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분란은 가슴에 있다 (4)
이천상은 나머지 하나의 비급을 내려다보았다.
겉표지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금강야차마공과 달리, 이 책자에는 꽤 섬뜩한 붉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혈강수(血罡手)?”
도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수신마(血手神魔)라고 아나?”
“들어 보았소.”
“그럴 거라 생각했네. 꽤 유명한 위인이니까.”
“나쁜 쪽으로 유명한 사람 아니오?”
“맞아.”
이 년 전, 사파의 명문인 흑사검문(黑邪劍門)이 멸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놀랍게도 단 한 명의 무인에 의해서였다.
그가 바로 혈수신마였다.
이름을 몰라 그저 별호로 불리는 그는 사실상 광인(狂人)이었다. 말은 할 줄 알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았고 두 눈은 언제나 충혈되어 있었으며, 거지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더러운 외양을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거리를 방황하는 광인 그 자체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봐도 미쳤지만, 주변 사람에게 해를 가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흑사검문에 뛰어들었을 때, 세상은 경악했다.
한 시진.
고작 한 시진 만에 사파의 거두 중 하나로 명망 높았던 흑사검문이 말 그대로 박살이 난 것이다.
지워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검문 소속의 무사들은 물론 하인과 시녀, 어린애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렸으니.
비유가 아니라 기르는 개 한 마리 남기지 않았다. 흑사검문의 울타리 안에 있는 존재라면 남녀노소, 동물은 물론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몽땅 불태웠다. 도를 넘어선 끔찍함이었다.
그 일이 터진 직후 마도칠가(魔道七家)에서는 대대적으로 마인들을 급파하여 혈수신마를 잡으려 하였다.
그리고 파견된 마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마도칠가는 천마신교 본단에 연락을 취했고, 결국 십대마왕 셋이 나서서야 겨우 혈수신마를 죽일 수 있었다. 잡으려 했지만, 포박할 수 없음을 알고 별수 없이 죽인 것이다.
그 일로 마왕 셋 중 둘은 반년이 넘도록 거처에서 몸을 돌봐야만 했다.
혈수신마의 무공은 그렇게나 강하고 잔혹했다.
“죽은 그의 품에서 혈강수의 비급이 나왔네. 그런 꼴을 하고도 비급은 기어이 가지고 다닌 모양이야.”
“혈수신마가 그토록 강했다면 윗사람들이 익힐 만도 했을 텐데.”
도헌이 고개를 저었다.
“혈강수는 멀쩡한 몸으로 익힐 수 없는 마공일세.”
“왜 그렇소?”
“상단전(上丹田)을 건드리기 때문이야.”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상단전.
인간의 몸뚱이에는 총 세 개의 단전이 존재하니, 인체의 근본이 되는 것이 하단전이요, 마음의 근본이 되는 것이 중단전이고 혼의 근본이 되는 것이 상단전이라 하였다.
깊게 파고들면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기기묘묘한 것이 삼단전이지만, 적어도 상단전이 인간의 정신력과 영력(靈力)에 관여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혈강수의 극단적인 파괴력은 당대 신교의 어떤 마공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라네. 이것을 누를 수 있는 마공이라면 당대 교주님께서 익히고 계시는 자전마공(紫電魔功)과…….”
“…….”
“선대 교주님들이 익히셨던 천하제일마공(天下第一魔功), 천마지학(天魔之學)뿐이야.”
“천마.”
왜일까?
천마의 학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천상은 왠지 모르게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
이천상은 손으로 살짝 가슴을 눌렀다.
도헌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극단적인 파괴력을 생성해 내기 위해 상단전을 건드리는 것이 문제일세. 그런 면에 있어서 구결도 허술하기 그지없지. 혈수신마가 미쳐 버린 이유가 달리 있던 게 아닌 셈일세.”
“그렇군.”
수긍하다 말고,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더러 미치라는 것이오?”
“하하! 그럴 리가 있겠는가.”
도헌이 고개를 저었다.
“구결이 허술하다고는 했지만, 상단전을 건드리는 부분을 제외하고 보면 권장술(拳掌術)의 깊은 이치가 담겨 있네.”
“…….”
“나는 자네가 칼을 쓰기 전에 맨손부터 연마했으면 좋겠네.”
“왜 그렇소?”
도헌이 미소를 지었다.
“싸워 보면 알게 될 거야.”
“…….”
“뭐, 그런 이유도 있지만 혈강수의 비급을 준 것은…….”
쉬이 말을 잇기 어려운 듯, 도헌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잠시 침묵이 어렸다.
이천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마침내 도헌의 입이 열렸다.
“이것만 약속해 주게. 혈강수를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자신이 생기기 전까지는 절대 펼치지 말 것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자신을 얻으려면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지 않소?”
“맞네. 그래서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지 잘 알고 있어.”
도헌이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네. 솔직히 말하면, 그 마공은 금강야차마공보다 더하네. 금강야차는 무공 자체가 빼어남에도 건드리지 않지만, 혈강수는 말 그대로 금지 마공이야.”
“…….”
“적어도 그 상태로는.”
“본론이 무엇이오?”
“고칠 수 있겠나?”
그야말로 뜬금없고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무학은 문외한이오.”
“물론 아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확신할 수는 없소.”
“응?”
“앞으로 더 많이 배우겠지.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이 건드리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오.”
“그, 그렇지.”
“내가 이것을 익히다 미쳐 천마신교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힐까 불안한 모양이오. 물론 그러지 않겠소. 미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도, 세상을 배울 수도 없으니까.”
도헌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금강야차와 혈강, 두 가지 무공은 훗날 크게 쓸 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천상에게 두 개의 마공을 전부 건넸다. 자신의 미래 일부를 준 셈이었다.
