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3화. 합리와 공포 (3)
보란 듯이 자세를 낮추는 방효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이천상은 말없이 방효를 바라보았다.
“뭐해? 한번 들어와 보라니까.”
“…….”
“그렇게 허공에다 주먹질 좀 한다고 무공이 늘겠냐? 직접 치고받아 봐야 네놈 실력이 얼마나 어설픈지 알지.”
방효가 손을 까딱였다.
“삼 초는 접어줄 테니까 부담 없이 덤벼 봐라.”
상대의 자존심을 살살 긁는 말투였다.
하지만 이천상은 그의 말에 화를 내지도, 떨떠름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방효의 말에 공감했다.
‘맞는 말이다.’
제아무리 몰입한다 해도 허상은 허상이다.
진짜 적은 자신이 상상한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가 떠올린 상대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가 패자들이었다.
한번 꺾은 적들과 상상으로 싸워 봤자 큰 발전은 없을 것이다.
“왜? 무섭나?”
이죽거리는 방효의 몸에서 은은한 마기가 일었다.
상대가 얼어붙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세를 꺾었다 여기자, 그 쾌감에 자극받은 마기가 자연스레 활성화되었다.
확실히 방효는 일류답지 않았다. 안목이 낮은 것도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상대에게 둔감했다. 그보다 수준 높은 동후조차 이천상의 눈빛에 섬뜩함을 느꼈건만, 방효는 그조차 읽지 못했다.
“투마장에서 제법 날렸다며? 남들 모가지 턱턱 따 낼 용기는 있어도 네 모가지 걸 용기는…….”
“장담하지 못하오.”
“무슨 말이냐?”
“내 무공은 섬세하지 않소. 싸우다 죽을 수 있소.”
“……?”
이천상이야 괜한 사건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이지만, 듣는 방효 쪽에서는 무시당했다고 여기기 충분했다.
사아악.
넘실거리는 마기 위로 괴악한 살기가 드러났다.
방효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대단한 자신감이구만. 그 춤사위 같은 무공으로 내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 봅시다.”
스르륵.
지대건이 뒤로 물러나며 팔짱을 끼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이천상의 언행이 불쾌한 듯 눈빛이 살벌했다.
‘싸우다 죽을 수도 있다고?’
방효의 눈이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건방진 새끼.’
기세는 그럴듯했지만, 그래봤자 투마 출신인 놈이었다.
저따위 얼치기한테 당할 만큼 허투루 수련하지 않았다. 일류의 재능, 일류의 무공은 물론 온갖 사선을 넘나든 역전의 용사들이 광마대 아닌가.
‘마음 같아선 작살을 내 놓고 싶지만.’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녀석이 대주님이 아끼는 놈이라는 사실도 잊지는 않았다.
‘사지 중 두어 개는 부러질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정식 대련이다. 대련에는 항상 사건 사고가 터지는 법. 그 정도는 윗선에서도 이해해 줄 것이다.
방효가 다시 한번 손을 까딱였다.
“덤벼.”
훅!
이천상이 방효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움직인다. 몸 상태를 점검하거나 긴장을 푸는 등의 동작 따위는 전혀 없었다. 상대의 자세를 살피는 눈치도 없었다.
내심 놀라면서도, 방효는 혀를 찼다.
‘역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다가온 것 자체가 하수라는 뜻이다. 생각보다 훨씬 빨랐지만, 그럴듯한 보법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이천상이 주먹을 휘둘렀다.
훅!
하단에서 사선으로 뻗어 나가 중단을 노린다.
상당히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방효의 왼팔이 이천상의 주먹을 가볍게 쳐 냈다.
터어엉!
이천상의 주먹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방효가 씨익 웃었다.
“일 초.”
쐐애애액!
튕겨 나간 방향 그대로 회전한 이천상의 발이 방효의 턱을 노렸다.
유연하기 그지없는 공격이었다. 작은 덩치가 아닌데도 빠르고 정확하다.
방효의 움직임은 기민했다.
파앙!
고개를 젖히는 것만으로도 그 날카로운 일격을 피해 낸 방효의 눈이 깊어졌다.
‘이것 봐라?’
중단을 노린 일 초, 회전하며 상단을 노린 이 초.
첫 번째 공격보다는 두 번째 공격이 훨씬 더 과격하고 예리했다.
뭐가 됐든, 예상했던 것보다 수준 높은 움직임은 분명했다. 일말의 방책도 없이 무턱대고 덤벼든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슥!
거리를 벌린 이천상이 다시 방효를 향해 돌진했다.
‘…….’
방효의 눈빛이 돌변했다.
‘뭐지.’
역시나 신묘한 보법 따위는 없다. 나름대로 단련된 육체를 마기로 강화해 달려드는, 잘 쳐줘야 이류의 실력이었다. 빨랐지만, 방효의 눈에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문제는 이천상의 자세였다.
‘그냥 달려들어?’
주먹질을 하든, 발길질을 하든.
서 있든 달리든, 어떤 공격을 염두에 두느냐에 따라 무게 중심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고수라면 상대의 중심이 어떤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다음 공격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천상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주먹질을 할 것 같기도 하고, 발길질을 할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이게 마지막이다.’
터어엉!
지근거리로 접근한 이천상이 순간 뒤로 중심을 빼고 다리를 휘둘렀다. 하단, 허벅지를 노리는 각법이었다.
방효가 빠르게 다리를 들었다.
퍽!
그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다리를 들어 각법을 막았다. 단련된 육체와 강력한 마기 덕에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막강한 위력이었다.
방효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쿵!
