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3화. 은밀한 임무 (1)
이천상은 언제나처럼 야차각 뒤편 공터에서 수련했다.
파앙!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몹시 경쾌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권법은 날카롭고 단조로워졌다. 방효와 지대건이 춤이라고 오해했던 움직임은 강한 절도와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틀이 잡혔다.
팡! 파팡! 파아앙!
쉼 없이 허공에 주먹을 날리는 이천상을 보는 두 쌍의 눈이 있었다.
양건이 육포를 씹으며 말했다.
“저 자식 저거 누굴 때려잡으려고 저리 독하게 수련하는 거지?”
옆에서 함께 육포를 뜯던 주연교가 그의 말을 받았다.
“꼭 누구 잡으려고 무공 익히나.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지.”
“그건 그렇지만 쟤는 도가 지나쳐.”
“무인이라면 본받아야 마땅한 자세 아닌가 싶은데.”
“그럼 어서 본받아 수련이나 하지 왜 여기서 구경이나 하고 있냐?”
“아직 그러고 싶진 않아서.”
양건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풍곡단주가 잡혀간 지 여러 날이 지났다. 그동안 두 사람은 꽤 친해진 상태였다.
성격이 잘 맞았다기보다는 이곳에 사람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그중 하나는 딱딱하기가 바위나 강철도 우습게 여길 정도니, 자연히 남은 둘이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양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면 볼수록 참 묘한 녀석이네.”
“성격?”
“뭐든 다.”
“하긴…….”
“내가 이래 봬도 여기저기 많이 떠돌아다녔거든. 나름 사람 좀 많이 봤다 생각했는데, 저런 녀석은 처음이야. 감정이랄 게 없는 놈 같다니까.”
순간 주연교는 이천상의 말을 떠올렸다.
- 난 언제나 수동적이었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뭔지는 알지만 공감하진 못한다. 그래서 먼저 손을 뻗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이유가 없기 때문이야.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사람의 감정은 알지만 공감하지 못한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감정이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더 섬세하게 다루거나 받아들이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 아예 갖지 않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데 이천상은 마치 감정이 결여된 채로 태어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양건 말대로 정말 이상한 사람이긴 해.’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양건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봐.”
“뭘?”
“우리가 보는 것도 제지하지 않고 신경도 안 쓰잖아? 무공 수련하는 거.”
“아.”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연무 과정을 보이기 싫어해. 뜻하지 않게 보게 되면 사과하고 물러나는 게 예의이기까지 하지. 한데 저놈 봐.”
양건이 잔뜩 목을 움츠린 채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상관없으니 시끄럽게만 하지 마라.”
“…….”
“참나, 우릴 사람이 아니라 지나가는 똥개로 보는 거 아니냐?”
“그게 싫으면 들어가지?”
“싫어. 그래도 구경할래.”
양건이 킬킬댔다.
언뜻 보면 종잡을 수 없는 성격 같지만, 주연교는 양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밝은 사람이다. 선악을 떠나 사람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다룰 줄 알며, 다소 과한 장난을 쳐도 그것이 밉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 뛰어나다.
흔치는 않지만, 종종 이런 부류가 있다. 다만 그를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환경이다.
이 살벌한 천마신교에서 양건처럼 통통 튀는 성격으로 살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는 이천상만큼이나 독특하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은 저놈 데리고 술이나 한잔 마셔야겠다.”
“마시겠다고 하겠어?”
“저 녀석의 장점이 뭔지 알아?”
“뭔데?”
“미쳐도 적당히 미쳤다는 거야. 그래서 편해. 마음만 열면 어지간한 요구는 들어주거든.”
주연교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는 많이 미쳤고?”
“신교에 나만큼 매력적인 정상인은 찾아보기 힘들지.”
“웃기고 있네.”
그때였다.
후우우우우웅!
한 줄기 묵직한 마기가 섞인 바람이 두 사람의 피부를 자극했다.
깜짝 놀란 둘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낮은 궁보 자세로 주먹을 뻗은 이천상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러나 멈춘 것은 자세뿐이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이천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강인한 마기에, 희미하게나마 색(色)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양건이 눈을 부릅떴다. 주연교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사아아아악!
마기 특유의 독특한 위압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설명키 힘든 위엄이 채운다.
우웅!!
이천상의 몸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발치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아지랑이가 온몸에서 발산되는 마기를 잠식하면서 다시 단전으로 수렴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비로웠다.
천천히 눈을 감는 이천상.
마치 작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강물처럼, 단전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모이는 마기는 어느새 미약한 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마기가 단전으로 모이는 순간.
번쩍!
눈을 뜬 이천상의 안광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스르륵.
자세를 바로 한 이천상이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오 성(五成).”
믿을 수 없게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 성에 머물렀던 금강야차마공의 성취가 오 성으로 진입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성취였다. 무공을 제대로 익힌 지 얼마나 되었다고, 최고급 마공을 벌써 오 성까지 연성했다.
하지만 이천상은 기뻐하지 않았다. 기쁨이 뭔지도 몰랐지만.
‘막힌다.’
마공의 성취가 빠른 근본적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하나는 깨달았다.
‘여기서부터는, 지금과 같은 빠른 성취가 불가능하다.’
구결로는 알 수 없는, 실제로 무공을 익혀야만 깨닫는 구간이라는 것이 있다.
‘육 성부터는 보다 고차원적인 무리(武理)와 강력한 욕망을 요구한다. 이전까지는 그렇지 않았지만, 지금부터는 확실히 어려워지겠지.’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욕망이라.’
