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1화. 인연 (2)
“하하하!”
통쾌함이 한가득 느껴지는 공무외의 웃음소리는 제법 듣기 좋았다.
“내 생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 날도 있었고, 진정 기쁨에 젖어 술잔을 기울인 적도 있었지. 그 얼마 안 되는 날들의 목록에 오늘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구만!”
“그러시군요.”
“이천상 그 녀석 생각 이상으로 걸물이었어. 물론 자네를 믿기야 했네만, 이렇게까지 잘 처리해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네.”
도헌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한 번 웃어 줄 만도 할 텐데,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굳이 가면을 쓸 필요가 없는 순간이었거니와, 도헌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정도 불편함은 보여 줘야 했다.
한참 웃던 공무외도 괜스레 뜨끔하여 말했다.
“자네, 기분 많이 상했나 보군.”
공무외 역시 이런 부분에서 모른 척 넘어갈 정도로 음흉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일수록 서운한 건 빨리빨리 털어 버려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물론 자신이 관계상의 우위에 있을 때만 발휘되는 지론이었지만.
도헌이 말했다.
“저 역시 그 녀석이 잘 해낼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 정도 능력도 없는 놈을 당주님께 추천하지 않지요.”
“아네, 알아.”
“그래도 귀히 얻은 인재인 만큼, 앞으로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허허, 내가 자네를 서운하게 했구만.”
공무외가 도헌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네. 군사부의 ‘그놈’에게는 절대 밀려서는 안 될 이유가 있거든.”
“…….”
“자네의 서운함은 이해하네. 앞으로는 이런 무모한 일은 없도록 할 터이니, 마음 풀게나.”
나를 제대로 다루려거든 내가 준 선물의 가치를 얕잡아 보지 마라.
은근히 날이 선 도헌의 그 말을, 공무외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도헌은 그런 의미로 불편함을 드러낸 게 아니었다. 이천상이 당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마음 졸인 것 자체가 그의 진심이었다.
도헌이 고개를 들었다.
굳었던 표정은 어느새 풀린 채였다. 그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신경 써 주시겠다는 말씀, 믿습니다.”
딱 여기까지가 좋다. 계속 꽁해 있으면 공무외도 마음이 상할 것이다. 도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할 한계를 알고 있었다.
공무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물론이지. 나만 믿게나.”
신경 써 주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헌은 그렇게 말했고, 공무외는 자연스레 그 말을 받아들였다.
도헌의 대범하고도 섬세한 정치였다. 이제 공무외는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 이천상을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군.’
평생을 이런 가면을 쓰며 대화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간 여러 사람이 힘 있는 자들 앞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숱하게 보았다.
공무외와의 관계에서 도헌 역시 배우는 게 많았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수도 없이 많이 생길 터, 이전까지의 자신을 철저히 버리는 게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좋을 일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녀석이 제법 다쳤다고 들었네.”
“예. 상대가 풍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 나도 이름은 들었네. 저쪽에서 정보를 막지 않아서 말이야. 생각해 보니 그것도 웃기는군.”
“과거 육대의 부관이었던 자입니다. 실제로 임무에 나간 적은 많지 않았지만, 무력은 절정고수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공무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육대의 부관급이었다고?”
“그렇습니다.”
거기까지는 조사해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애초에 도움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고 예민하게 반응해서도 안 되었으니, 조사 또한 대충 했을 수밖에.
“혼자도 아니었잖나?”
“풍전까지 다섯이었다고 합니다. 풍전을 수장으로 두고, 휘하에 육대 대원급 무력을 갖춘 이들 넷을 보냈다고 합니다.”
“허! 절정고수 하나에 육대 대원급 고수 넷을 셋이서 물리쳤단 말인가?”
“삼색탄과 육대경갑, 그리고 신표비갑을 주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셋이서 그만한 병력을 물리쳤어? 설마 야차령 셋 중 무공을 숨기고 있는 녀석이 있었나?”
“양건이란 자는 진마대 예비단 수석이었고 주연교는 환희원 출신입니다. 이천상과 무력은 비슷하거나 약간은 위일 수 있습니다만, 절정고수급은 아닙니다.”
“허어…….”
진심으로 놀란 모양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처음 도헌이 고개를 숙일 때를 연상케 했다.
“그 녀석들이 그 풍전이라는 놈 일행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들었나?”
“예. 상태를 보러 갔을 때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보고를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공무외의 얼굴에 약간의 흡족함이 깃들었다. 광마대주가 아무도 모르게 직접 보고를 해 주는 이 상황,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썩 좋았다.
게다가 도헌은 예상보다 더 빠릿빠릿했다. 확실히 도헌을 휘하에 둔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어떻게 그놈들을 처리했다던가?”
도헌은 이천상에게 들은 얘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굳이 과장할 필요가 없었다. 과장 없이도 놀라운 이야기였으니까. 사실 도헌조차도 이천상이 그렇게 머리를 잘 쓸 줄은 몰랐다.
모든 얘기를 들은 공무외는 혀를 내둘렀다.
“기가 막히는군. 그런 건 머리가 좋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습니다. 저 역시 현장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추천한 녀석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대담하고 날카로운 작전이었습니다.”
“예측이야 머리가 똑똑하면 다 할 수 있지. 중요한 건 그 많은 예측 중 가능성 높은 것을 추리는 안목이겠지.”
“그리고 행동력 역시 중요합니다. 천 리를 내다보는 사람도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반쪽밖에 되지 않는 법이지요. 특히 전투 부대에서 그러합니다.”
“그래, 맞는 말일세.”
공무외가 턱을 쓰다듬었다.
진지한 얼굴, 두 눈에 깃든 놀라움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다.
