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화. 합리와 공포 (2)
사 조의 최고 선임, 동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동후의 뒤에서 얼굴을 살벌하게 일그러뜨리고 있던 방효와 지대건이 발끈했다.
“저 새끼가!”
“그만해.”
날카롭게 반응하는 방효를 물린 동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별실에서 지내는 녀석이냐?”
그다지 곱지 않은 목소리였다.
이천상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몸을 풀었다. 꽤 긴 수련으로 몸에 열이 났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 볼 생각이었다.
이천상을 빤히 노려보던 동후가 한층 스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관님께 들었다. 해시 이후로 이곳에서 수련할 수도 있다고.”
이천상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동후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이미 더 합리적인 수련 방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자식이.’
칼을 쥔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차마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주가 신경 쓰는 녀석이라지 않나.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만, 이런 일로 부딪쳐서 좋을 놈이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열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주님께서 신경 좀 써 주신다고 콧대 세우지 마라. 너처럼 건방을 떨다가는 오래 살아남지 못해.”
스륵.
몸을 풀던 이천상이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순간 동후는 움찔했다.
달빛을 받아서인가? 아니면 원래 그런 색일까.
유독 파랗게 보이는 눈이었다.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직시하는 날것의 시선이나, 감정이라곤 담기지 않은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었다.
“이 새끼가…….”
동후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그러고도 이천상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되레 고함을 지른 동후가 더 놀랐다. 고작 쳐다본 것 하나로 평정심을 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뭐야?’
동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이천상은 정말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았다. 마치 눈 깜빡이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쳇!”
동후가 몸을 돌렸다.
“별 재수 없는 자식이 다 있군.”
투덜거리다 말고 사납게 칼을 꼬나쥔 방효와 지대건과 눈이 마주친 동후가 다시금 외쳤다.
“뭐 하고 있어? 다시 휘둘러! 그따위 실력으로 후배 새끼들하고 경쟁할 수 있겠어!”
“예!”
즉시 기세를 누그러트린 두 사람이 재차 도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 조에서도 사납기로 유명한 두 사람이지만, 무공을 수련하는 자세만큼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동후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이천상은 아직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할 말이라도 있나?”
비로소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소.”
동후가 코웃음을 쳤다.
“신경 끄고 네놈 할 일이나 해라. 다만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애먼 칼에 당하고 싶지 않으면.”
유치한 자리싸움이 아니었다.
일류에 이른 고수들이 수련에 매진하다 보면 도검에서 흘러나오는 예기만으로 사람의 살갗을 상하게 할 수 있다. 특히나 방효와 지대건은 신체적 약점을 마공 단련으로 메운 이들이었다.
몰입하다가 검풍(劍風)이라도 흘러나오면 관전자도 다칠 수 있다. 물론 실력이 없는 자일 경우지만.
이천상은 연무장 중앙에서 살짝 벗어났다.
연무장 자체가 워낙 넓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곳곳에 길을 막는 대나무들이 없어 훨씬 더 자유롭게 몸을 놀릴 수 있을 것이다.
‘기묘하군.’
거리를 벌리고 자세를 낮추며, 이천상은 조금 전 광마대원들의 반응을 떠올렸다.
‘소위 곤두선다는 것인가.’
진검으로 실전처럼 하는 수련이다. 실제로 방효와 지대건의 몸에는 자상이 몇 군데 나 있었다. 조금 전 수련을 하다가 베인 것이 분명했다.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수련을 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곤두설 수밖에 없다.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천상으로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아사 직전의 상황, 의식이 흐릿한 상황에서도 그를 움직인 것은 본능에 가까운 이성이었다.
맹수와 싸울 때도, 투마들과 싸울 때도 감정이 앞선 적이 없었다. 아니, 어떤 감정이 일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아직 멀었어.’
관찰하기 시작하면 상대의 기분과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면 상대의 기분과 행동을 조금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보고, 생각하고 정리를 해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천상이 눈을 감았다.
‘무공과 비슷하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일격이 곧 일격필살이 되어야만 한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비슷했다. 보는 즉시 상대의 감정을 읽고 행동을 예측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읽을 수 있고, 나아가 얻을 수 있다.
다르지만 같다. 같지만 다르다.
‘싸움, 전투라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하는 거야.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처럼.’
스르륵.
천천히 눈을 뜬 이천상의 눈에 은은한 광채가 어렸다.
‘답은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 있었다.’
훅!
금강야차마공이 개방되며 묵직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마력에 흠칫 놀란 동후가 다급히 몸을 돌렸다.
자세를 낮춘 이천상이 천천히 주먹을 지르고 있었다.
동후의 눈이 흔들렸다.
‘투마장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일순간 공기의 흐름을 바꾸는 마기.
그 양이 결코 많지 않았지만, 마기의 질만큼은 상당했다. 실제 실력을 떠나 기의 농도만큼은 광마대 대원들과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저놈……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어.’
투마 출신이라고 들었을 때, 동후는 내심 이천상을 멸시했다.
그만이 아니라 광마대 모두가 그랬다. 그들은 신교의 정예 부대에 들어오기 위해 검증된 일류의 기재들이었다. 천한 투마장 출신과 동급이 아닌 것이다.
핏줄이 좋다고 일류가 아니다. 재능이 좋아야 일류다.
광마대원들 모두가 그런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었다. 이천상을 하찮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데 막상 눈앞의 마기를 보니, 이놈도 보통은 아니었다.
‘대주님께서 눈여겨볼 만한 재능이다, 이건가?’
날 선 눈으로 이천상을 노려보다, 동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지금은 저놈보다 방효와 지대건이 더 중요했다. 동후는 다시 두 마인의 자세와 기세를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파앙! 파앙!
