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4화. 합리와 공포 (4)
순간 지대건의 눈에 시퍼런 살기가 돌았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겨우 참은 그가 방효에게 다가갔다.
“괜찮나?”
“빌어먹을! 이게 괜찮아 보여?!”
지대건이 방효의 정강이로 손을 가져다 댔다.
“참아.”
뚝!
방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부러진 뼈를 곧장 맞출 수는 없었다. 실력이 뛰어난 절정고수라면 내기로 뼈를 맞춰 일시적으로 경화시킬 순 있지만, 아직 그들에게는 요원한 경지였다.
부러진 그대로 붙여 놓고, 내공을 퍼부어 치유력을 올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기를 집중해. 어떻게 부러졌는지는 네가 잘 알 거야. 잘못 붙지 않게 잘 조절해.”
방효를 들어 연무장 아래 앉힌 지대건이 이천상을 쏘아보았다.
“반 각만 기다려. 혈혼각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너?”
살의 그득한 목소리에 방효의 눈이 커졌다.
“자존심이 있지, 그냥 물러날 순 없잖아?”
“…….”
방효가 이를 악물었다.
그 역시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천상의 목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패자는 그였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리만 부러지지 않았어도 당장 칼을 뽑았을 것이다.
“저놈 이상한 사술을 쓴다.”
“사술?”
“정확히는 뭔지 모르겠어. 저 새끼, 분명 하수인데 어딜 공격할지 보이지가 않아.”
지대건이 피식 웃었다.
“그런 게 사술이라고? 밖에서는 다 보이더만.”
주르륵.
꽉 깨문 방효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자존심이 상했고 화도 났다.
그 역시 이천상이 사술을 쓴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사술은 마공을 익힌 마인에게 잘 통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사술 운운한 스스로에게 혐오감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결과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가 방심한 거야. 방심만 하지 않았으면 이런 꼴은 안 당했을 거야.”
한심하다는 투였지만, 방효의 자존심을 챙겨 주는 말이기도 했다.
방심만 하지 않았다면 당하지 않았다. 즉, 실력이 아래라서 당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걱정 말라는 듯 방효의 어깨를 툭툭 친 지대건이 다시 연무장 위로 올라왔다.
“별로 지친 것 같지는 않군.”
묵묵히 그를 보던 이천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르릉.
지대건이 칼을 뽑았다.
“나는 맨손에 재능이 없다. 할 줄 아는 건 칼질뿐이야. 그래도 하겠나?”
“결정은 당신 몫이오.”
“뭐?”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오.”
건방진 새끼.
지대건이 차갑게 웃었다.
“칼을 뽑은 이상 무조건 피를 보게 될 거다. 죽어도 후회하진 마라.”
우우우웅!
이천상의 양 주먹에 은은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대답은 그걸로 끝이었다.
지대건의 눈빛이 돌변했다.
파아아악!
먼저 움직인 것은 지대건이었다.
방효처럼 삼 초를 접어준다거나 맨손으로 싸우지 않는다.
그는 절대 방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죽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번쩍!
지대건의 칼이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단숨에 이천상의 빗장뼈를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첫 일격부터 진심이다. 속도와 예리함이 방효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훅! 파악!
급히 거리를 벌렸지만, 지대건의 칼질이 너무 빨랐다.
이천상의 가슴팍에 핏물이 번졌다.
“좋구나!”
터어엉!
탄력 넘치는 보법으로 또다시 거리를 좁힌 지대건의 살벌한 칼질이 시작되었다.
후우우웅!
순간 지대건의 칼이 대여섯 개로 분리된 듯 화려한 움직임을 보였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확인키 어려운 칼질이었다. 늘어난 칼 하나하나가 전부 몸을 노리고 쇄도했다.
이천상의 상체가 빠르게 움직였다.
사사사사삭!
지대건이 칼날이 몇 번이나 허공을 베었다.
‘대단하군.’
어느 것 하나에도 걸리지 않는다. 칼에 실린 경풍이 이천상의 어깨와 가슴에 작은 생채기를 냈지만, 그게 전부였다.
‘확실히 옆에서 보던 것과는 달라.’
번쩍! 캉!