“고수일수록 한 수 차이가 넘어서기 힘든 차이로 다가오기 마련이지. 하지만 세상에는 몇 수의 차이도 어떻게든 뒤엎는 천재들이 종종 나고는 해.”
도헌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은 충분히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음.”
생각에 잠겼던 공무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기다리게.”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공무외의 손에는 상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옥빛이 도는 상자였고, 다른 하나는 칙칙해 보이는 검은색 상자였다.
공무외가 옥빛 상자를 도헌 앞에 놓았다.
“자, 이걸 열어 보게.”
“……?”
도헌이 상자를 열었다.
순간 텁텁한 향이 흘렀다. 기분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독한 약재 향이었다.
도헌의 눈이 흔들렸다.
“이것은……?”
“역시 알아보는군.”
공무외가 웃으며 말했다.
“사령단(邪靈丹)일세.”
“헉!”
도헌은 깜짝 놀랐다. 아니, 놀란 척을 했다.
“내가 보유한 여러 영약 중 하나일세. 이건 자네에게 주겠네.”
사령단은 천마신교에서도 유명한 영약이었다.
소림에 대환단(大丸丹)이 있다면, 신교에는 천마신단(天魔神丹)이 있다.
소림에 소환단(小丸丹)이 있다면, 신교에는 사령단이 있다.
신교제일의 영약이라는 천마신단에 비할 만한 물건은 아니지만, 사령단 역시 흔하게 볼 수 있는 영약이 아니었다. 특히나 마공을 연성한 자에게 사령단은 천금을 줘도 구하기 힘든 대단한 영약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천마신단보다 귀한 영약인데, 바로 압도적인 범용성 때문이었다.
천마신단의 경우 그것을 완전히 녹일 만한 최고급 마공을 익히거나 어느 정도 일가(一家)를 이룬 경지에 도달해야만 했다.
반면 사령단은 마공을 연성한 자라면 누구에게나 특별한 효능이 있는 영약이었다. 내공을 크게 불리는 건 물론 신체 자체를 마공을 익히기 좋은 체질로 변모시켜 주기 때문이다.
어떤 영역이든 고수보다는 하수나 중수들의 숫자가 훨씬 많은 법이다. 당연히 신교도 그러했고, 그래서 천마신단보다 사령단의 수요가 훨씬 많았다.
“이 귀한 것을 어찌 저에게……?”
“허허, 이 사람아. 자네가 나를 위해 힘써 주는데 이깟 사령단이 대수겠는가? 지금 자네 경지라면 오히려 천마신단이 더 좋겠지만, 그 물건은 내게도 없다네. 그래도 사령단이라면 자네에게 제법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도헌의 얼굴에 격동이 어렸다.
그의 얼굴을 본 공무외의 얼굴에 진득한 미소가 어렸다.
세상천지에 영약 싫어하는 무림인이 없는 법이다. 실력 좋은 칼잡이를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공 비급보다 영약이 더 효과적이다.
그간 공무외는 뒤에서 잘 받아 챙겨 둔 영약을 딱 한 사람에게만 썼다. 그리고 오늘로 두 번째가 되었고, 세 번째까지 가 볼 생각이었다.
가만히 사령단을 보던 도헌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물건은 저에게 크게 부담이 됩니다. 저보다 당주님께 더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들을 위해 쓰심이 더 좋을 것입니다.”
공무외가 멈칫했다.
“어허, 도 대주.”
“다만.”
도헌이 눈빛이 도전적으로 변했다.
“이걸 제게 주신다면, 그 사람들에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 보겠습니다.”
“……으하하하하!!”
공무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만!”
“죄송합니다.”
“아니야. 오히려 자네의 그 말 덕분에 더더욱 믿음이 가네.”
이리 큰 선물의 가치를 알아주고, 주는 사람의 마음에 더 강한 신뢰를 심어 주는 사람은 정말 흔치 않다.
‘그래, 자네 정도의 사람이 준다고 그냥 받아먹으면 안 되지.’
도헌을 향한 공무외의 신뢰가 두 배는 더 깊어졌다.
반면 공무외를 향한 도헌의 마음은 세 배나 더 싸늘해졌다.
‘교도들을 위해 쓰여야 하는 이 귀한 것들이 너희 정치 놀음 속에서 썩고 있었단 말이지.’
그래도 사령단까지 쥐고 있을 정도면 공무외의 수완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용서가 안 되었다.
속내를 숨긴 채, 도헌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허허, 감사한다면 그걸로 되었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
공무외가 검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천상에게 전해 주게.”
“이것이 무엇입니까?”
“괜한 고생을 한 대가일세. 아, 생각해 보니 괜한 고생은 아니군. 우리 모두 한솥밥 먹는 처지인데. 아니 그런가? 하하하!”
“물론입니다.”
“자네가 그리 위하는 사람이고, 인상적인 활약으로 그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 정도 능력을 보여 주었다면, 윗사람으로서 제대로 밀어줘야지.”
도헌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하면 이것도?”
“아, 오해하지 말게. 사령단보다 귀한 것은 아니야. 자네는 나무고 이천상은 열매일세. 나무가 곧게 서야 열매도 잘 맺는 법, 녀석이 좋은 인재임을 확신했지만 나는 언제나 자네를 더 위할 걸세.”
도헌을 향한 신뢰가 한가득 묻어나는 말이었다.
“다만, 마공을 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이 아닌가. 배운 시기를 생각하면 괴물 같은 성장세지만, 때로는 너무 빠른 발전이 성장의 탄력을 막기도 하지.”
공무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에게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천상 그 녀석에게만큼은 사령단만큼이나 귀한 물건일세. 자네가 가서 전해 주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