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9화. 은밀한 임무 (7)
‘허억!’
절벽 아래로 떨어지며, 풍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파바바바바박!
엄청난 풍압 탓에 눈도 뜨기 힘들었다. 귓가를 울리는 바람 소리가 화포의 포격 소리만큼 강렬했다.
많이 녹이 슬었다지만 그 역시 절정고수였다. 냉정만 되찾으면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놈의 냉정을 찾기 요원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말이 절벽이지, 바닥까지는 그리 멀지도 않았다. 차라리 바닥이 한참 멀었다면 고민할 시간이라도 생길 텐데, 그럴 찰나의 시간조차 없었다.
아무리 멀지 않은 바닥이라도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절정고수라도 무사치 못한다. 절벽 비탈길을 굴러떨어지는 와중이라면 모를까, 완전히 허공에 뜬 채로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이이익!’
절체절명의 순간, 풍전은 놀랍게도 약간의 이성을 되찾았다.
그것은 어깨에 꽂힌 세인승 때문이었다. 그 날카로운 통증이 도리어 그의 이성을 돌아오게 하는 데 한몫을 한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의지가 일어나니 부자연스럽게 몸을 떠돌던 마기가 신체 중심부로 돌아왔다.
굳었던 몸이 풀리고 몸이 풀리니 머리도 차가워졌다.
어느새 비탈길 바닥까지 오 장도 남지 않은 상황.
풍전이 이를 악물며 세인승을 잡아당겼다.
티이이잉!
세인승이 팽팽해졌다.
그러곤 잠시 멈칫하더니, 바깥으로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그의 몸이 세차게 안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핏 봐서는 악수였다. 바닥이 멀어지기는커녕 확 가까워졌기에.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가 노리던 바였다.
‘여기!’
풍전의 좌수에 풍성한 마기가 어렸다.
펑! 퍼펑!
비탈길 바닥을 후려치는 강한 발경에, 하강하는 풍전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상당한 임기응변이었다. 기습을 당해 절벽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이런 판단을 내리기란 누구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풍전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쉴 때였다.
훅!
팽팽하던 세인승이 순간 흐물흐물해졌다. 세인승을 쏘아 낸 놈이 신표비갑을 벗어 버린 것이다.
‘이 죽일 놈이!’
하지만 괜찮다. 놀랐을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풍전은 더더욱 마기를 실어 장을 내쳤다.
퍼퍼펑!
찰나지간 세 번이나 중첩되는 장력 덕에 확대되듯 가까워지던 바닥이 점점 느리게 다가왔다.
‘마지막!’
옆으로 칼을 던진 풍전이 오른쪽 팔을 접어 마기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퉁! 퍼버벅!
“크으윽!”
두 발이 바닥을 디딤과 동시에 온몸의 관절을 풀어 충격을 최소화한 그가 냅다 오른쪽으로 굴렀다.
우두두둑!
오른쪽 팔이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아무리 속도를 줄이고 충격을 완화했다지만, 체중이 스무 관에 달하는 남성의 몸뚱이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 앞에 풍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끔찍한 통증에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토록 지독한 통증은 곧 생존의 증명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당해 절벽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기지를 살려 목숨을 건졌다. 정말이지 자자손손 자랑을 해도 모자람이 없는 훌륭한 대처였다.
‘이!’
생존의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추락으로 죽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위협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하는 강렬한 살기.
풍전이 다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파바박!
복면을 쓴 여인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군데군데 찢어진 의복 아래 드러난 팔뚝이 피범벅이었다. 곧장 풍전에게 달려들기 위해 비탈길을 무리하게 굴러 다친 것이다.
그러나 여인, 주연교의 무지막지한 돌격은 그 효과가 확실했다.
‘크윽!’
재빨리 몸을 일으킨 풍전은 순간 휘청거렸다. 잔존하는 충격에 다리에 힘이 빠져 버린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주연교가 풍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파아앙!
확실히 풍전은 고수였다.
그 몸 상태로도 안면을 노리는 주연교의 주먹을 간발의 차로 피해 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퍽!
주연교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풍전이 주먹을 피하면서 동시에 각법을 날린 것이다.
위력은 크지 않지만, 경계심을 깃들게 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오른팔도 쓰지 못하고 전신 찰과상에 내상까지 입은 몸으로 이런 반응을 한다는 것은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주연교가 순간 주춤할 때였다.