강하게 내리친 일도(一刀)가 연무장 바닥에 칼자국을 냈다.
피하지 않았다면 일도양단이 되었을 것이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지만, 피하지 못하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진심으로 승부에 임한 지대건. 좌측으로 피한 이천상을 따라 내리친 그의 칼날이 기이한 조화를 부렸다.
‘이건 피할 수 없을 거다.’
사아아악!
직선으로 움직이는 게 이치에 맞을진대, 지대건의 칼은 채찍이라도 되는 것처럼 뱀처럼 휘며 이천상의 복부를 노렸다.
광마대원들이 익히는 무공, 참영도법(斬影刀法)의 용두탐혈(龍頭耽血)이었다. 빠르고 날카로운 참영도법에서도 몇 없는 자격(刺擊)이었다.
도법에는 거의 없는 찌르는 초식, 그것도 검처럼 유연하게 움직여 상대의 몸을 관통시키는 살초.
지대건의 칼끝이 이천상의 옆구리 한 치 앞까지 도달했다.
‘됐다!’
그때였다.
‘……!’
칼날이 옆구리를 뚫기 전, 지대건은 우측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각법?!’
어느새 이천상은 오른발로만 땅을 딛고 있었다. 언제 좌각을 휘둘렀는지 보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지대건의 칼이 이천상의 옆구리를 뚫겠지만, 동시에 지대건 역시 머리에 일격을 허용할 것이다.
내공이 가득 담긴 각법으로 머리통을 맞으면 목숨이 위험하다. 기겁한 그가 재빨리 몸을 틀었다.
부웅!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이천상의 다리가 허공을 갈랐다.
핏!
스쳐 지나간 칼날이 이천상의 옆구리를 훑었다. 뚫지 못하고 살짝 베는 데 그친 것이다.
번쩍!
강하게 수축된 몸을 강한 폭발력으로 펼친 지대건이 이천상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순간 지대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느새 몸을 수그린 이천상이 칼의 궤적 밑에서 나타난 것이다.
‘안 돼!’
이천상의 두 주먹이 불을 뿜었다.
퍼버버벅!
짧고 빠른 열두 번의 권격이 지대건의 우측 허벅지에서 복부, 좌측 갈비뼈까지 사선으로 올라가며 타격했다.
“컥!”
중심을 잃은 몸, 벼락처럼 빠른 연환권에 지대건이 뒤로 물러났다. 뼈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일시적으로 근육이 마비되어 다음 동작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쿵!
강하게 진각을 밟은 이천상이 손을 휘둘렀다.
퍼어억!
질풍처럼 빠른 일장(一掌)이 지대건의 가슴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쳤다.
지대건이 피를 뿜으며 비틀거렸다. 가슴팍을 찍은 일장이 위장과 폐에까지 타격을 주었다.
숨을 쉴 수 없는 고통. 그 와중에 본능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빠각!
“크악!”
무섭도록 예민한 일격이었다.
이천상의 주먹이 칼을 쥔 지대건의 손을 후려쳤다. 손가락이 죄다 부러지니, 칼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훅!
또다시 품으로 들어간 이천상의 손을 들었다.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는 손, 금강야차마공의 장법인 야차혈장(夜叉血掌)이었다.
지대건의 눈에 다급함이 깃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였다. 죽지는 않겠지만, 저 일격에 당하면 당분간 혈혼각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
‘안 돼! 피해야……!’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천상의 아차혈장이 냉정하게 날아들었다.
지대건이 눈을 질끈 감았다.
훅!
“……!!”
이상하다.
응당 느껴져야 할 통증이 없었다. 지대건이 천천히 눈을 떴다.
“……상당하군.”
어느새 나타난 동후가 이천상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그가 이천상의 팔을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들어간 야차혈장이 지대건의 갈빗대 몇 개를 부쉈을 것이다.
동후가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동후를 보던 이천상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츠츠츠.
손에 가득 실린 경력이 서서히 사라지며 또 한 번 아지랑이를 피웠다.
지대건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지랑이를 피울 정도로 강하게 집결된 발경이었다. 저걸 그대로 맞았을 생각을 하니 오금이 저렸다.
동후가 차갑게 말했다.
“젊은 놈이 손속이 독하구나.”
