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4화. 인연 (5)
다음 날 정오.
각 조직에서 차출된 마인들이 야차사령부의 거대 연무장에 모였다.
그 숫자는 오백이었다. 신교 부대 전체를 보면 그리 많은 수라고 할 수 없었지만, 정예라고 생각할 때 오백의 숫자는 상당한 것이었다.
물론 실제 정예로 운영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상부에 선을 대기 위해 차출한 마인들 대다수가 야차호령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들보다는 독기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연무장 앞, 높은 단상에는 총 다섯 명의 마인이 서 있었다.
고작 다섯에 불과한데도, 연무장에 집결한 오백 마인들에 뒤지지 않는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다. 차원이 다른 무력,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이들이었다.
그중 단연 압권은 중앙에 선 초로의 사내였다.
“나는 양백호(楊百戶)다.”
혈마인(血魔人)이라는 별호로 유명한 신교의 초절정고수로, 지닌바 무력이 환희원주에 비견된다는 마인이었다.
소싯적 군문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굉장한 실력을 지녔음에도 직책이 백호장에서 멈췄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진짜 이름을 버리고 백호를 이름으로 삼았다. 그 흘러간 직책에 특별한 추억이 있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았다. 어쨌든 그의 이름은 양백호가 되었다.
신교에 투신 후, 뛰어난 재능과 압도적인 실전 경험으로 순식간에 내전으로 발령받아 혈마대의 수장이 된 그는, 잔혹한 손속 때문에 혈마인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 좋은 실력으로도 내전의 여러 자리를 전전했다. 윗선에 아부할 줄을 모르고 내려진 임무만 딱딱 처리했기에, 상부에서도 그를 높은 자리에 기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야차사령의 대장이 되었다.
“우리는 위대한 신교의 감찰 부대이자 때로는 전투 부대의 역할도 겸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정예인지는 모르겠군.”
양백호의 눈빛은 그 별호답게 살벌했다.
“긴말 안 하겠다. 야차사령이 어중간한 부대로 남을지, 신교를 대표하는 최정예 부대로 성장할지는 나와 너희의 몫이다.”
후욱!
양백호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가 연무장 전체를 압도했다.
도열한 마인 중에는 진중한 자도, 껄렁껄렁한 자도, 소심한 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자세를 풀지 못했다. 양백호의 살기와 위엄은 그렇게나 대단했다.
“신교 최고의 진법과 전술을 바탕 삼아 하루하루 실전과 같은 훈련을 진행할 것이다. 포기도 없고, 당연히 부대 이탈도 없다. 너희가 야차사령에서 나갈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사망했을 때뿐이다.”
살벌한 발언이었다. 도열한 마인들의 눈빛에 불안이 차올랐다.
양백호가 몸을 돌렸다.
“정식 훈련은 사흘 후다. 그때까지 알아서들 정비하라.”
그 말을 끝으로 양백호가 본부 건물로 들어가자 한 명의 중년 사내가 올라왔다.
사내를 본 이천상과 양건, 주연교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바로 수일 전, 세 사람에게 특별 임무를 주었던 군사부 소속 마인이었다.
“야차사령의 부령주 장무병이다.”
귀안신장(鬼眼神掌) 장무병.
양백호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뛰어난 전술적 안목과 두뇌로 백뇌각 총괄 군사직에 올랐던 이였다.
개인의 힘과 명성은 양백호에 비할 바 아니지만, 소속원으로서 양백호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 그런 그가 야차사령부의 이인자로 들어온 것이다.
“내 뒤에 있는 이들은 세 개의 각을 다스리는 각주(閣主)이자 부관들이다. 실질적으로 그대들을 통솔하는 이들이니, 이들에게 밉보이면 생활이 고달파질 거다.”
본래는 장무병 역시 부관이 될 거라고 하였다. 한데 부령주가 되어 나타났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장무병의 권력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본 부대는 급조된 부대에 가깝다. 지원은 많이 받지만, 아직 체계적으로 정립된 것이 없어. 누구를 조장으로 세울지, 총괄 조장으로 누굴 뽑을지조차 계획한 것이 없다.”
장무병이 씨익 웃었다.
“위계는 사흘 동안 알아서들 잡아라. 누굴 조장으로 세울지, 누굴 총괄로 둘지는 전적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다.”
양건은 속으로 장무병을 욕했다.
역시 임무에 대한 보상 따위는 없었다. 성공리에 임무를 마치면 조장직을 준다고 했지만, 장무병에게 그런 것은 굳이 지킬 만한 약속이 아닌 것이다.
‘개 같은 새끼.’
장무병이 말을 이었다.
“평화롭게 토론하든, 싸워서 쟁취하든 우리는 관여치 않는다. 다만 개박살을 낼지언정 죽여서는 안 돼. 만약 싸우다 죽는 인원이 발생하면, 건물 전체 인원에게 죄를 묻겠다.”
아귀다툼을 독려하는 말이었다.
각 조직에서 차출된 이들인 만큼 이런 일로 죽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하나하나 신경 써 줄 이유도 없다. 장무병에게 조직원들은 딱 그 정도 의미였다. 잘해도 본전인 것이다.
“사흘 뒤에 보자.”
장무병 역시 단상에서 내려와 거처로 들어갔다.
창설식은 그렇게나 단출하게 끝나 버렸다. 세 명의 부관들, 야차일각과 이각, 삼각의 주인인 그들의 명령에 따라 마인들이 거처로 들어갔다.
쉬지도 못한 채 전장으로 뛰어든 그들의 눈에 불안과 살기, 초조가 들끓었다.
* * *
이천상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이미 두 명의 마인이 그곳에 있었다.
“…….”
이천상이 자신의 침상을 바라보았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덩치 좋은 마인이 그의 침상에 앉아 있었다.