“물러나지 마!”
흔치 않은 이천상의 일갈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심혼을 흔드는 위력이 있었다. 주연교는 저도 모르게 풍전을 향해 움직였다.
파파팡!
주연교의 무공은 날카로웠다.
권법과 장법을 적절하게 섞었는데, 그 속도가 몹시 빨랐다.
퍼억!
기어이 주연교의 발이 풍전의 허벅다리를 때렸다.
풍전이 이를 악물었다.
쳐드는 왼손, 푸른 연기가 일렁이는 그의 손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주연교가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콰앙!
그 위력이 주연교의 모든 공격을 합쳐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막강했다.
그간 제대로 수련을 하지 않았다지만 이뤄 놓은 것들이 어디 가진 않는다. 감이 무뎌지고 반응이 느려질 순 있어도, 힘과 내공만큼은 육대의 부관 시절 그대로였다.
풍전의 장력에 움푹 팬 땅을 보며, 주연교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강하다!’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 위력을 보니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상대는 자신들과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단 일장(一掌)에 단단한 땅이 소형 화탄에 맞은 것처럼 깨지고 부서졌다. 허공을 격한 장력이었기에 더더욱 대단한 일격이었다.
파아아악!
그래도 주연교는 움직였다.
여기서 상대를 잡지 못하면 역습을 당하거나 놓치게 된다. 그리되면 앞으로의 신교 생활이 상당히 갑갑할 것이다.
후우우웅!
하단을 노리는 듯했던 주연교의 다리가 순간 뱀처럼 휘어 올라가 풍전의 상단을 노렸다.
천마신교의 수많은 기본 체술 중 하나인 사교각(蛇絞脚)이었다. 타점의 폭발력을 줄이는 대신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허를 찌르는 데에 능해 여인에게 적합한 무공이었다.
풍전의 눈빛이 돌변했다.
붕!
허공을 가르는 사교각.
허초를 섞은 각법이 단숨에 읽혔다. 자세를 낮춰 피한 풍전이 순간 벼락처럼 움직였다.
콰앙!
“컥!”
주연교가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풍전의 포탄 같은 각법에 당한 것이다.
핏물에 축축해진 복면이 호흡에 방해가 되었다. 주연교가 버둥거리며 복면을 벗었다.
“이 망할 년이!”
숨을 헐떡이는 풍전의 얼굴은 귀신처럼 무서웠다.
“감히 젖내도 안 가신 애송이들이 이 몸을 기습해?!”
번쩍!
어느새 물러나는 주연교를 지나쳐 달려온 이천상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풍전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거리가 얼마인데 허공에 떠서 날아오는가. 그야말로 애송이다운 공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대로 날려 주마!’
그때였다.
‘……?!’
풍전의 눈이 이천상의 왼손에 닿았다.
이천상은 세인승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인승은……?
‘헉!’
풍전의 오른쪽 어깨를 뚫은 세인승은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달려 있었다.
죽음의 위기, 강렬한 살기, 짧지만 격렬했던 전투의 연속으로 고통을 잊었다. 그래서 어깨에 세인승이 박힌 것도 잊은 것이다.
허공에 뜬 이천상이 순간 바닥으로 훅 떨어졌다.
천근추라고 하기에는 아직 조악했지만, 충분히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게다가 떨어지는 도중에 손에 쥔 세인승을 당겨 허벅다리에 걸기까지 했다.
우둑!
“크윽!”
풍전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퍼어엉!
고꾸라짐과 동시에 바닥을 쳐서 몸을 세운 그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이천상을 걷어찼다.
퍼어어억!
이천상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 나갔다.
이천상이 쓴 복면의 입가가 축축해졌다. 단 한 방에 내상을 입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익!”
제 다리를 내려다보던 풍전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이천상을 걷어찬 다리, 그 다리의 종아리가 피범벅이 되었다. 타격 순간 상대가 숨기고 있던 비수로 찌른 것이다.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찔리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집중력 저하였다.
푹!
뽑아낸 비수를 아무렇게나 던진 풍전은 한옆에 꽂힌 자신의 장도를 보았다.
카앙!
땅에서 뽑힌 장도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 위로 조소가 내려앉았다. 덕분에 풍전의 표정은 상당히 괴상해졌다.
