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8화. 불타오르다 (3)
“크허! 좋구만!”
차갑게 식힌 술을 마신 양건의 반응은 일품이었다.
반면 이천상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저 나온 식사를 천천히, 한 젓가락씩 씹어 넘길 뿐이었다.
양건이 웃으며 물었다.
“너는 술 안 좋아하나 보지?”
“마셔서 좋을 이유를 찾지 못했소.”
“킁, 세상 사는 이유 하나를 날려 먹은 놈일세!”
이천상의 젓가락질이 살짝 멈추었다.
양건의 입도 덩달아 꾹 다물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천상은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진짜 희한한 녀석이네.’
입맛을 쩝 다신 양건이 손에 든 술잔을 공연히 빙글빙글 돌렸다.
양건, 그는 진마대(眞魔隊)의 예비단원들 전체가 인정하는 떠버리였다.
그의 유쾌한 성격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눈도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싫어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교 자체가 꽤 살벌한 환경이라 신경이 곤두선 사람이 많은 탓이었다.
친근한 성격은 누군가에겐 현실을 잊게 해 주는 술이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양건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천상처럼 반응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자신에 대한 흥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은데, 또 겸상 요구는 받아들였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천상에게도 양건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지만, 양건에게도 이천상처럼 무감각한 인간은 처음이었다.
“이천상이라고 했지?”
“그렇소.”
“나는 양건…… 아, 통성명은 했나?”
“그렇소.”
“나이가 몇이야?”
“모르오.”
“억? 나이를 모른다고?”
“그렇소.”
“뭐, 일일이 나이 세면서 사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어. 사실 나도 스물다섯이라고 말하고는 다니는데, 진짜 그 나이인지는 몰라. 대충 이 정도 먹었겠다, 싶어서 그렇게 정했지.”
“…….”
“그래도 스물은 넘었지?”
“그렇소.”
“헛헛. 그럼 편하게 친구나 먹자고. 너도 이제부터 스물다섯 해.”
“…….”
“하긴, 요새는 나이 보고 친구 먹을 만큼 빡빡하게 안 산다더라. 몇 살이면 어때? 마음 맞으면 친구 되고 의형제 되는 거지. 안 그래?”
“그렇소?”
“…….”
“…….”
“너, 원래 말투가 그러냐?”
“그렇소.”
“……고칠 생각은 없고?”
“없소.”
그렇소, 아니오, 없소…….
새삼 질려 버렸다는 듯, 양건은 일그러진 얼굴로 이천상을 보았다.
세상에 단답도 이런 단답이 없었다. 보아하니 말은 다 듣는 것 같은데, 반응이 너무 한결같았다.
지나가던 똥개가 짖어도 이보다는 인간적인 반응이 나오겠다. 바위에 대고 말해도 이보다는 신날 것 같았다.
쿵!
양건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쳤다.
“야, 인마! 너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이천상이 양건을 쳐다보았다.
표정을 보면 의아해하는 것 같기는 하다. 원체 무표정이라 약간의 의아함도 엄청나게 큰 변화처럼 보인다.
상대에게 나름의 반응이 나와서 흡족해하던 양건은, 이내 다시 얼굴을 구겼다. 이 망할 놈은 자신이 왜 격해지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 맞장구도 쳐 주고, 웃기도 하고, 나이도 묻고, 좋아하는 게 뭔지 물어보기도 하고, 뭐 그러는 거 아니야?!”
“그래야 하오?”
“으어어.”
양건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목 뒤를 움켜쥐었다.
입을 딱 벌리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것이, 혈압으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천상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상한 인간이군.’
그는 공감하지 못할 뿐, 타인의 감정과 행동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양건의 언행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소 과장된 동작과 표정을 짓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그가 봐 왔던 사람들과는 묘하게 결이 달랐다.
무언가 이득을 보기 위한 목적은 없는 듯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꺼리는 자신에게 서슴없이 다가와 대뜸 친구를 하자며 바둥댈 이유가 없잖은가.
‘내가 모르는 음험한 계략이라도 있는 건가.’