“음?”
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방 소속인가?”
“그렇다.”
이천상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딱딱했다. 양건, 주연교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공대도 하지 않았다.
덩치 좋은 마인, 종평이 피식 웃었다.
“이 짐은? 네 거냐?”
“그렇다.”
“재미있구만. 우리가 먼저 들어왔는데 이미 이곳에 짐이 풀려 있었네?”
종평이 벽 쪽 침상에 짐을 푸는 마인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
또 다른 마인, 허필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말없이 자신의 짐을 풀 뿐이었다.
종평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딱히 튀는 외모가 아니었는데, 얼굴을 찌푸리니 제법 무시무시했다.
“저 새끼 주둥이 무거운 건 여전하네.”
표정만 보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한 방 먹일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종평은 그러지 않았다. 다시 인상을 푼 그는 턱을 괴고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창설식 전에 먼저 온 거냐?”
“그렇다.”
“어디 소속이었어?”
묻는 종평을 가만히 보던 이천상이 툭 던지듯 말했다.
“투마.”
“엉?”
종평의 눈이 커졌다.
“투마? 설마 투마장의 그 투마를 말하는 거냐?”
“그렇다.”
“……어허허허!”
종평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시발, 아무리 한 끗발 밀린대도 그렇지, 투마 출신이 여기로 왔어? 이거 정예 부대 맞아?”
이천상은 아무 말 없이 종평을 바라보았다. 허필 역시 자신의 짐을 풀고만 있을 뿐, 두 사람의 대화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종평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놈인가 싶었는데 이러면 얘기가 빠르지.”
종평이 엄지로 침상을 가리켰다.
“이제부터 이 자리는 내 거다. 넌 저 자리에 짐 다시 풀어라.”
당연하다는 듯 몸을 돌린 종평이 투덜거리며 자신의 짐을 풀었다.
“빌어먹을, 일각에 일 호로 배정되었다길래 괜찮은 놈들이랑 함께할 줄 알았더니만 투마라고? 저런 병신이 어떻게 사령부로 들어왔지?”
원래부터 목청이 컸던 모양이다. 중얼거린다고 하는데 그 목소리가 방을 울릴 정도였다.
말없이 종평을 보던 이천상이 발을 떼었다.
“저런 자식이랑 조 짜면 우리만 힘들어지는 거지. 하여튼 운도 지지리 없네. 야, 앞으로 제대로 단련시켜 줄 테니까 발목 잡는 일 없도록…….”
퍼억!
살벌한 소리와 함께 종평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종평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뭐야?”
순간 왼쪽 오금에서 강렬한 통증이 일었다. 오금이 걷어차여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익!”
고개를 돌린 종평.
그런 그의 시선에 커다란 주먹 하나가 들어찼다.
빠각!
“억!”
종평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으아악!”
부러진 코에서 엄청난 통증이 일어났다. 눈물이 쭉 나오고 정신이 없었다.
“이 개자식이!”
허둥대며 일어난 종평이 눈가를 훔치고 주먹을 들었다.
그때, 이천상의 발이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콰득!
창틀을 부수고 떨어진 종평이 그대로 추락했다.
퍼억!
“아아아악!”
그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건물 벽을 타고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워낙 튼튼한 몸뚱이라 그런 걸로 죽지는 않는다. 다만 착지를 제대로 못 해서 오른 다리와 왼팔, 좌측 갈비뼈 네 대가 부러져 버렸다.
몇 번이나 컥컥대던 종평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끔찍한 통증과 내외상 때문이었다.
이천상은 창밖을 보지도 않은 채 부서진 창틀 잔해를 털었다. 종평의 옷가지는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요, 행동이었다.
놀랍게도 그건 허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이 부서지고 사람 하나가 떨어졌는데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름은?”
짐을 대충 다 풀고 정리한 허필이 툭 던지듯 물었다.
“이천상.”
“나는 허필이다.”
“알겠다.”
그게 끝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어렸다.
잠시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번에도 허필이었다.
“투마 출신이라고?”
“그렇다.”
“투마의 무공이 아닌데.”
“알 바 아니다.”
침상에 앉은 허필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불을 털고 다시 까는 이천상의 행동은 언뜻 한가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허필의 눈이 깊어졌다.
“조장이 되고 싶나?”
사람 하나가 박살이 난 상황에서 나올 질문이 아니었다.
이천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럴 생각이다.”
“왜지? 출세욕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모두를 위해서다.”
“그건 무슨 말이야?”
“내가 조원이 되면 조장이 힘들 거다. 그럴 바에야 내가 조장이 되어 조를 이끄는 게 낫다.”
황당할 정도로 개인적인 이유였다. 무감하던 허필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성격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
“…….”
“열 명이 한 조라는 건 알고 있겠지.”
“안다.”
“일각 삼 층의 방 세 개를 먹어야 조장이 될 수 있어. 원정이라도 갈 생각이냐?”
“빨리 만들고 개인 시간을 가지려면 그게 낫겠지.”
“실력이 괜찮은 건 알겠지만, 혼자서 그 많은 인원을 휘어잡으려면 힘들 텐데.”
침상 정리를 끝낸 이천상이 허필을 바라보았다.
허필이 고개를 저었다.
“난 조장에 관심이 없어. 그렇다고 널 도울 이유도 없으니, 알아서 평정하고 돌아와. 그럼 아무 불만 없이 조원으로 활동하지.”
“그러지.”
신기할 정도로 담담한 반응이었다.
허필 역시 이번만큼은 궁금했는지 조금은 호기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잘난 놈 하나 나타나면 우르르 몰려들어 쫓아내는 게 보통이야. 그 많은 놈들을 어떻게 평정할 생각인데?”
이천상이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힘으로.”
이천상이 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후, 옆방이 소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