“오른손이 잘려 나갔다고 죽어 줄 수는 없는 법. 병기를 다루는 자는 양수(兩手)로 똑같이 무공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후욱!
풍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상 때문에 여전히 기도는 불안정했지만, 칼을 쥐니 그 강력한 기도에 날카로움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주연교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반대로 복면을 벗은 이천상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했다.
풍전이 이천상에게 칼을 겨누었다.
“네놈이 이천상이냐? 아니면 지금 안 보이는 놈이 이천상이냐?”
이천상은 대답 없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가만히 그를 노려보던 풍전이 버럭 소리쳤다.
“내 부하들은 어떻게 했어!”
파아악!
일견 절절한 고함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천상은 상대와 대화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대답 대신, 그가 풍전의 틈을 포착하고 달려들었다.
사각!
어깨에 달린 세인승을 끊어 버린 풍전은 달려오는 이천상의 정수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벼락처럼 빠르고 바늘처럼 정교한 일도였다. 다음 공격으로 태산압정의 한 수가 날아들 건 알았지만, 알아도 피하기 힘든 일격이었다.
서걱!
이천상의 왼팔에 깊은 자상이 났다. 어떻게든 피하겠다고 몸을 틀었지만 반 박자가 늦어 버린 것이다.
풍전의 칼날이 기묘한 움직임을 발했다.
내리친 칼날이 뱀처럼 휘더니 이천상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도법(刀法)이 아니라 자격(刺擊) 위주의 검법을 보는 듯했다.
누가 봐도 이천상은 피할 수가 없었다. 풍전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빛이 어렸다.
‘이 새끼, 죽어라!’
카아아앙!
강렬한 쇳소리와 함께 이천상이 비틀거리며 밀려 나갔다.
순간 풍전은 경악했다.
‘갑옷?!’
그때, 어느새 다가온 주연교가 풍전을 향해 장을 휘둘렀다.
번쩍!
주연교는 장을 다 휘두르지도 못했다. 한 줄기 섬뜩한 도광(刀光)이 그녀의 가슴 부근을 사선으로 그은 것이다.
잘려 나간 의복 속, 가볍고 단단해 보이는 흉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풍전의 얼굴에 또다시 놀라움이 어렸다.
“그건 육대의?!”
쐐애애액!
한 줄기 파공성이 풍전의 귓전을 울렸다.
‘암기!’
풍전이 이천상 쪽을 향해 황급히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암기인 줄 알고 쳐서 떨어트리려던 자신의 행동이, 그야말로 인생 최악의 한 수가 되었음을.
‘적색탄…….’
풍전의 칼날이 적색탄을 때렸다.
퍼어어어엉!
화려한 폭음과 함께 시뻘건 불꽃이 확 타올랐다.
“으아아악!”
칼날이 부러지고, 곧이어 풍전의 왼손이 군데군데 터지며 허연 뼈가 튀어나왔다. 폭발 압력을 이기지 못한 손가락과 손뼈가 온통 부러져 버린 것이다.
훅!
넘실거리는 불꽃을 뚫고 접근한 이천상이 풍전의 가슴에 주먹을 휘둘렀다.
퍽!
풍전이 답답한 신음과 함께 물러났다.
거리를 좁히는 이천상, 풍전이 그의 얼굴을 향해 발을 뻗었다.
피융!
그런 상처를 입고도 각법의 속도와 날카로움이 대단했다.
간발의 차로 각법을 피한 이천상이 폭발적으로 움직이며 풍전의 오른쪽 어깨에 장을 쳤다. 신표비갑에 구멍이 뚫린 그 부분이었다.
퍼어억! 퍽!
풍전과 이천상이 동시에 비틀거렸다. 이천상의 장타와 풍전의 무릎이 정확히 상대의 어깨와 옆구리를 때렸다.
“쿨럭!”
밭은기침과 함께 피를 한 움큼 토한 이천상이 풍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기력이 남은 풍전이 시뻘게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개자식! 너만은 반드시 찢어 죽인다!”
“죽는 것은 너다.”
이천상의 눈이 풍전의 어깨에 닿았다.
뭐라 욕을 하려던 풍전은, 순간 섬뜩함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구멍 뚫린 그의 어깨에, 시커먼 구슬이 박혀 있었다.
“이……!”
펑!
폭음과 함께 자욱한 독기(毒氣)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