그때였다.
“여어, 축하해.”
이천상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양건과 주연교가 가까이 다가온 채였다.
“무자비하게 수련한 보람이 있구만. 마공에 성취가 있었지?”
“그래.”
“축하하네. 막상 이렇게 보니까 육포 그만 뜯고 수련이나 할걸, 하는 생각이 드는데?”
“후회는 의미 없다. 지금이라도 해라.”
“딱딱한 자식. 인마, 하고 싶어도 오늘은 너 때문에 못 해!”
“나 때문이라니?”
“축하주 마셔야지!”
주연교는 이천상이 거부할 줄 알았다.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도록 하지.”
“흐흐, 좋아.”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래졌다.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씻고 오겠다.”
“천천히 씻고 와. 해도 안 졌으니까.”
이천상은 대답도 없이 거처로 들어갔다.
“허.”
그 자리에 털썩 앉은 양건이 팔짱을 끼었다.
부러움, 놀라움, 장난스러운 질투가 섞인 양건의 표정은 참으로 미묘했다.
“거 정말 대단한 자식일세. 미친놈이기는 해도, 저런 자세는 정말 본받을 만하다니까. 무림인이 큰 성취를 이뤘는데도 저렇게 담담하다니,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놀라지 않을 녀석이야.”
“봤어?”
“음? 뭘?”
양건과 달리 주연교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했다.
“아까 그 마기가…….”
양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기가 왜?”
“…….”
말없이 야차일각을 바라보던 주연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 봤나 보지.”
“뭔데 그래?”
“나도 좀 씻고 올게. 이따가 이 앞에서 봐.”
“어어, 말 돌리는 거야? 옴마? 진짜 가? 나 혼자 여기서 기다리라고? 그리고 네가 뭘 했다고 씻어? 야! 나 외톨이 만들 거야?!”
일견 간절한 호들갑도 거처로 쌩 들어가는 그녀를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양건이 피식 웃었다.
“하여튼 사회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녀석들이야. 이거 내가 많이 피곤해지겠는데?”
홀로 킬킬대던 양건이 순간 웃음을 멈추었다.
‘…….’
어느새 진지해진 얼굴로 야차일각을 바라보는 양건의 눈은, 그간 이천상과 주연교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서늘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야.’
비록 잠깐이지만, 아니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지만 양건은 볼 수 있었다.
무형의 마기가 조금씩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기 전.
한 단계 높은 질을 갖게 된 무형의 마기가 순간적으로 이천상의 미간으로 흘러 들어간 것을.
‘상단전이 열려 있었다. 그것도…….’
양건의 눈이 흔들렸다.
‘완전하게 개방되어 있었어.’
양건과 주연교는 일류의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당연히 보유한 마기의 양도 어중간한 마인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런 두 사람이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릴 정도로 이천상이 풍기는 마기는 강했다. 질도 질이지만, 그 양에 있어서도 두 사람보다 우위에 있었다.
한데 그 마기 중 일부가 벼락처럼 이천상의 미간으로 스며들었다.
그 마기량의 격차가 너무 빨리 줄어들어서 오히려 자연스레 소실된 기운으로 보일 정도였다. 상단전으로 빨려 들어간 마기를 제외한 나머지 기운은 이천상의 하단전으로 모여 안정적인 기반을 쌓아 줄 것이다.
‘상단전. 저 녀석이 그걸 열었단 말이지. 그것도 어중간하게 연 게 아니라 완벽하게.’
상단전을 완전히 개방한 사람은 많지 않다. 당장 절정고수 중에서도 찾기 힘들다.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상단전의 기운을 끌어와 무공에도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은 아직 양건에게 너무나도 머나먼 경지였다.
‘저 녀석 실력에 상단전을 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내공심법에 대한 이해도가 있다면 누구라도 믿지 못할 거야.’
흔들리던 양건의 눈이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아니, 그건 아닌데.’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다.
‘정말 보면 볼수록 묘한 친구란 말이야.’
형법당과 연이 있으면서도 야차사령으로 차출되었으며, 언뜻 보면 무공을 익힌 지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도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다.
사람이라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감정이 부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지는 있다.
‘너, 진짜 정체가 뭐냐?’
잠시 후.
“주연교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이천상을 보며, 양건이 히죽 웃었다.
“씻으러 갔어. 여자들은 오래 씻잖아? 너도 좀 기다려야겠다.”
“그러지.”
* * *
호미루로 향하는 세 사람.
양건은 언제나처럼 말이 많았고 주연교는 큰 표정 변화 없이 듣다 중간중간 받아쳤다. 이천상은 그답게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
이천상이 걸음을 멈추었다. 양건과 주연교 역시 그를 따라 멈추었다.
호미루로 가는 지름길,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숲길에 한 명의 복면인이 그들이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양건이 물었다.
“뉘쇼?”
“야차사령부 소속 이천상, 양건, 주연교.”
“……?”
“맞나?”
“맞는데 뉘시냐고.”
“따라와라.”
복면인이 소로 옆으로 걸었다.
양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저 수상쩍은 놈은?”
주연교의 눈빛도 강렬해졌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강자야.”
“그러니까 더 수상하지. 외전이라지만 신교 안에서 복면까지 뒤집어쓰다니, 도대체 뭐야?”
그때, 이천상이 걸음을 옮겼다.
“어어, 천상이? 저놈 따라가게?”
“그래.”
“누군지도 모르는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고수가 있어. 월등히 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