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6화. 야차행(夜叉行) (1)
과연, 도헌은 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이것저것 건드릴 게 많더군.”
턱으로 대문을 가리키는 도헌의 표정에는 일말의 긴장도 보이지 않았다.
“가세.”
가만히 도헌을 노려보던 전오가 조원을 불렀다.
조원이 허리춤에서 굵고 푸른 줄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청귀승(靑鬼繩)이라는 것으로 형법당에서 마인을 포박할 때 쓰는 물건이었다. 밧줄 자체에 마기를 억제하는 공능이 있어, 유사시에 마인의 난동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양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도헌이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 가지.”
전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본당의 절차를 거부하실 셈입니까?”
“대질을 하려던 거 아닌가? 그런 사람을 청귀승으로 포박까지 하시겠다고?”
“반쯤 죄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에 하나를…….”
“전오라고 했나?”
도헌이 미소를 지었다.
냉랭한 눈빛에 입가만 움직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심장이 떨릴 듯한 살벌한 미소였다.
“설마하니 자네는 내가,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이나 칠 위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겐가?”
전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도헌의 눈빛에 기가 꺾이려는 것을 혼신의 힘으로 버티는 것이다.
“우리는…….”
“묶어서 갈 텐가? 진심으로?”
“…….”
“아주 재미있군.”
도헌이 양팔을 내밀었다.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겠네.”
모멸감과 두려움에 전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형법당의 위세 덕에 으스대고 있지만, 그렇다고 광마대주의 이름값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온 것도 광마대주의 이름값 때문이었다. 천하의 형법당이라도 내성 마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경력 떨어지는 조장을 보내 대주급 인사를 포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광마대주 도헌은 육대 대주는 물론 내성 간부급 마인을 통틀어 온후한 성품으로 유명한 자.
이참에 기세를 꺾어 버릴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일 조장인 자신이라 직접 왔지만, 이렇게 살벌하게 나오는 도헌을 작정하고 포박하는 것은 전오 입장에서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한참 동안 도헌을 바라보던 전오가 짓씹듯 말했다.
“대주님의 명예를 믿겠습니다.”
도헌이 유쾌하게 대답했다.
“그걸 알아주니 고맙구먼.”
전오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가자!”
그렇게 도헌은 형법당 일 조 조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광마각을 나섰다.
대문을 넘어가기 전,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흔들리는 눈빛 속, 숨길 수 없는 놀라움과 걱정이 가득했다.
* * *
내성을 가로질러 형법당으로 향하는 도헌의 모습을 수많은 마인이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괜한 말을 입에 담다가는 형법당원들의 눈에 찍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본 도헌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숙덕이는 것이 과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쥐 죽은 듯 눈동자나 굴리는 것이 중원에 공포로 이름을 떨친 호승심 넘치는 마인들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지금의 마인들은 그저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에, 혹은 괜히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에 급급할 뿐이었다.
마인도 사람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형법당원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광경을 보며, 도헌은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용맹하기 그지없던 과거의 우리는 다 어디로 가 버린 것인가.’
형법당으로 향하는 길은 꽤나 길었다.
단순 거리만 생각하면 그리 길지 않았지만, 전오는 일부러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도헌이 형법당원들에게 둘러싸인 광경을 내성 마인들 모두에게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무척이나 치졸한 짓이었지만, 도헌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그들과 함께 걸었다.
그들이 형법당에 도착한 것은, 광마각에서 떠난 지 한 시진이 지난 후였다.
끼이이익.
조사실의 문이 열렸다.
도헌은 눈을 감은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저벅저벅.
절도 있는 걸음걸이.
차가운 기세를 풍기며 도헌의 맞은편에 선 사람은 형법당의 일급 수사관 항회였다.
탁!
간결하면서도 무정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제 탁상 위에 보란 듯이 서류들을 던진 항회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도헌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항회가 딱딱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형법당 일급 수사관 항회라고 하오.”
상당히 위압적인 말투였다.
하지만 딱히 무례를 저지르는 건 아니었다. 조사실로 들어오는 이들 앞에서 항회는 항상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수사관 모두가 그러했다. 상대에게 기가 눌리면 제대로 된 조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질에 앞서 신분 확인부터 하겠소.”
