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2화. 인연 (3)
그날 밤.
침상에 누워 와공(臥功)을 연마 중이던 이천상의 귀로 한 줄기 전음이 흘러들었다.
“…….”
눈을 뜬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그의 몸이 움찔했다. 갈비뼈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어제 도착하여 치료받았고, 당분간 안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왼팔의 자상도 자상이지만, 갈비뼈의 경우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상태가 악화될 수 있다고 하였다.
‘나쁘지 않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상대적으로 덜 다친 주연교가 삼시 세끼 식사를 날라 주었다. 회복에 좋은 영양식을 먹고, 앉아서 계속 운공만 했더니 하루 만에 상당한 회복세를 보였다.
‘정공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익혀 본 적은 없지만, 듣기로 마공의 치유력은 정공을 능가한다고 하였다.
대신 일정 경지를 이루기 전까지 마기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몸이 축날 가능성도 있다. 마공이 극단적인 무학으로 분류되는 이유였다.
이천상이 익힌 금강야차마공은 고급 마공이었고, 그의 집중력 역시 어지간한 절정고수의 그것을 초월했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장삼을 걸친 이천상이 방을 나섰다.
‘…….’
옆방의 주연교는 자는 모양이었다. 호흡이 퍽 깊었다.
양건 역시 돌아와서는 온종일 제 방에서만 지냈다. 내일이 부대 창설일이니 그전까지 몸 상태를 최대한 끌어 올리기 위해서였다.
부대 정문을 지키는 호위들을 제외하면 지금 사령부에 눈을 뜬 자는 없다.
스르륵.
자연스러운 몸놀림으로 부대 건물에서 나온 이천상이 건물 뒤 야산을 올랐다.
갈비뼈에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보행이었다. 훗날 같은 부위를 다칠 일이 있을 것이고, 상처에 부담을 최소화하며 이동할 일도 있을 것이다. 이천상에게는 그런 세밀함도 있었다.
그렇게 야산 정상에 오른 이천상의 눈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셨는가.”
이천상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도헌이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누구도 모르게 만나야 할 일이 있었네. 그래서 여기까지 불렀어. 미안하게 되었네.”
“용건이 무엇입니까?”
여전하군.
도헌이 피식 웃으며 손으로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오게.”
이천상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도헌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무척 좋지?”
“그렇습니다.”
“하하, 거짓말하지 말게. 저게 뭐가 좋은지도 모르잖나?”
“남들이 좋다고 말할 만한 달빛이라는 건 압니다.”
도헌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사람들은 저런 달빛을 좋다고 말하지. 보름달도 아닌데 말이야. 그 이유를 아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음?”
“구름이 달빛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얼룩지거나 흐려지지 않고 제 색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런 달빛을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느끼는 감성을 이성과 논리로 풀면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것이다.
“맞아, 깔끔하지. 하지만 흐린 달빛도 사람의 기분에 따라 좋아 보이기도 하네.”
“…….”
“그건 이해하지 못하나?”
“그렇습니다.”
“이유가 분명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 필요하겠나.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건 ‘나’야. 내가 좋다고 생각하면 다 좋은 거지.”
“그런 식의 주관이라면 대다수가 싫어하는 피와 시체도, 다리 많은 벌레도, 악취가 나는 음식물도 좋을 수 있다는 겁니까?”
이런 식의 질문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도헌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자네 말마따나 대다수는 싫어하지.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별종들도 있다네. 피와 시체만 보면 흥분하는 혈귀(血鬼)도 있고 보통 사람 눈에는 끔찍하게 보이는 벌레에 환장하는 사람도 있지. 악취 나는 음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 아직까지 본 적은 없구만.”
“…….”
“머리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나야. 결국 내가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그 느낌을, 나는 모릅니다.”
“그래서 알아 가려는 거지. 자네 역시 세상에 속해 있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왜일까?
이천상은 도헌과의 짤막한 대화에서 괜스레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천상이 툭 던지듯 말했다.
“이 시간에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헌이 손에 든 검은 상자를 내밀었다.
“받게.”
이천상은 이게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받은 채로 도헌을 주시할 뿐.
“열어 보게.”
그제야 이천상이 상자로 눈을 돌렸다.
딸칵.
작은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속에는 푸른 구슬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도헌이 입을 열었다.
“개정단(開精丹)이란 물건일세.”
“개정단?”
“사람의 몸은 정(精)과 기(氣)와 신(神)이 제대로 작동해야 비로소 온전한 가능성을 손에 넣게 되지. 그리고 정기신(精氣神)이 하나가 되면, 범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손에 넣게 된다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금강야차마공 법문에도 쓰인 내용이지. 하지만 그것은 금강야차마공만의 특성이 아니야. 마공만의 특성도 아니지. 더 높은 경지,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모든 무공의 끝이자 시작이기도 하네.”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다.
“무림인에게 있어, 기(氣)는 어디에 근본을 두는가?”
“단전입니다.”
“정확히는 하단전(下丹田)이지. 사람들이 소위 단전이라고 말하는 배꼽 아래의 부위야.”
“…….”
“그렇다면 신(神)은 어디에 근본을 두는가?”
“머리입니다.”
“그렇지. 미간은 상단전(上丹田)의 출입구로서 영력(靈力)이 오가는 장소임과 동시에 상단전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하네. 내 영력이라 말은 했지만, 사실상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겠지.”
“…….”
“기의 근본은 인체의 중심인 하단전에 있어 강인하고 안정적인 신체를 유지하네. 신은 머리에 드나들며 작게는 의지의 강약, 크게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신이(神異)한 능력을 조절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정(精)은 어디에 근본을 두는가.”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중단전입니다.”