이천상의 눈빛이 바뀌었다.
정말 그렇다면 앞으로 거리를 두고 주시해야 할 것이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야차령은 교주가 직접 만들라고 지시한 특수 부대. 창설되기도 전에 왔다는 건 이 사람에게도 뒷배가 있다는 뜻…….’
그때, 양건이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됐어.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 너 진짜 이상한 놈이다.”
이천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이 말이 묘하게 머리에 남았다.
툴툴거리며 자신의 잔을 채우던 양건이 이천상에게 말했다.
“밥만 먹지 말고 잔 비면 좀 따라 줘.”
“왜 그래야 하오?”
“진짜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놈이네. 야! 상대방 잔이 비었으면 따라 주는 게 예의 아니야?”
그 정도는 이천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이상한 사람이 대놓고 저런 말을 하는 게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그리고 너 재수 없어지고 싶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사람 앞에 두고 자작하면 상대방 재수 없어진다고 하잖아.”
“미신이오.”
이제 양건의 눈은 거의 몽롱해지기까지 했다.
“……마음껏 따라 마실 테니까 재수가 철철 없어지길 바란다, 이 자식아.”
힘없이 투덜거리며, 그는 연거푸 석 잔을 비웠다. 물론 자작이었다.
이천상은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묘한 침묵이 어렸다.
젓가락이 접시를 스치는 소리, 술잔이 탁자를 치는 소리, 크어! 하는 괴상한 소리…….
그렇게 반 각이 흘렀다.
이천상이 젓가락을 놓자, 양건이 쌍심지를 켰다.
“왜? 다 먹었으니까 이제 가시게?”
이천상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소.”
“이 자식아, 그럼 왜 같이 먹자고 했어?”
“같이 먹자고 한 건 당신이오.”
“……어?”
“나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뿐이오.”
양건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댔다.
말이야 옳은 말이긴 하다. 하지만 이게 동석한 사람한테 할 말인지는 따져 봐야 할 문제다.
양건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잠시 포기해 보기로 했다.
“네가 얼마나 싸늘한 놈인지는 알았으니까, 한 병 비울 때까지 대화 상대나 되어 줘.”
이천상이 입을 열려고 한 순간, 양건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오? 따위의 말은 하지 마.”
“난…….”
“넌 뭐 꼭 이유가 있어서 사냐? 저기 봐! 달이 저렇게 곱게 떴잖아! 이유 없이 감상에 젖을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거기에 나처럼 성격 좋은 인간도 딸려 있잖아?”
“…….”
“보아하니 퍽퍽하다 못해 팍팍하게 사는 것 같은데, 너 그렇게 살다가 얼마 못 간다. 풍류도 없이 무슨 재미로 사냐?”
되는대로 지껄인다는 인상이 강했다. 이천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꼭 멋들어진 말만 사람에게 감흥을 주는 게 아니었다.
‘재미라.’
가만히 양건을 바라보던 이천상이 빈 잔을 들었다.
양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한 병 후다닥 없애서 빨랑 일어나려고? 어림도 없지! 내 위장에 한 병이 다 들어가기 전에는……!”
이천상이 술병을 들었다.
양건이 재빨리 술병을 빼앗았다.
“뭐야? 진짜 마시는 거야?”
“그렇소.”
미심쩍은 눈으로 이천상을 흘겨보던 양건이 이내 피식 웃으며 잔을 채워 주었다.
“여자 꼬시려고 발악하는 노총각도 아니고, 나도 참 애쓴다.”
잔을 받은 이천상은 그대로 술을 마셨다. 건배하려고 잔을 든 양건은 또 한 번 무안해졌다.
“야차일각에서 지내지?”
“그렇소.”
“나는 삼각이야. 삼각 삼 층 일 호.”
이천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양건도 익숙해졌는지 턱을 괴며 투덜거렸다.
“하, 어쩌다가 내가 이런 부대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진마대보다 끗발 좋을 거라고 다들 부러워는 하더만, 제길, 지금까지 육대 들어가려고 피똥 싼 걸 생각하면 허무하기도 하고.”