이천상이 팔목을 돌리며 말했다.
“싸움에 독하고 말고는 없소.”
“건방진 놈. 알량한 무공 몇 수 익혔다고 자신감이 하늘을 뚫는구나.”
“덕분에 많이 배웠소.”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다시 연무장 끝으로 간 그가 곧장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금 막 싸움이 끝났는데도 전혀 흥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심지어 보란 듯이 운공에 들어가는데, 상대가 자신을 해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듯했다.
이천상을 노려보던 동후가 지대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대건이 입술을 깨물었다.
“선배님, 저희는…….”
퍼억!
지대건의 얼굴이 획 돌아갔다. 동후의 주먹에 맞은 것이다.
내공은 실리지 않았지만,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눈앞이 번쩍이고 입 안이 다 터져 핏물이 줄줄 나왔다.
동후가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선배님?”
“죄, 죄송합니다, 조장님.”
“병신 같은 새끼들. 광마대원이란 놈들이 투마 출신 하수 놈한테 당해?”
“…….”
“누가 먼저 싸움을 걸었냐?”
지대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후가 버럭 소리쳤다.
“제대로 대답 안 해!”
깜짝 놀란 지대건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저, 저희가 먼저 비무를 제안했습니다!”
“왜? 너희 눈깔에 안 보이는 춤사위라도 확인해 보고 싶었어?”
“죄송합니다!”
“작정하고 싸웠으면 이기기라도 하든가! 이게 뭐 하는 꼴이야!”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대건과 방효의 얼굴이 치욕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동후가 턱으로 방효를 가리켰다.
“저 새끼 데리고 혈혼각으로 가. 부관님께는 따로 보고할 테니까.”
“……예.”
“목소리가 그게 뭐야! 대답 똑바로 안 해!”
“예, 예!”
지대건이 비틀거리며 방효에게 걸어갔다.
동후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둘 다 반 죽여 놓고 싶었다. 설령 방심했다손 쳐도 투마 출신에게 쪽도 못 쓰고 당하다니?
아니, 오히려 방심했다면 그게 더 실망이었다. 광마대는 어떤 순간에도 방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실전이든 비무든, 방심은 곧 죽음이기에.
만약 이천상의 주먹이 조금 더 강했다면 방효는 절름발이가 되었을 것이다. 목숨이 오가지 않는 비무라고 가볍게 본 대가로 평생 병신으로 살 수도 있다.
마인들의 싸움이란, 강호인들의 싸움이란 다 그런 것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지금껏 이루었던 모든 걸 잃을 수 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분을 삭인 동후가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의 몸에서 묵직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집중한 듯 운공을 이어 가는 그 모습이 얄미울 정도로 침착했다.
‘…….’
동후의 눈이 흔들렸다.
사실 그는 이천상에게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놀라웠다.
‘저런 놈이 있단 말인가.’
방효의 비명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다. 바로 그때, 이천상은 지대건과 싸우고 있었다.
덕분에 동후는 이천상의 실력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한 수 낮은 무공으로 여유롭게 두 사람을 이겼는지도 보았다.
‘저놈, 감정이 없어.’
진짜 감정이 없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천상의 상대가 되는 이들은 그의 감정을 읽지 못할 것이다.
‘저럴 수가 있나?!’
고수는 상대의 눈빛과 기도를 읽고 반응한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감정에 기인한다.
분노, 흥분, 초조, 심지어 냉정으로 무장해도 상대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천상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이천상의 다음 수를 읽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천상의 능력이었다.
‘반대로 저놈은 방효와 지대건의 다음 수를 모조리 읽고 있었어.’
무공에 능해서가 아니었다.
저건 통찰력이었다. 찰나의 순간 상대를 읽고 그다음 수가 어떻게 날아올지를 벼락처럼 분석해 낸 것이 분명했다.
‘투마 출신이라…… 왜 대주님께서 저놈에게 관심을 두시는지 알겠군.’
동후가 몸을 돌렸다.
착잡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보고를 안 할 수도 없고. 쪽팔려서 원.”
다음 날 아침.
“대주님.”
“음?”
도헌이 고개를 돌렸다.
황무석의 표정은 지극히 차가웠다.
“그놈을 불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