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6화. 은밀한 임무 (4)
이천상의 설명을 들은 주연교는 혐오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더럽군.”
양건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기색이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로 얽힐 줄은 상상도 못 했네그랴.”
주연교가 진저리를 쳤다.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지. 사소한 사건 하나가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 죄도 없는 아랫동네 초토화시키는 거, 어디에나 있는 일이야. 다만…….”
양건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 아랫동네에 내가 살 일이 있을 줄은 몰랐네, 빌어먹을.”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며칠을 나와 함께 지냈으니 너희도 하나로 묶어 보고 있을 거다. 너희에게는 빚을 졌다.”
“어이쿠, 그건 또 섭섭한 말씀이네?”
양건이 이천상의 등을 팡팡 때렸다.
“먼저 너한테 친해지자 수작 부린 건 나야. 이런 일로 미안할 거 전혀 없다. 대신, 나중에 나 곤란한 일 생길 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번 도와주라고. 그러면 되는 거야.”
“알겠다.”
주연교가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나 때문…….”
“시간이 없다.”
이천상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단조로웠다.
“도주자는 실제로 존재한다. 권력 싸움이라지만, 도주한 죄인은 반드시 잡아야 해. 빨리 움직이면 예상보다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로 추정된다.”
“어떻게 알아?”
“상처 입은 짐승을 추적하는 건 원래 내 전문이었다.”
“……오호?”
“나에게 뭔가 한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섣불리 먼저 죄인을 잡은 채로 기다리진 않을 거다. 그쪽은 이쪽의 능력을 정확히 알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어.”
“맞다. 가능성이 큰 얘기일 뿐이야. 게다가 이쪽 실력을 모른다면,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해 강력한 고수를 보냈을 거다.”
“그 수가 많지는 않겠지?”
“아마도. 하지만 그 또한 확신할 수는 없다. 우리 측에서 이 정보를 알 수 있었던 까닭은, 그쪽에서 정보 통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유가 뭐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지인의 말로는, 형법당주의 반응을 보고 싶은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한다.”
양건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복잡하구만.”
“복잡할 거 없다. 중간의 사정을 알았을 뿐, 우리가 할 일은 도주자를 포획하고 적의 손을 피해 안전히 귀교하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만 보면 복잡할 건 없군. 무지하게 어려울 것 같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 이제 시연부터 해라.”
“좋아.”
양건은 연막탄과 독탄을 차례로 터트렸다.
“여기 미세한 돌기 있지? 여기에 걸쇠를 풀고 누르면 셋을 센 뒤에 작동해. 보다시피 연막과 독의 너비는 상당해. 특히 독탄을 터트리기 전에 피독주를 입에 무는 것을 잊지 마. 개량 전 물건이지만 절정고수라도 중독시킬 수 있을 만큼 독하니까.”
“좋아.”
“화탄은 터트릴 수 없어. 소음을 줄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것만 알아 둬. 실제 벽력탄 위력의 오 분지 일도 안 되지만, 절정고수라도 내공의 방패 없이 직격당했다간 목숨이 위험하다는 거.”
양건은 뒤이어 신표비갑까지 능숙하게 시연했다.
“실전에서는 한 번 쏘고 난 다음 비갑을 벗든, 세인승을 끊든 해야 해. 돌돌 말 시간이 없을 테니까. 그건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어.”
단 한 번뿐이지만, 이천상과 주연교는 눈썰미가 좋았다. 사용 방법을 완벽히 숙지한 두 사람은 곧장 옷 안에 흉갑과 각반, 비갑을 찼다.
“흉갑 안쪽에 삼색탄(三色彈)을 장착하는 곳이 있어. 옷으로 가려 놔. 안전 걸쇠는 외부의 충격으로 빠지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비로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천상이 지도를 꺼내 들었다.
“먼저 북동쪽으로 이동하지.”
파아악!
이천상을 선두로 세 사람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한동안 그의 뒤를 따르던 주연교가 잠시 속도를 올려 이천상의 곁으로 다가왔다.
“미안해.”
“뭐가?”
“나 때문에 풍곡단주와 얽혔잖아.”
“놈을 형법당에 처넣을 생각을 한 건 나다. 네 탓이 아니야.”
“그래도…….”
“그런 식으로 자책해 봤자 임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게 좋아.”
“……응.”
주연교가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면 축하주는 내가 살게.”
“좋을 대로.”
대답을 듣자마자 뒤로 빠지는 주연교.
고개를 돌려 그녀와 양건을 보는 이천상의 눈빛이 조금 칙칙해졌다.
‘당장은 내게 호의적이지만, 상황에 따라 어찌 변할지 모르는 이들이다.’
도헌처럼 진하게 얽힌 인연이 아니었다. 사람의 진심을 떠나, 목숨까지 내놓고 믿을 만한 인연이라고는 볼 수 없다. 적어도 아직은.
‘만약 낌새가 이상해지면.’
자신과 형법당주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저들 입에서 나올 것 같으면.
‘그 전에 죽일 수밖에.’
어둡게 가라앉은 이천상의 눈에 은밀한 살의가 싹텄다.
* * *
“출발했다고?”
“그렇습니다. 현재 북동쪽으로 향했다는 보고입니다.”
“그랬군.”
새벽 아침.
신교 밖으로 나온 십여 명의 마인들은 하나같이 장사꾼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중 다섯은 실제 상인들로 신교에 생필품을 조달하는 여러 상단 출신 중 하나였다. 그들은 다섯 마인들을 보며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다섯 마인의 우두머리, 풍전(馮氈)이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도주자의 위치는 어디쯤이라더냐?”