각법을 맞은 다리가 쭉 펴지며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훅!
벼락처럼 거리를 좁힌 방효가 이천상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삼 초가 끝나자마자 목을 노리는 살초가 날아온다. 그리 빠르진 않았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일 초였다.
그때였다.
이천상의 상체가 우측 하단 사선으로 움직였다.
‘……?!’
방효는 깜짝 놀랐다.
‘읽었어?’
공격을 보고, 인지하고 움직인 게 아니었다.
손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절반도 채 지우기 전에 움직였다. 미리 읽지 못했다면 선보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이 새끼 봐라?’
허공을 찌른 방효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이천상의 등판을 노렸다.
그때였다.
퍽!
방효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손은 이천상의 등판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천상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를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피한 게 전부가 아니라 공격까지 준비했던 것이다. 이전보다 훨씬 빠른 권격이었다.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공으로 보호되고 있어 내상을 입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상체가 오그라들 정도의 강한 일격이었다.
퍼벅!
공격은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천상의 쌍권이 방효의 명치를 연달아 쳤다. 묵직한 맛은 떨어졌지만, 속도 하나는 발군이었다.
방효가 이를 악물었다.
치명상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충격이 남았다. 하수라고 얕본 놈에게 세 번이나 공격을 허용했다. 육신보다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다.
퍼어어억!
과격한 슬격(膝擊)에 이천상의 몸이 살짝 떠오르며 밀려 나갔다.
하지만 방효의 공격은 이천상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슬격이 날아올 걸 어떻게 알았는지, 양팔을 겹쳐 막아 충격을 상쇄해 버린 것이다.
스르륵.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는 이천상.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했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반면 방효의 얼굴은 확연히 일그러져 있었다. 충격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호흡 역시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지대건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제대로 좀 해! 왜 그따위 공격을 허용하는 거야?”
의아함과 한심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지대건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제삼자가 보기에 이천상의 공격은 썩 날카로웠으나,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른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그냥 맞아 준 게 아닌가 싶었지만, 방효의 표정과 기세를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정신 차려! 하수라도 대련은 대련이야!”
“알아!”
방효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일갈하곤 이천상을 노려보았다.
‘뭐야? 내가 왜 당했지?’
실력이 좋은 놈이다. 예상보다 훨씬 더.
하지만 주먹에 실린 무게감이 약했다. 적어도 광마대원에게 통할 수준은 아니었다.
분명한 하수다.
새삼 그 사실을 인지한 방효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제법 한 수는 있었군. 춤사위치고는 예리했…….”
순간 그의 눈에 살기가 치솟았다.
이천상은 자세를 잡고 있지 않았다. 팔목과 발목을 살살 돌리며 몸을 푸는데, 진지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고수를 앞에 두고도 긴장하지 않는다. 방효의 가슴에 불이 붙었다.
“삼 초 안에 쓰러트려 주마.”
파아아악!
분노가 가득 담긴 선공이었다.
확실히 이천상의 움직임과는 달랐다. 분노하는 와중에도 나아가는 일보(一步)에 공방을 담았다. 상당히 수준 높은 보법이었다.
쐐애애액!
방효의 수도(手刀)가 이천상의 빗장뼈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
찰나의 순간, 방효는 기겁했다.
‘들어왔어?!’
막든 피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거라 생각했다.
이천상은 그 어느 선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를 내리치는 와중에 마주 달려 품으로 파고드는데, 손날 범위 안쪽으로 들어와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가 없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왜 읽히지 않지?’
이천상의 팔꿈치가 방효의 명치를 내리찍었다.
빠각!
자세가 흐트러진 방효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이번 일격은 실로 막강했다. 상반신 전체가 마비되고 오금에 힘이 빠졌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혀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 수 위의 실력자라고 한들, 같은 부위를 세 번이나 적중당하고도 멀쩡하긴 힘들다. 하물며 이천상의 공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파악!
숨을 못 쉬고 물러나는 와중에도, 방효는 공격을 가했다.
중단을 쓸어 가는 각법이었다. 자세가 무너졌음에도 이처럼 빠른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경험의 소산이었다.
과연 광마대원이라 할 만했다. 이 자세, 이만한 고통 속에서 동작이 큰 각법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천상이 그것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쿵!
진각을 밟은 이천상의 주먹에 은은한 금빛 마기가 실렸다.
이천상의 주먹이 중단을 쓸어 오는 방효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콰득!
“크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방효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각법을 반사적으로 내친 것은 대단했지만, 그래서 마기를 제대로 싣지 못했다. 만반의 준비를 한 이천상의 주먹에 정강이가 부러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으으윽!”
쓰러진 방효가 덜덜 떨며 정강이를 매만졌다.
“후욱!”
가볍게 숨을 내쉰 이천상이 자세를 풀었다.
‘이겼다.’
이천상이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에 강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마기를 제대로 싣지 않았는데도 정강이에서 느껴지는 경도가 대단했다.
조금만 마기를 덜 실었으면 상대의 정강이가 아니라 자신의 손이 부러졌을 것이다.
‘과연.’
이 한 번의 승부.
짧지만 꽤 격렬했던 방효와의 승부로 인해, 이천상은 깨달았다.
‘칼을 놓고 맨몸부터 쓰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군.’
그때까지도 쥐고 있던 주먹을 푼 그가 방효에게 말했다.
“승부는 났소.”
“크으윽! 이, 이 개자식이 감히 내 다리를……!”
방효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천상은 지대건을 바라보았다.
얼이 빠진 듯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그의 얼굴은 꽤 볼만했다.
이천상이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도 싸울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