서류를 뒤적거리던 항회가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신교육대, 광마대의 대주 도헌 맞소?”
도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회의 눈이 가늘어졌다.
“묻는 말에 직접 대답하시오. 성명 도헌, 맞소?”
“맞네.”
“나이 올해로 삼십칠 세. 십삼 세에 입교하여 외전 향마당(向魔堂) 입당. 이후 십팔 세에 귀검단(鬼劍團)에 입단하여 교외 전투에서 총 이십칠 회의 공(功)을 세움.”
“…….”
“이십 세에 귀검단 조장으로 승진. 이십삼 세에 귀검단 부단주로 승진. 이십칠 세에 귀검단주로 승진.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이십팔 세에 내성 전(前) 육대 중 혈마대(血魔隊)에 입대.”
“…….”
“복건 녹검문(綠劍門) 전투에서 부문주의 목을 베어 광마대 삼 조장으로 승진. 이후 협검신장(俠劍神掌) 추적대에 참가하여 목표물의 제자 둘과 목표물 협검신장을 제거하여 삼십이 세에 광마대 부관으로 승진.”
“…….”
“이후 삼십오 세에 광마대주로 승진. 맞소?”
“맞네.”
“가족 관계 없음. 맞소?”
“맞네.”
가만히 서류를 들여다보던 항회가 깍지를 끼고 도헌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소환되었는지 알고 있소?”
“확인 끝났나?”
“묻는 말에 대답하시오. 무슨 일로…….”
“끝났으면 당주를 모셔 오게.”
항회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질문 이외의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경우 수사 협조 방해로 죄가 추가될 것이오. 다시 묻겠소. 무슨…….”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훅!
도헌의 서늘한 안광이 항회의 눈빛을 그대로 꿰뚫었다.
“당주 모셔 와. 날 보고자 하셨을 터이니.”
항회는 말없이 도헌을 노려보았다.
도헌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그의 눈빛은 서늘하다 못해 싸늘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항회가 고개를 숙였다.
“수사 협조 방해죄 추가요.”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난 항회가 서류 뭉치를 들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살짝 창백해져 있었다. 마기를 봉쇄당했는데도 도헌의 눈빛은 쉽사리 버틸 만한 종류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사관으로서의 자존심, 그간의 숱한 경험이 없었다면 벌써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을 것이다.
도헌이 다시 눈을 감았다.
항회가 으르렁거렸다.
“천하의 육대 대주라도 이곳에서는 어깨에 힘 좀 빼셔야 할 거요. 이곳에서는 내성의 원주급 인사들도 쉽게 나가지 못하오.”
도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항회의 눈가에 미약한 경련이 일었다. 아무 긴장도 없는 도헌의 모습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쿵!
신경질적으로 닫힌 문소리가 유독 컸다.
한참 동안 그 자세를 고수하던 도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람 참 수고롭게 하는군.”
그렇게 반나절이 흘렀다.
그 시간이 지나도록 도헌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자세도 바꾸지 않았다. 마치 천년 세월을 버티고 있는 바위처럼 미동도 없는 그의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드르륵.
천천히 열리는 문.
번쩍!
도헌의 눈이 뜨였다.
“어이쿠! 이거 오랜만일세그려.”
능글맞은 말투와 함께 항회가 앉아 있던 자리로 걸어오는 사람은 도헌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중키의 중년 사내였다.
화려한 붉은색 비단옷에 손목에는 금팔찌를 둘렀다. 곱게 넘긴 머리칼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향낭이라도 품었는지 꽤 진한 향기가 났다.
그야말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살벌한 조사실에 도통 어울리는 외양이 아니었다.
“천하의 광마대주를 이런 곳에서 뵐 줄이야. 허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 아닌가.”
약간의 바람 섞인 목소리가 의외로 인자하게 들린다.
도헌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소이까.”
“잘 지내다마다. 당주가 되고 나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좀 바쁘긴 했지만 말일세. 이런 게 성공의 맛인가 싶어.”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
여유 넘치는 목소리와는 달리 외양이나 행동은 졸부가 따로 없었다. 적어도 도헌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여전하군.’
