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7화. 은밀한 임무 (5)
“으으.”
이천상의 등허리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에 양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새끼 깼다.”
“다시 재워.”
“엉?”
“난 점혈법에 능하지 못해.”
“……자랑이다, 이놈아.”
달리는 이천상 곁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양건이 그의 어깨에 매달린 누군가의 혼혈을 짚었다.
다시 축 늘어지는 그.
중키에 마른 체격이었지만, 의식을 잃은 사내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은 보통 체력으로 힘든 일이었다. 절정고수 수준이라면 모를까, 무공을 익혔다 해도 장시간 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주연교가 속력을 높이며 이천상 쪽으로 접근했다.
“이제 내가 들게.”
이천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힘이 떨어질 때까지는 끝까지 내가 든다.”
“…….”
“너희는 힘을 비축해 둬.”
이견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질린 눈으로 이천상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놈 이거, 지칠 줄도 모르나?’
‘체력이 이렇게 좋을 수가.’
도주자를 검거하러 갈 때까지만 해도 둘은 선두에서 추적자의 흔적을 찾는 이천상을 말렸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보 지원도 없는 마당에 한두 시진도 아니고 이틀 전에 뛰쳐나간 도주자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누구라도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도주자는 경신술에 지극히 능한 고수라고 하였다.
고문을 받았다 해도 본래 실력이 어디 가지 않는 법. 도주자를 잡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천상이 선두에 선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상처 입은 짐승은 도주할 때 흔적을 지우지 못해. 일단 적의 영역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우선이니까. 지독하게 고문까지 당했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거야 당연하지만, 이 넓고 광활한 곳에서 놈이 어디로 갈 줄 알고?”
“형법당에서 신교의 고문 방식에 대해 알아 왔다. 죄의 경중에 따라 시간과 종류가 전부 다르더군.”
“……?”
“놈의 죄목은 신교의 무고(武庫)를 털어 먹으려는 것이었다. 중죄 중의 중죄야. 도주하면서 호위 둘을 죽이기까지 했다. 뒷배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살려 두었기에 고문의 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
“공포가 심신을 장악했을 때, 짐승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도주한다. 그러다 거리가 벌어지면 몸이 알려 주는 본능대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본능?”
“물이다.”
“……!!”
“놈은 고문받으면서 죽지 않을 정도의 수분만 섭취했다. 출혈이 과하고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한 와중에 급하게 도주하느라 뭘 챙길 수도 없었다.”
“허…….”
“신교 근방 백 리 안에서 구했을 리 없다. 신교의 정보망이 가장 촘촘한 구간이니까. 그곳을 벗어나고서야 한숨 돌렸을 것이고, 그때부터 허기, 특히 갈증으로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그, 그렇겠군.”
“첫 도주로가 북동이라면, 놈이 향할 곳은 이곳이야.”
지도를 펼친 이천상이 가리킨 지역은 마을과 마을 사이 길고 긴 강이 있는 곳이었다.
“인적이 없는 데다 식수가 있고 물고기도 잡을 수 있다. 지친 몸으로 육상 짐승을 잡기는 힘들 거야. 이곳에 향할 가능성이 지극히 크다.”
“…….”
“체력이 남아 도주했다 해도 흔적이 크게 남을 것이고, 긴장이 풀렸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쉽게 잡을 수 있어.”
지나칠 정도로 합리적인 설명에 두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따르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을 감출 수는 없었다.
특히 주연교가 그러했다. 양건은 진마대 예비단에서 추적술도 배웠기에 이천상의 말을 그런대로 납득했지만, 추적술을 배워 보지 못한 그녀는 도주자가 정말 그의 말대로 움직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틀 만에 주연교는 이천상을 완전히 신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양건도 마찬가지였다.
도주자는 강가 옆, 작은 숲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코조차 골지 않았지만, 숨소리가 제법 컸고 피 냄새도 상당했다. 무언가를 섭취하자 긴장이 풀려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내심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쁜 나머지, 양건이 단숨에 달려들어 그의 혼혈을 짚으려 할 때였다.
이천상이 낮은 목소리로 양건을 제지했다.
“극단적인 체력 소모로 기절했지만, 신경은 깨어 있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
“죽고 싶지 않을 테니까. 세상 모든 짐승이 그러하다.”
듣고 보니 과연 그랬다. 셋은 삼면을 포위한 채 은밀히 오 장 앞까지 진입했다.
그 직후, 이천상이 강하게 발을 구르자 도주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경신술을 펼쳤다.
당연히 그는 양건과 주연교에게 잡힐 수밖에 없었다. 포위망을 잘 짰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손쉽게 도주자를 검거했다.
그리고 한나절을 푹 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단해.’
주연교는 진심으로 이천상에게 감탄했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하지? 서적을 읽거나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은 건 아닌 듯한데.’
죄인의 도주 경로를 알았다 치더라도, 사방이 트인 만큼 정확한 길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천상은 너무도 쉽게 길을 찾았고, 심지어 중간중간 죄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까지 읽어 냈다. 양건과 주연교가 봤을 때는 그것이 왜 발자국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흔적이었다.
‘예민한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의 경험이 있는 것일까?’
이천상은 짐승을 많이 쫓아 봤다고 했다.
악인을 짐승이라고 비유한 게 아니라 진짜 짐승이다. 그 말은 이천상이 사냥을 업으로 삼았다는 얘기가 된다.
짐승과 사람은 다르다. 주연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천상은 짐승을 쫓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도주자를 잡아냈다. 아는 게 많아도 응용하여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데, 이천상은 그걸 너무도 쉽게 해냈다.
‘어쩌면.’
주연교가 양건을 힐끔거렸다.