“진마대 예비단 소속이었소?”
양건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야 상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준 게 기뻐서였다.
“그랬지. 이제는 아차사령부 소속이지만. 이런 거 보면 참 사람 인생 모르는 거더라. 나한테도 연줄이 있었으면 진즉 진마대에 들어갔을 텐데. 그랬다면 야차사령부로 전출되지도 않았을 거 아냐?”
“허무하다고 했잖소.”
“허무하긴 하지. 그래도 야차령 끗발이 더 좋다고 하잖아. 어쨌든 출세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직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 나처럼 연줄도 없고 뒷배도 없는 놈이라면 더더욱.”
“뒷배 없이 야차령에 들어올 수 있소?”
“글쎄? 아마 사람마다 다르겠지? 나는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하더라고. 사실 예비단에서 더 지내고 싶었는데, 어차피 떠날 거 더 정들어 봤자 나중에 힘들 것 같아서 먼저 와 버렸어.”
이제야 좀 대화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양건은 마구 떠들어 댔다.
이천상은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들었다.
양건에게 흥미가 있다기보다는 이 또한 배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워낙 무공에 신경을 쓰다 보니, 관계에서의 배움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잠깐 잊고 있었다.
물론 양건에게 흥미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그 말이 주는 울림이 상당했다.
이천상이 아는 사람의 감정과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상당히 튀는 사람도 여럿 봐 왔지만,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양건은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툭툭 튀어나오는 반응을 보면 별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또 가만히 보다 보면 이상하리만치 독특했다.
이천상은 그 독특함을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양건에 대한 흥미는 바로 그 부분에 있었다.
그렇게 반 시진이 흘렀다.
“그나저나 계속 그럴 거야?”
취기가 올랐는지, 양건의 얼굴은 불콰하게 물들어 있었다.
반면 이천상의 얼굴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을 말이오?”
“반말해, 반말. 앞으로 이런저런 작전이나 훈련도 같이 뛰게 될 텐데.”
물끄러미 양건을 보던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양건의 표정이 활짝 폈다.
“그래! 진작에 그랬어야지!”
껄껄껄 웃으며 잔을 채워 주는 양건은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순간 이천상은 깨달았다. 지금 양건이 보여 주는 저 표정, 저 기쁨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외로움.’
외로워서 말을 걸었고, 외로워서 친구가 생기길 바랐다.
역시나 이천상으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 대다수가 혼자 있을 때 외로워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냉담한 반응에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걸 보면 성격도 부드러운 축에 속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외향적인 사람일수록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이 깊을 확률이 높다. 이천상은 새삼 배워서 알고 있던 지식을 되새겼다.
‘신교에서 살기에는 별로 좋지 못한 성격이군.’
양건이 병을 흔들었다.
“옴마? 야, 벌써 또 비었다. 우리 하나 더 먹자.”
“그만 먹지.”
“왜? 이제 좀 말이 통하기 시작하는데 이대로 끝내려고? 아쉽잖아!”
전혀 아쉽지 않다고 말하려다, 이천상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양건이 씨익 웃었다.
“맞아. 오늘만 날이 아니지. 첫 술판에 내가 너무 들이댔구만?”
“내가 먹은 건 내가 내도록 하지.”
“어허! 이 친구 이거 정 없게 왜 이래? 오늘 술값은 내가 낼 테니까 다음 술값은 자네가 내. 그러면 되잖아.”
빠른 시일 내로 기어이 함께 마시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천상이 그럴 필요 없다고 고개를 저으려 할 때였다.
“이런 쌍!”
콰앙!
저 멀리 일 층에서부터 화끈한 쌍소리가 터져 나왔다.
양건의 눈이 반짝거렸다.
“술 한 잔씩 들어가니까 슬슬 사고들 치는 모양인데? 역시 신교답다. 난 나중에 은퇴해도 주루 장사는 절대 못 할 것 같아.”
“…….”
“자리도 파했겠다, 가서 구경이나 할까?”
이천상이 일어나며 말했다.
“어차피 출구는 일 층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