꼭 그만큼의 신뢰와 최선을 다한 보은, 그리고 그를 앞서는 기대감. 그것이 이천상을 향한 그의 마음이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 담아 두고 있겠소. 자신이 생기기 전까지는 건드리지 않겠소.”
“고맙네, 내 뜻을 알아주어서.”
사실상 도헌의 행동은 지나치게 위험한 것이었다. 믿을 수 있다곤 하지만, 아이에게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다만 그는 그만큼 이천상에게 마음을 주었고, 이천상은 그의 마음에 보답하는 최고의 답변을 해 주었다.
언행일치. 이천상은 제 입으로 꺼낸 말을 절대적으로 지킬 것이다. 도헌은 그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마공서는 달달 외우도록 하게. 읽고 태워 버려. 두 마공의 구결은 나 역시 외우고 있다네.”
돌아오는 데 한 시진이나 걸린 것은 책자에 직접 쓸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도헌이 손뼉을 짝 쳤다.
“자, 줄 것을 주었으니 이제 앞날에 관해 얘기해 보도록 하세.”
“앞날이라면?”
“광마대에 들어오겠나?”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투마장에서 생활하며 천마신교 내부 조직이나 유명인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들은 정보는 절대 잊지 않았다.
도헌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광마대는…….”
“신교육대의 하나로서 내성 전투 부대의 정점을 달리는 조직이라고 알고 있소.”
“허허, 부끄럽구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도대체 왜 부끄럽다는 건지 이천상은 알 수가 없었다.
“자네 말마따나 광마대는 신교가 자랑하는 정상급 부대 중 하나야. 지금 자네 실력으로는 많이 부족하지만, 내 밑에서 배운다면 금방 성장할 수 있을 걸세. 게다가 자네에게는 금강야차까지 있으니까.”
“…….”
“함께하세. 꽤 힘들 수는 있겠지만.”
가만히 도헌을 바라보던 이천상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밑에 있으면 투마장을 없앨 수 있소?”
웃음이 나올 만도 하건만, 도헌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해졌다.
“본교에 잘못된 곳이 투마장 하나라고 생각하나?”
“……?”
“투마장 같은 곳이 버젓이 성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본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일세.”
“바로잡을 곳이 많다는 뜻이오?”
느낀 대로 뱉는 말이겠지만, 한 번씩 이천상의 말을 들을 때면 정말 핵심을 찌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네. 바로잡을 곳이 많아.”
“…….”
“자네가, 내가 그리고 우리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하네. 모든 면에서 성장해야 해. 그것도 빨리.”
“그렇군.”
“나는 자네가 광마대에 들어왔으면 하네.”
아무리 성격 좋은 도헌이라도 이천상이 아니었다면 의사 확인 따위 거치지 않고 수속을 밟았을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니까.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이천상에게 결정권을 주었다.
그를 존중하기도 했지만, 본인의 판단에 따라 일어날 일을 스스로 보고 깨우쳤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천상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좋은 생각 같지는 않소.”
“왜? 본대가 싫은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오. 신교육대는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 들어가는 부대라고 알고 있소.”
“그래서 자네가 들어왔으면 하는 걸세.”
“실력이 된다면 모를까, 지금 들어가 봤자 부대원들의 사기에 영향이 갈 거요.”
“그것은 내가 감당할 일이고, 나아가 자네가 감당할 일이야.”
“위험하지 않소?”
“세상 모든 일에는 위험이 동반되지.”
“옳은 일을 해야 할 순간에 부대원들이 당신을 따르지 않게 되어도 괜찮소?”
순간 도헌의 눈이 흔들렸다.
“상단에서, 그리고 투마장에서 배운 것이 있소. 하나로 똘똘 뭉친 집단은 외부인의 출입에 민감하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렇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은 별거 아니오. 문제는 당신이오. 나 하나 때문에 부하들과의 사이에 금이 간다면, 하나를 얻자고 백을 잃는 것과 같소.”
“…….”
“그래서 나는 광마대에 들어가선 안 된다고 생각하오. 당장에 자격도 없으니까.”
“그런가.”
“하지만.”
“……?”
“당신에게 나름의 생각이 있다면, 감수하고 들어가겠소.”
도헌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되겠나?”
“채무자가 건강해야 채권자도 마음을 놓을 수 있소. 그래서 거부했지만, 감당할 수 있는 문제라면 굳이 빠른 길을 돌아갈 이유는 없소.”
“……허.”
“감당할 수 있겠소?”
“하하하!”
도헌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암, 감당할 수 있지. 자네 하나 정도도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광마대의 대주라 할 수 있겠는가?”
“알겠소.”
“잘 선택했네. 그리고 고맙네. 날 믿어 줘서.”
자리에서 일어난 도헌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푹 쉬게. 상처도 치료해야 할 테니, 정식 입대서는 사흘 뒤에 작성하겠네. 그 안에 만반의 준비를 해 놓지.”
“알겠소.”
“그동안 자네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해. 업무가 끝날 때마다 찾아올 테니, 혹 마공과 관련해 궁금한 것이 있다면 질문하게나.”
“그리하겠소.”
“푹 쉬게. 내일 보세나.”
“쉬시오.”
도헌이 별실을 나갔다.
그가 나간 문을 물끄러미 보던 이천상이 시선을 돌려 두 권의 비급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금강야차마공이 아니었다.
바로 혈강수였다.
“……상단전.”
* * *
관계를 쌓고 신뢰로 엮여 눈부신 앞날을 꿈꾸는 이들.
세상에 그런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빛나는 미래를 맞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틀 뒤 정오, 광마각.
“어디서 오셨소?”
“형법당에서 왔소.”
형법당 일 조장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소환장이오. 광마대주를 불러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