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3화. 인연 (4)
사령단은 제조일에 따라 색이 크게 바뀌는 영약이었다.
그중 붉은색 단약은 겨울철 십만대산의 한 동굴에서 꽃을 피우는 홍국구엽초(紅菊九葉草)가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채취해 만드는 것으로, 사령단 중 최고로 쳤다.
이천상의 눈앞에, 바로 그 붉은 사령단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금낭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령단은 상당히 텁텁한 향을 풍겼다. 모르는 사람이 맡아 보면 말린 약재의 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분을 나쁘게 할 정도로 독하진 않다. 그래도 세다. 냄새만으로 폐가 살짝 오그라드는 기분, 동시에 단전에 도사리고 있던 마기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마기가 반응한다.’
정확히는 공명이다.
사령단이 마기를 크게 불리고 신체를 마공에 맞는 체질로 바꿔주는 것은, 단약 안에 들어가는 모종의 약초 때문이라고 들었다.
시중에 흔하게 유통되는 약초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 약초의 어떠한 성분이 마기를 불리는데, 그 양도 지극히 미미하여 제 효과를 보려면 뿌리 수천 개를 며칠 안에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도 자칫 잘못하면 약초의 독성에 오히려 몸이 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흔한 약초 몇 개의 성분을 극한까지 증폭시키는 것이 사령단 제조법의 요체였다.
“이해할 수 없소.”
“무엇이 말인가?”
이천상이 도헌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당히 홀가분해 보였다. 그 차분하고 단정한 얼굴에, 어떠한 아쉬움이나 미련도 없었다.
“당신은 내게 은혜를 입었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보물까지 건네줄 만한 은혜 같지는 않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나야.”
“……?”
“내 주관으로 본다는 것이지, 은혜라는 것도.”
“…….”
“자네가 생각했을 때는 별거 아닌 도움일 수 있어도, 내게는 인생을 바꿀 만한 은혜였네.”
“불합리하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내가 그렇게 느꼈으니 그걸로 된 것이야.”
“하지만 대개…….”
“부담스러운가?”
순간 이천상은 움찔했다.
도헌이 미소를 지었다. 환한 달빛을 닮은 미소였다.
“처음 우리가 대화를 나누었을 때, 자네는 내가 받은 은혜가 뭔지 모르는 채로 내 호의를 받겠다고 했어. 아주 거리낌 없이 말이지. 어떤 식으로 느꼈든 자네와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야.”
“……!”
“하지만 지금은 세속적인 계산법을 끌어와 나의 선물을 주저하는군.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
도헌의 말대로였다.
이천상은 원래 이러지 않았다. 왜 저렇게까지 할까, 라는 의문은 가져도 이해하지 못한 감정의 일부로 넘겨 버렸다.
이천상의 두뇌는 수면을 제외한 어떤 순간에도 분석을 멈춰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분석되지 못한 것들은 내버려 둔다. 다만 그 상황에서 내게 이득이 되는 최선의 선택에 눈을 돌리면 그뿐이다.
이천상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평가 외에, 냉혹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한데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자꾸만 분석하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부담?’
부담스럽다는 게 무엇인가.
‘고맙지만 그냥 받기는 미안한 마음이라고 알고 있다.’
미안한 마음은 또 무엇인가.
“……!”
이천상이 또 한 번 움찔했다.
가슴 어딘가가 시큰시큰하다. 뼈나 근육, 내장이 아픈 것도 아닌데도 그러하다. 묘한 감각이었다.
그런 이천상을 보던 도헌이 조금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 그냥 받기 그렇다면, 생각을 달리하게나.”
“……?”
“내게 빚을 하나 지는 거지.”
“빚이라.”
“솔직히, 이번에 자네가 겪은 전투는 굳이 안 벌어져도 되는 일이었어. 아닌 말로 본대의 인원을 차출하여 아무도 모르게 지원해주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하니 나도 미안함이 컸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절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될 일이다.
신교의 정보망이 예전과 같지는 않다지만,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일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할 만큼 무뎌지진 않았다.
오히려 이천상 일행이었기에 무슨 일이 터졌는지 세밀하게 알아보지 않은 것이다. 직위도 그렇고, 관망할 만한 위치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내전 최고의 전투 부대인 신교육대의 정예병들이 몰래 나간다?
있을 수 없는 일일뿐더러, 만에 하나 몰래 빠져나갔다 해도 훗날 걸리게 되면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공무외 선에서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자칫 광마대까지 영향을 받는 것이다.
“자네가 원했다지만, 결과적으로 자네를 위험한 일에 끌어들인 것은 나일세.”
“그렇지 않소.”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선택은 내가 했소. 처음 선택을 내렸을 때부터,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은 나의 몫이오. 당신이 미안해할 아무런 이유가 없소.”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미안함을 느끼네. 최소한 챙길 건 챙겨 줬어야 했네.”
“챙겨 주었잖소?”
삼색탄과 신표비갑, 부위별 경갑은 물론 흘러가는 정보까지 충분하게 받았다. 그 정도 도움을 줬는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한심한 일일 것이다.
“내 계산은 이걸로 끝이오.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이미 당신에게 빚을 졌소. 나의 생존을 위해 무리일 수 있는 부탁을 했으니까.”
“이 사람아, 섭섭하게 그 무슨 말인가?”
“더는 당신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소.”
도헌이 한숨을 쉬었다.
“툭 터놓고 말하겠네. 자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네. 이제 와서 자네와 나 사이에 채무 관계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왜 그렇소?”
“왜 그러하냐…… 이유를 묻는다면, 자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적인 이유는 없네. 나는 그저 자네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내가 왜 마음에 들었소?”