도헌이 미소를 지었다.
“슬픈 일을 겪으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네. 설레는 일이 생기면 가슴이 뛴다고 하지. 그것이 바로 정(精)일세. 무학과 기의 이치를 모르는 시절부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감정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네.”
“…….”
“하지만 사람은 이성적 사고라는 것을 하지. 본능 이상의 사고 덕분에 발전했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감정이라는 것에 무지하기도 하네. 가슴이 아프면 이것 때문에 슬펐다, 가슴이 두근거리면 이것 때문에 설렌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 신(神)이 드나드는 장소인 머리로 말이야.”
“…….”
“그래서 정신(精神)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라네. 정신은 곧 마음과 혼을 뜻해. 그 두 가지는 별개임과 동시에 결코 나뉠 수 없는 것이라네.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둘이야.”
“그렇군요.”
“맑고 건강한 정신은 몸이 만드는 것. 그것이 기(氣)이기 때문에 정기신은 본래 하나라네. 다만 그 균형을 완벽하게 맞추는 것이 중요해. 그 균형이 완벽에 이르렀을 때, 무인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손에 넣게 되네.”
도헌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 자네 상태를 살폈을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네. 진기(眞氣)는 없었지만, 마치 예전에 내공심법을 익히기라도 한 것처럼 하단전이 생성되어 있었네. 반대로 오욕칠정의 중심인 중단전은 텅 비어 있었어.”
“…….”
“그와 반대로 상단전은 비대하게 발달해 있었네. 무공을 연성하지 못한 자가, 아니 절정고수의 상단전도 그렇게까지 과발달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어.”
정기신, 즉 삼단전(三丹田)의 불균형이 극에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지. 하지만 이제 알았네. 중단전과 하단전은 모르겠지만, 자네 상단전이 그렇게 된 이유는 알겠어.”
“그것이 무엇입니까?”
“간단하네. 중단전 때문이야. 자네가 받아들이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모르니, 그 상태를 온종일 해석하고 분해하길 반복하지 않았나?”
“……!”
“정(精)의 정체를 모르지만 자넨 명백히 살아 있는 사람이야. 사람은 사고하기 마련이지. 자네의 상단전이 과발달한 이유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나눠 발달해야 하는 정신(精神)이 하나로 치우쳤기 때문이라네.”
꽤 그럴듯한 얘기였다.
도헌이 말을 이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자네의 상단전은 지나쳐. 나 또한 그런 상태를 접한 적은 없지만, 그리 발달한 이유는 자네의 사고력이 남들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확신하네.”
“사고력…….”
“이번 임무만 해도 그러하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대처 능력이었어. 하지만 자네는 이 당연한 걸 왜 떠올리지 못하냐며 도리어 의아한 눈으로 날 보았더랬지.”
실제로 그러했다. 이천상은 자신이 구상했던 작전 앞에 도헌이 놀라는 이유를 몰랐다.
양건이나 주연교야 그런 식의 경험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신 역시 맹수를 잡아 보지 못했다면, 맹수에게 사냥당할 뻔한 경험이 많지 않았다면 그런 식의 작전은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교의 전투 부대는 수많은 실전을 경험한 이들이 모인 곳이다. 이 정도는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게 별게 아니라면? 자네를 노린 이들은 왜 그것도 생각지 못하고 역으로 손쉽게 당해 버렸지? 자네처럼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들은 현역 경험이 없는 이들인가?”
“……!”
불의의 기습과도 같은 말이었다. 이천상은 흠칫 놀랐다.
도헌이 미소를 지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곤 하지만, 자네 역시 자기식대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증거일세.”
“그건…….”
다르다, 라고 말하려던 이천상은 입을 다물었다. 다르지만, 또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헌이 턱으로 개정단을 가리켰다.
“공 당주의 선물일세.”
“이게 말이오?”
이천상의 말투가 저도 모르게 예전으로 돌아왔다.
도헌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천상에게도 나름의 변화가 찾아왔음을.
“정공에도 그렇지만, 특히 마공을 연성한 사람에게 개정단은 뛰어난 위력을 발휘하네. 정확히는, 직접적인 발전보다 난관을 돌파하는 데에 도움을 주지.”
“그게 무슨 말이오?”
“마공을 익힌 자가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심마(心魔)를 겪게 되네.”
“심마.”
“그래, 심마. 개정단은 그 심마를 없애 주는 영단이라네.”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것이 가능하오?”
“결과적으로 가능하네. 심마 그 자체를 없애 주는 게 아닌, 정신과 마음을 이완시켜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어 주는 약이니까.”
“……?!”
“진기도 그러하듯, 인체의 신경(神經)에 간접적으로 작용시켜 고여 버린 중단전의 기를 인위적으로 풀어내는 단약이라고 하네. 그걸 제조한 사람은 죽어서 제조법이 소실되었지만, 강호에 꽤 많이 풀렸다고 들었네.”
도헌의 얼굴에 작은 긴장이 떠올랐다.
“효과는 확실해. 꽤 많은 마인이 그 약으로 효과를 봤으니까. 물론 그걸 취한다고 당장 깨달음을 얻거나 무공의 비약적인 상승을 맛본 마인은 없네. 그저 심마에서 벗어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받은 게 전부야.”
“…….”
“자네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야.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세상천지에 감정 자체를 못 느끼는 사람은 없네. 그건 사람이 아니니까.”
“……하면 나도?”
“나는 자네가 누구보다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상태라면 애초에 중단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어.”
“…….”
“나는 그 약이, 적어도 자네에게 해가 되지 않음을 확신하네. 그리고…….”
도헌이 품에서 금낭을 꺼내 들었다.
“이 사령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