‘셋 중 나나 양건이 무공에 더 능할지는 몰라.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왠지 이천상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이, 천상이.”
“말해라.”
“슬슬 숨소리가 가빠지는데? 교체하는 게 낫지 않겠어?”
이천상은 살짝 흐트러진 목소리로, 그러나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도주자를 쫓으며 나는 상당한 심력과 내공을 소모했다. 도주자를 메고 가는 것은 그래서야.”
“……응?”
“힘이 남은 너희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 나보다는 너희가 잘할 거다.”
“고마운 말이긴 한데, 왜 그렇게 생각해? 지금껏 보여 준 모습을 보면 네가 우리보다 더…….”
“주연교는 나보다 경신술이 좋고 너는 기습에 능한 무공을 익히고 있다.”
순간 양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처음 만났을 때의 자세, 그리고 병기와 기도가 그것을 알려 주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네 반응을 보니 맞는 모양이군.”
“……푸헐!”
“더 이상 말을 걸지 마라. 호흡 조절이 필요하다.”
“알겠어, 알겠다구.”
이미 마기도 절반 이상을 소모한 듯했다. 단단하고 묵직했던 이천상의 기도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뭐가 어찌 되었든.’
주연교처럼, 양건 역시 이천상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이 녀석의 능력은 진짜야. 적어도 이번 임무에서만큼은 녀석을 대장 삼아 움직이는 게 우리의 생존에도 유리할 터.’
무공 자체만 생각했을 때, 그는 이천상을 충분히 넘어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생존 경쟁에서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당장 이 며칠 동안의 모습만 봐도 결과가 명확했다.
그렇다면, 이천상의 말마따나 자신 역시 체력을 보존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일행은 한나절을 더 달렸다.
“허억! 허억!”
이천상은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힘들면 신법이 느려질 만도 한데, 이천상의 속도는 끝까지 여일(如一)했다. 어느 정도 심폐의 부담을 감수하고 내공을 바닥까지 쥐어짜며 속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쿨럭!”
밭은기침을 하는 이천상의 입가에 약간의 피가 배어 나왔다. 무리한 내공 운용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헉! 야! 너 내상 입었어?!”
“운공 한 번이면 괜찮아진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미친놈아! 그럼 뭐가 문제야! 시발, 내상 입으면서 달리는 줄도 모르고 있었네!”
두 사람의 얼굴에 질린 빛이 떠올랐다. 내상을 감수하고 달렸다? 말이 쉽지, 그걸 반 각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고통에 눈이 핑핑 돌 것이다.
이천상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너희는 돌아가면서 운공한다. 나는 두 시진이면 충분해. 그럴 일은 없겠지만, 기습에 대비하도록 해라.”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얼른 내상부터 다스려!”
“알겠다.”
이천상은 순식간에 운공에 집중했다.
두 사람은 반 시진씩 나눠 운공을 끝냈다. 도주자에게는 혈을 짚어 일시적으로 대사 능력을 저해시켰다. 귀식대법(龜息大法)의 일종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뭐가?”
“저 미친놈의 능력 말이야.”
주연교가 고개를 저었다.
“놀라웠어. 저런 건 단순히 안다고 활용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정말 사람 같지가 않구만. 감정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놈이 또 사람 속내는 기가 막히게 읽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냉정해진 게 아닐까?”
“응?”
“천상은 항상 세상을 배우겠다고 했어. 세상을 배우기 위해서는 사람을 배워야 한다고 했지. 평생을 그런 생각으로 살았다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사람의 행동 양식에 대해 누구보다 냉정히 분석해 왔을 거야.”
“……!”
“공포가 없는 자가 적의 공포를 이해할 수는 없어. 머리로만 알 뿐이지. 천상의 머리에는 공포에 젖어 이상 행동을 하는 짐승과 사람의 양식이 수십 개는 있을걸.”
“설마 그러려고.”
“감정 없는 자가 이미 사회에 녹아들고 있어. 이질적이라고 느낄 뿐, 천상의 언행은 분명 사회의 규칙을 따르고 있잖아.”
“……흐음.”
양건이 투덜거렸다.
“뭐가 되었든 이거 하나는 확실하네.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놈이랑 친구 먹었다는 거.”
“덕분에 우리는 이번 임무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졌잖아.”
“그것도 그렇지.”
시간이 지나, 이천상이 운공에서 깨어났다.
놀랍게도 이천상은 거의 완벽하게 회복했다. 발전한 금강야차마공의 힘 덕분이기도 했고, 잡념이 없어 집중이 깊은 덕분이기도 했다.
“신교까지 얼마나 남았지?”
“양곡로를 절반 이상 넘어왔어. 지금 출발하면 내일 정오쯤에 백오십 리 정도 남을 거야.”
“백오십 리라…….”
“뭐라도 먹고 출발할까? 아니면 이동하면서 먹을래? 아직 주먹밥이 많이 남았어.”
“일단 정보를 보내도록 하지.”
“정보? 또?”
“가장 가까운 거점이 어디지?”
“저기 서쪽으로 십 리 정도 가면 돼.”
“내일 동이 트기 전, 백 리 앞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서신을 보내 줘. 주연교가 가는 게 좋겠군.”
두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동이 트기 전이라니? 백 리 앞? 거짓 정보를 보내자는 말이야?”
“그래.”
“너 진짜 겁이 없구나? 이거 잘못 걸리면 징계 맞아! 운 없으면 형법당에……!”
“…….”
“……허, 시벌. 형법당을 겁낼 이유가 없구만.”
“지금 당장 움직여. 나는 이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
“둘러보다니? 주연교가 돌아오면 달려야지?”
“우리는 더 이상 가지 않는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여기서 적을 잡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