이렇게까지 따지고 들어와야 하나?
하지만 도헌은 이천상의 이런 반응에 한해서만큼은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있고, 이런 대화로 인해 인간적으로 성숙해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데에는 이유가 없을 수도 있는 거라네.”
“그것은…….”
“미안한 말이지만, 많은 사람이 자네를 이유 없이 껄끄러워하고 혐오하는 경험을 많이 겪지 않았나?”
일부러 ‘혐오’라는 강한 표현을 썼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인간은 평범함과 상식적이라는, 명확하지 않은 틀을 존재하는 것인 양 취급하며 살고 있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평범함과 상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소.”
“그런가.”
“그들이 볼 때, 나는 평범하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소. 그래서 나를 꺼리는 것이오. 인간은 익숙지 않은 상대의 반응에 거리를 느끼니까.”
“그렇다면 나도 자네 못지않은 별종인 모양일세. 나 역시 자네의 그러한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지만, 결국 호감으로 이어졌으니까.”
“…….”
“게다가, 우리의 거래는 여전히 유효하네. 나는 자네가 세상을 더 잘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면 돼. 이 사령단도 그래서 주는 것이네.”
“그럼 나는?”
“음?”
“거래라면,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오? 생각해 보니 그것을 명확히 하지 않았잖소.”
“…….”
도헌은 대답 없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은 도헌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미래.”
“……?”
도헌이 이천상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사령단을 올려 주었다.
“자네에게 많은 것을 줄 것이네. 그러니 자네는 내게 미래를 주게.”
“미래……?”
“추상적이지. 관념적이라네. 그러나 내가 진정 자네에게 바라는 것은 미래야.”
“어떤 미래 말이오?”
“더 나은 신교, 더 나은 세상.”
“…….”
“마인이 마인다운 세상, 신교가 신교다운 세상을 원하네. 자네가 그런 세상을 위해 선봉에 서서 피거품 잔뜩 낀 신교의 상처를 말끔하게 소독해 주기를 바라네.”
이번만큼은 이천상도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못했다.
‘뭐지?’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하지만…….
‘왠지…….’
묘하게 알 것도 같았다.
구체적으로 해석이 안 되는 그 미래라는 말을, 이천상은 머리가 아닌 ‘무언가’로 받아들였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이지만, 이천상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도헌은 놓치지 않았다.
그가 피식 웃었다.
“거 영약 한번 주기 힘드네그려. 사령단씩이나 되는 보물을 주는데 자네처럼 이것저것 따지는 사람도 없을 걸세.”
몸을 돌린 도헌이 달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마음이 편하구먼. 사실 그 사령단, 날름 삼켜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네. 그거 한 알로 경지가 올라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본교의 이대영단 중 하나야. 욕심이 마구 솟구치더구먼.”
“…….”
“나에게는 아니지만, 자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야. 거래든 뭐든, 같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이에 더 좋은 효율이 보장된 동료에게 영약 한 알 주는 게 뭐 그리 대수겠나?”
“…….”
“그래, 솔직히 대수긴 해. 전혀 아깝진 않지만, 부러움은 어쩔 수 없군.”
도헌이 헛기침했다.
“멋쩍구먼. 시원하게 주고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나도 어지간히 속물…….”
“받으시오.”
도헌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이 사람아. 농담일세, 농…….”
순간 도헌의 눈이 흔들렸다.
반으로 쪼갠 사령단 하나를 건네며, 이천상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형법당주가 옹이눈이 아니라면, 당신이 사령단을 취했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거요.”
“이, 이게 무슨 짓인가?!”
“취하지 않고 보관하기만 한다면, 형법당주의 마음이 어떻겠소? 굳은 신뢰를 쌓았는데 괜히 그 신뢰에 금이 가게 만들지 마시오. 그리고…….”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동료라고 한다면, 좋은 것은 나누고 좋지 못한 것은 함께 짊어져야 한다고 들었소.”
“…….”
“효율 면에서 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의 정(情)이라고 한다면 나도 한번 배워 보겠소.”
“이보게.”
“내게 미래를 원한다면 당신도 강해져야 하오.”
“……!”
“그 미래를 당신도 누려 봐야 할 거 아니오?”
“자네……!”
“강해져서 올라가시오. 올라가서 내게 더 많은 걸 주시오. 언제 제대로 선사할지 모르겠지만, 때가 되면 당신이 말한 그 미래라는 걸 선물해 주겠소.”
도헌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돌았다.
반을 쪼갠 사령단을 자신에게 돌려주는 이천상의 행위 자체가 큰 선물이었다. 천마신단을 손에 넣었다 해도 이보다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격동 가득한 눈으로 이천상을 보던 도헌이 반으로 쪼갠 사령단을 받았다.
“이 마음, 잊지 않겠네.”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오.”
“나는 알겠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
놀랍게도 이천상의 목소리가 조금은 퉁명스러워졌다.
“좋겠소, 아는 거 많아서.”
“하하하하!”
통쾌한 도헌의 웃음소리는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당신이 더 고달파질 거요.”
“좋지, 좋아.”
“미래라…… 아직 잘 모르겠지만, 왠지 알 것 같기도 하오.”
“복잡한가? 하긴, 그렇겠지. 그냥 쉽게 생각하게. 지금 신좌(神座)에 앉은 이와 반대되는, 헌신적이고 좋은 신을 위해 나아가면 되는 것이야.”
“좋은 신이라.”
이천상의 동공에 은은한 황금빛 광채가 떠올랐다.
“좋은 신(神)을 선물하겠소.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