이곳저곳을 맹렬히 살펴보고 있었다.
약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칼이 통하는 곳, 주먹이 통하는 곳, 끝내 적절한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곳.
‘진심이구나.’
도헌은 내심 기가 차면서도 놀라움을 느꼈다.
‘진심으로 날 벨 생각이야.’
이 정도 수준 차이라면 마음부터 꺾이는 게 정상이었다. 절대 벨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천상은 달랐다.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지만, 포기도 모른다.
굴리기까지가 어렵지,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절대 멈추지 않는 묵직한 마차와 같았다.
한번 한다고 하면 하는 것이다.
‘이 기세 앞에서도.’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도헌의 마기는 끊임없이 이천상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묶는 게 아니라, 묶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그래서 더 무섭다. 심령으로 파고들어 공포와 좌절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통하지 않는군.’
도헌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내 수준으로는, 설령 마공을 완전히 개방한다 하더라도 녀석의 마음을 꺾어 버릴 순 없어.’
승패를 생각하면 의미가 없는 싸움이었다.
도헌이 이천상에게 보고자 했던 것은 그의 칼질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느냐가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였다.
한데 이 살벌한 기세를 마주하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재미있구나.’
도헌의 자세가 낮아졌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자세.
‘어디 어떤 수를 쓰려는지 한번 보자.’
파악!
순간 이천상이 재차 도헌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전보다 한층 더 빨라진 속도였다.
도헌의 눈에서 핏빛 광채가 뿜어졌다.
쩌저저저정!
이천상의 칼질은 놀라웠다.
형(形)이나 격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도법을 배운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놀라워.’
마기가 가득 실린 두 손으로 이천상의 칼질을 모조리 쳐 내며, 도헌은 끊임없이 경악했다.
‘하나같이 급소를……!’
칼질 한 번, 한 번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급소를 노려 온다.
막히면 튕겨 나가는 힘을 이용해 더 강한 힘으로 내리치는데, 흔들리는 몸을 잡을 생각도 안 하고 또다시 급소를 노렸다. 마치 원래부터 그런 식으로 움직이려 했다는 듯, 소름이 끼치도록 자연스러운 연계기였다.
치리링!
칼과 주먹이 교차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칼에 이가 빠지고 있는 것이다. 진마공의 마기를 머금고 있다지만, 도헌의 주먹은 신교에서도 아무나 익힐 수 없는 고차원적인 마공을 담고 있었다.
퍼벅!
이천상의 발끝이 도헌의 옆구리를 때렸다.
가장 밑 갈비뼈 안쪽을 노린 잔혹한 일격이었다. 제대로 들어갔다면 뼈가 부러지면서 내장이 상했을 것이다.
물론 도헌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사실상 당해 준 것에 불과했다.
쩌저정! 치리링!
칼과 주먹의 부딪침.
흔들리지 않는 도헌의 마기와 달리 이천상의 마기는 점점 불안정해져 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반년간 진마공을 이 수준까지 연마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다.
하물며 자연스레 급소를 노리는 이 칼질, 그리고 움직임.
도헌이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 정도면 충분해.’
후욱!
이천상의 기운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갈(氣渴)의 신호였다.
도헌이 가볍게 그의 칼을 밀쳤다.
이천상의 몸이 칼을 따라 쭉 밀려 나갔다.
‘반년 만에 이 정도라면 어딜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인재다. 역시…….’
그때였다.
터엉!
밀려 나갔던 이천상이 다시 한번 돌진했다.
‘또?’
도헌은 속으로 웃었다.
‘일념(一念)이라, 그것도 좋지.’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비무의 성과는 충분히 나왔다. 싸움을 끝낼 때가 왔다.
훅!
도헌의 손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캉!
휘두르기도 전에 도헌의 손에 칼날이 잡혔다.
“그만…….”
움찔!
“……?!”
도현의 표정이 돌변했다.
칼자루를 양손으로 쥔 이천상의 팔에 핏줄이 불거졌다.
움찔! 움찔!
‘뭐지?’
손바닥에 닿은 칼날.
꽉 잡혀 움직이지 않는 그 칼날이 조금씩, 조금씩 밑으로 내려갔다.
‘……설마?’
도헌이 이천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의 두 눈은 너무나도 깊어져, 마치 수백 장 밑 바닷속을 보는 것 같았다.
저 찬란한 태양조차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어둠.
산전수전 다 겪은 도헌조차도 처음 보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저갱 그 자체였다.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적으로 마기가 흔들렸다. 동시에 이천상의 상체가 빠르게 하단으로 이동했다.
촤아아악! 카아앙!
시뻘건 핏방울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뒤로 부러진 칼의 파편이 달빛을 받아 지상의 별빛으로 변했다.
파아아악! 퍼억!
도헌의 눈빛이 심각한 빛을 띠었다.
“허억. 허억.”
극도로 거칠어진 호흡.
그럼에도 여전히 눈빛은 지독했다. 그 살벌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목표물을 노려보며, 찢어진 손으로 도헌의 목을 움켜쥔 이천상의 얼굴은 표정 없는 악귀 그 자체였다.
주르륵.
도헌의 이마에서 한 방울 땀이 흘렀다.
이천상의 왼손이 그의 눈을 노리고 쇄도했다.
쿵!
순간 이천상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도헌의 손이 벼락처럼 혼혈을 짚어 버린 것이다.
비무는 그렇게 끝났다.
“…….”
멍하니 이천상을 내려다보던 도헌은 문득 시선을 돌려 오른손을 보았다.
칼날에 베인 손바닥에 깊은 상처가 났다.
마기가 흔들렸다 한들 한순간에 불과했다. 그 틈을 노린다 해도 이천상 수준으로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허.”
도헌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꽉 쥔 주먹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올라오는 날카로운 통증.
하지만 그 통증보다도 조금 전 이천상의 무저갱과 같은 눈빛이 더더욱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너…….”
이천상을 내려다보는 도헌의 얼굴에, 더 이상 순수한 호의는 담겨 있지 않았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