“반 시진 전 정보로는 마회곡(魔廻谷) 서쪽 일 번 봉우리를 앞두고 있다 하였습니다.”
“벌써?”
“그렇습니다. 속도로 볼 때 지금쯤 삼 번 봉우리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몸뚱이로 잘도 뛰어다니는군.”
“그놈들이 잡을 수 있을까요?”
“잡든 못 잡든 상관없다. 어차피 야차령 창설식 전에 도착하지 못하면 놈들은 끝이야. 자연스럽게 퇴출될 테니까.”
“그렇군요.”
창설식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야차령에 들지 못한다?
얼핏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창설일 정오 전에 도착하라는 말이 있었지,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부대원 자격을 박탈한다는 조항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것이 지금의 천마신교였다. 애초에 임무 발령서가 떨어진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나.
“다만 놈들도, 우리도 각자의 임무는 달성하는 게 보기에 좋겠지.”
“실력들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두 연놈은 모르겠지만, 그 이천상이라는 놈은 알 수 없다.”
“달리 들은 게 있으십니까?”
풍전이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아무리 높게 쳐줘도 나보다는 아래일 것이다.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지도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쉽게 보지 마라.”
“……!”
“위에서 괜히 우리를 파견한 게 아닐 거다. 나보다 강하지 않더라도 놈에게 뭔가가 있을 확률이 높아. 그렇게 알고 잡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답답한 건 풍전도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이따위 일에 보내다니.’
실전에서 칼을 휘둘러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삼 년 전까지 신교육대의 부관으로 지냈던 그였다. 그때도 아랫사람을 지휘하는 게 주였지만, 애초에 실력이 없으면 그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군사부로 발령받은 후 피 튀기는 살벌한 생활과 완전히 이별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맡은 일만 처리하면 온종일 기방에 들락거려도 위에서는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한데 뜬금없이 신설될 야차사령부의 애송이를 생포하라니?
‘사람이 그렇게 없나.’
부하에게는 얕보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그들을 제일 얕보는 것은 풍전이었다.
진짜 강자로 추정되었다면 자신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군사부에는 자신보다 강하면서 멍청하기 이를 데 없어 직급이 낮은 마인들이 꽤 많았다.
그런 놈들을 내버려 두고 자신을 보낸 것은, 상대가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뜻임과 동시에 일종의 경고라고도 볼 수 있었다.
‘젠장, 너무 놀고먹긴 했지.’
군사부로 발령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백뇌각 부각주에게 끊임없이 뇌물을 보낸 덕분이었다.
실제로 군사부에 오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더 위로 올라갈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삼 년이었다.
삼 년 동안 맡은 일만 대충 끝내고 주색에 젖어 살다 보니 이제는 밥 먹으러 식당에 가는 것조차도 귀찮았다.
‘다시 돈 좀 모아야겠군. 몇 달 주머니 안 채워 줬다고 이런 일에 보내는 거 보면 참 치졸하기 그지없어.’
풍전이 상단원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도록 해.”
“아, 예!”
“알고 있겠지만, 우리와 함께 나선 것을 외부에 흘리면 목숨이 성치 않을 것이야.”
상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좋아, 가 봐.”
“예!”
도망치듯 허겁지겁 멀어지는 상인들을 보는 풍전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불쌍도 하지.’
힘이 없으면 저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
잠시 값싼 동정을 보낸 그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거점으로 가서 좀 쉬고 있자고. 정보 날아오는 거, 시간별로 보고하도록 하고.”
“예!”
일행은 신교에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이 바로 신교에서 가장 가까운 정보 거점이었다.
장기 보관이 가능한 음식과 식수가 있어 지내는 데에 아무 불편함이 없었다. 굳이 불편한 거라면 따분함 정도일 것이다.
물론 그건 풍전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의 수하 넷은 사방을 경계하며 전서구가 날아올 때마다 서신을 정리하고 보고하길 반복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한 부하가 풀밭에 누워 입이 찢어지게 하품하는 풍전에게 달려왔다.
“조장님! 급보입니다!”
“뭐냐?”
“특수 임무를 받은 예비 야차령 셋이 도주자 검거에 성공했답니다!”
순간 풍전의 눈이 번뜩였다.
“성공했다고?”
“그렇습니다. 현재 서쪽 양곡로를 따라 귀교 중이랍니다! 이틀 안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놈들 봐라?”
자리에서 일어난 풍전의 얼굴에 묘한 빛이 어렸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 솔직히 검거에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쪽과 달리 셋에게는 아무런 지원도 없었다. 정보 부대가 붙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발 빠른 도주자를 기어이 잡은 것이다.
애초에 도주자는 잡힐 수밖에 없었다. 광동성 전체에 천마신교의 정보망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지원도, 실력도 없는 셋이서 사흘 만에 잡아 버린 것이다.
‘대단해.’
풍전은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도주자를 잡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공이 뛰어나다고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추적술에 능한 놈들인가?’
셋 중 하나가 진마대 예비단에서 제법 굴러먹던 놈이라는 얘기는 들었다. 신교육대의 예비단에서는 추적술도 배우니, 어쩌면 그놈이 능력 발휘를 했을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놈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
“야차령의 창설식이 언제라고 했지?”
“이제 닷새가 남았습니다.”
“흐음, 고놈들 엉덩이에 불이 붙을 만도 했군.”
풍전이 재차 하품을 쩍 했다.
“우리도 움직이지. 빨리 잡아서 인계하고 술이나 마시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