허공을 때리는 이천상의 주먹이 파공성을 내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는 안 돼.’
대숲에서 행했던 수련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그저 무공의 형(形)에 익숙해지는 것에 불과했다.
‘형태에 익숙해져도 응용이 안 되면 춤사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응용은 상대의 수가 늘어날수록 함께 가짓수를 늘린다.’
순간 이천상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일 장 거리를 한 걸음으로 좁힌 그가 상체를 틀고 깊게 일권을 넣었다.
붕!
날카롭고도 둔탁한 소리.
‘들어갔다.’
이천상이 떠올린 것은 투마장에서 도끼를 휘두르던 갑조의 마인이었다.
그 마인이 취했던 동작이 생생했다. 그 생생함을 눈앞에 두고 똑같은 공격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상상의 마인은, 이번 일격으로 우측 갈비뼈가 모두 부러졌고 간장(肝臟)과 우측 폐가 통째로 뭉개져 버렸다.
번쩍!
상상력으로 만든 상대는 또 있었다. 투마장 대기실에서 자신을 노렸던 투마 셋이었다.
등 뒤 삼방(三方)에서 공격해 오는 마인들.
이천상의 몸이 기괴하게 움직였다.
붕! 붕! 파앙!
두 놈의 흉골을 부쉈고, 남은 하나의 귀를 쳐 뇌를 파괴했다.
한 호흡에 셋을 죽였다. 변형되기는 했지만, 지금껏 연마한 금강야차마공의 권법 금강마권(金剛魔拳)이었다.
‘이거다.’
금강마권의 권형(拳形)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신체 중심의 이동만으로 상상의 적들을 죽였다. 그것도 일격일살(一擊一殺)이었다.
‘바로 이렇게 해야 나보다 실력 좋은 이를 죽일 수 있다.’
이천상이 연이어 움직였다.
그는 지금껏 많은 상대와 싸워 왔다. 저잣거리 파락호와도 싸웠고 짐승과도 싸웠다.
투마장의 투마들과도 싸웠으며 심지어 광마대주인 도헌과도 비무를 벌였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이천상의 의지 아래 보이지 않는 상대가 되었다.
놀랍게도 이천상은 그들의 얼굴을, 특성을, 무공의 힘과 속도를 하나하나 기억했다. 그 비상한 기억력은 크나큰 깨달음이 되어 그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나아가.
언제나 무심해 목석처럼 보였던 이천상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배우고, 무언가에 몰입하고, 그것을 몸에 붙이는 과정에서 얻는 기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그 기분이 이천상의 얼굴에 변화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
홀로 몰입하여 가상의 적과 싸우고 있는 이천상. 마침 휴식을 취하다 그 광경을 본 방효와 지대건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병신 같은 춤이 따로 없군. 뭐 하는 짓이야, 저게?”
방효는 대놓고 이죽거렸다.
조용하던 지대건도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힘은 좋은 것 같은데 자세가 너무 엉성하군요. 도대체 뭘 수련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투마 출신이라잖냐. 그쪽에서 배운 체조라도 되는 모양이지.”
그때, 동후가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예?”
“너희 눈에는 저게 춤으로 보이냐고 물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아무리 봐도 무공 같진 않습니다만…….”
“저도 그렇습니다. 권법이랍시고 내지르는 것 같은데, 중심축이고 뭐고 다 무너져 있잖습니까.”
동후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방효와 지대건은 괜스레 떨떠름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희가 그러니까 후배들에게 추월당할까 무서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다.”
“……예?”
“실전을 치를 만큼 치렀다는 놈들이 보는 눈이 그렇게들 없는 거냐?”
두 사람이 당황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둘을 보며 작게 혀를 찬 동후가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저놈, 가상의 상대를 만들고 일격필살로 죽이고 있다. 권형(拳形)을 상대에 따라 즉각 변형시키고 있어.’
일권일살(一拳一殺), 일장일살(一掌一殺).
주먹질 한 번, 손바닥 한 번에 적의 급소를 꿰뚫어 죽이고 있다.
그것도 세 개의 초식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상황에 따라 중심이 되는 초식만 실전으로 변형시켜 상대를 무너트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가 심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한 변화를 보이고도 초식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미친놈이 따로 없구만.’
동후가 두 사람을 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열심히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보는 눈이다. 광마대원으로서 최소한의 안목부터 길러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몸을 돌렸다.
지대건이 물었다.
“어, 어디 가십니까?”
“바보들 가르치느라 속이 다 뒤집히는 것 같다. 땀 좀 식히고 올 테니 수련 시작해. 오늘 내로 열아홉 초식을 분화시키지 못하면 나도 포기한다.”
그 말을 끝으로, 동후가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방효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지대건의 표정 역시 좋지 못했다.
잠시 후.
‘좋아.’
파아아앙!
찍어 누르듯 내친 장타(掌打)에 범의 머리통이 깨졌다.
이천상이 가볍게 숨을 골랐다.
‘다음은 네 번째 초식으로 처음부터…….’
그때였다.
쉭!
한 줄기 파공성을 들은 이천상이 재빨리 몸을 회전하며 권배를 휘둘렀다.
퍼석!
길쭉한 목검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이천상이 방효를 바라보았다.
목검을 던진 자세 그대로 방효가 씩씩거렸다.
“이 새끼가 사람 말하는 게 안 들리나. 몇 번을 불렀는데 무시를 해?”
이천상이 단조로운 어조로 물었다.
“볼일이라도 있소?”
“들어와.”
“……?”
“들어와 보라고.”
파앙!
기세 좋게 제 허벅지를 두들긴 방효가 웃으며 손을 까닥였다.
“춤인지 권법인지 확인 좀 해 보자. 칼 안 쓸 테니까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