형법당주 공무외.
어디서 흘러 들어왔는지 모를 낙하산 인사가 그였다. 실제로 공무외가 신교 내 업무를 언제부터 맡았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그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형법당에 들어왔고 일개 당원에서 석 달 만에 수사관으로 승진, 이후 일 년 만에 조장이 되었다는 것은 내성에서도 꽤나 유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삼 년.
조장에서 부당주가 되기까지 삼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부당주에서 당주가 되는 데에는 고작 이 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당원으로 들어온 지 육 년하고도 삼 개월 만에 형법당 최고 수장 자리를 꿰찬 사람이 바로 공무외였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이런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는지, 도헌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온갖 비리가 오고 갔다는 것만 짐작할 뿐.
“어떤가, 조사실 공기는.”
코를 킁킁대는 공무외의 모습은 형법당의 수장이라는 작자답지 않게 경박스러웠다.
“별로 좋지 않지? 환풍에 신경 쓰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 텁텁하구먼. 청소 좀 잘하라고 했더니만, 해도 해도 잘 안되는 모양이야.”
“나를 잡아들이실 생각이오?”
“으응?”
공무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잡아들이려 하다니? 신고자가 있었고 조사가 있었네. 그 과정에서 죄를 저지른 것이 밝혀져 이 자리에 있는 거라네.”
“그렇구려.”
“설마하니 자네, 내가 일부러 없는 죄까지 만들어서 이 자리로 끌고 왔다 생각하는가?”
공무외의 표정이 보란 듯이 우울해졌다.
“이 사람,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나 섭섭하네. 아무리 우리 사이가 남보다 못하다지만, 천하의 광마대주를 어찌 그리 막 대하겠나?”
말투와 표정, 행동거지 모두가 과장되었다.
공무외는 지금 상황을 철저하게 즐기고 있었다. 더 빨리 올 수도 있었음에도 일부러 늦게 온 것 또한 지금의 우월감을 몇 배로 더 달달하게 느끼기 위함이었다.
도헌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 보라고 한다면 죽었다 깨나도 못 할 만큼 저열한 짓이지만, 많은 마인이 이처럼 못난 모습을 보여 준 걸 질리도록 봐 온 그였다.
“그나저나 자네, 좀 심했네. 자존심이 상했기로서니 본당의 조장을 무시하고 수사관에게 대들기까지 했어.”
공무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본당이 없는 죄도 만드는 악랄한 곳이라지만, 조사 과정에서 자네가 저지른 죄는 너무 명백하네. 광마대주라도 그만한 죄를 없는 셈 칠 수가…….”
“마음 같아서는 다 즐기실 때까지 기다리고 싶소만, 이쪽도 이쪽 사정이 있는지라.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소.”
“……오호라?”
공무외의 눈빛이 뱀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이건 또 의외의 반응이로고. 신선하기 그지없구먼. 설마하니 잡혀 들어온 몸으로 이런 당당함을 보여 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뭔가.”
“나도 내가 이렇게 당당할 줄은 몰랐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구먼?”
도헌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죄, 여기서 다 묻어 둡시다.”
공무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당함이 과하다 못해 철철 넘쳐흐르는데?”
“그렇소?”
“고양이가 쥐 생각해 줄 수는 있지만, 쥐가 고양이에게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네.”
“고양이가 어디 쥐만 잡아먹는다 하더이까. 물고기도 먹고 참새도 먹는 법이지.”
공무외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실로 들어온 이후 처음 보이는 솔직한 반응이었다.
“쥐라…….”
“…….”
“어쩐지 내 직감에, 오늘 많이 놀라게 될 것 같으이.”
“잘 보셨소.”
“자네, 내성 윗분들께 선이라도 닿았나? 그게 아니고서야 내 앞에서 이리 배짱을 부릴 수가 없는데.”
“그 윗분 중 한 분에게 줄 좀 던져 볼 생각이오.”
“……?!”
도헌이 웃으며 말했다.
“광마가 형법 아래로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이 있으시오?”
공무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