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5화. 조장의 권위 (1)
배송된 짐을 풀고 자리에 맞게 배치하던 양백호는 순간 북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벌써 시작했나.”
이곳은 야차사령의 간부인 령주와 부령주, 그리고 휘하 수하들과 경비병들이 거주하는 장소였다. 각주들은 담당 건물 일 층에서 지냈다.
일각부터 삼각까지는 삼각(三角)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안쪽 중앙에 사령관(死令館)이 있었다. 말하자면 세 채의 부대 건물이 사령부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부지가 원체 넓어서 부대 건물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방음도 잘되어 있어서 외부의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걸 뚫고도 싸움이 시작된 걸 알아차린 양백호의 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시작부터 창을 부수고 상대를 날려 버린 누군가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급하기도 하군.’
근본적으로 마인인 만큼, 여느 무림인들보다 훨씬 거칠다. 그런 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왔으니 불안감과 기대감 등으로 많이 예민해졌을 것이다.
평범한 무림인이라도 그럴진대 마인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굉장한 속도였다.
‘서로 눈치도 보지 않고 바로 행동했다…… 둘 중 하나군. 작정을 했든, 제정신이 아니든.’
뭐가 됐든 사흘 후에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될 것이다.
‘어쩌면 죽는 놈들도 나올지 모르지.’
양백호의 눈에 엄정한 기운이 어렸다.
장무병이 말한 대로, 죽는 이가 나온다면 그 건물 전체가 처벌받게 될 것이다. 그 처벌 과정에서 또 죽는 놈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백호는 거기까지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조차 버티지 못하는 놈들이라면 야차사령에 눌어붙을 자격이 없다. 합동이 뭔지도 모르는 오합지졸들을 일일이 친절하게 가르쳐 줄 시간도 없었다.
철저하게 마인답게 대할 것이다. 이곳의 대장으로 임명받을 때부터 세워 둔 원칙이었다.
짐 정리를 마치고, 양백호는 문득 서재 옆에 덩그러니 놓인 대검(大劍)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깊어졌다.
스르릉.
걸어가 대검을 뽑아 보니, 검신(劍身)의 광택이 대단했다.
검날의 두께가 두 치가 조금 안 될 정도로 굵고, 검폭은 반 자를 훌쩍 넘긴다. 칼날 길이만 삼 척이 넘는 이 검은 무려 삼십 년을 함께해 온 전우였다.
“……빛이 바랬군.”
탁!
납검한 그가 검을 다시 서재 옆에 세워 두었다. 애병(愛兵)이지만, 다루는 방식은 거칠고 무관심했다.
창가로 이동한 양백호가 창틀에 양손을 얹고 밖을 바라보았다.
구름 많은 하늘이 우중충했다. 그리고 하늘을 보는 그의 눈은 하늘 이상으로 어두웠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계십니까?”
문밖에서 장무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백호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들어오게.”
딸각.
문이 열리고 장무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그게…….”
장무병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양백호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장무병의 오만하고 냉막한 성격은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 그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보고드릴 게 생겼습니다.”
벌써?
“뭔가?”
“일각과 이각, 삼각에 각기 조장이 생겼습니다.”
“……?!”
양백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
“그리고, 사망자도 나왔습니다.”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양백호의 얼굴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죽어 나갈 놈이 생기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정말이지 대책 없는 놈들이었다.
“어딘가.”
“일각입니다.”
관리자들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지만, 양백호는 너무나도 궁금했다.
마침 정리도 끝났고 할 일도 딱히 없었다.
“가 보지.”
* * *
일각의 건물 주변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몇몇 마인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 있었고 심지어 모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어지간히 당한 모양이었다.
혀를 찬 양백호가 일순 눈을 빛냈다.
“저놈, 살아 있나?”
덩치가 크고 팔다리가 하나씩 부러진 놈이 보였다.
생기(生氣)는 있지만 워낙 처참해 보이는 형상이라 그런 질문이 절로 나왔다.
마인에게 가서 맥을 짚은 장무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습니다만, 내외상이 심합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죽거나 폐인이 될 것 같습니다.”
“부상자들을 의방으로 보내게.”
장무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푼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시지요. 아랫것들에게 시키겠…….”
장무병은 말을 다 끝내지도 못했다. 이미 양백호가 일각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백호의 등을 보던 장무병이 피식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헉! 령주님!”
일각의 각주 영관이 고개를 숙였다.
“여긴가?”
“예?”
“맞군. 피 냄새가 짙은 걸 보니.”
영관이 나온 곳은 삼 층 칠 호였다.
양백호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
놀랍게도 방 안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침상과 옷장 등 성한 곳이 없었다. 바닥도 살짝 꺼졌고, 천장까지 묻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무릎을 꿇고 양손을 뒤통수에 포갠 채 등을 보인 사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이 살인 사건의 범인인 모양이었다. 범인 앞에 참혹하게 살해당한 두 구의 시신이 있었고, 공포 가득한 얼굴로 범인을 바라보는 두 명의 마인이 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양백호가 시신으로 시선을 던졌다.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인 채, 터진 안구와 귀로 진득한 핏물을 흘리는 시신들.
“……폭혈마공(爆血魔功).”
폭혈마공은 신교에서도 아주 유명한 마공이었다.
초기 진전도 느리고 위력도 약하지만 오 성(五成)이 넘어가면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마공으로, 상대의 혈관에 직접적으로 침투하여 체내의 수분을 폭발시키는, 신교에서도 잔혹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공이었다.
그리고 이 마공은 당대 십대마왕 중 하나인 자소대마(慈笑大魔)의 절기였다.
양백호가 차갑게 말했다.
“일어나라.”
범인이 뒤통수에 손을 포갠 그대로 천천히 일어났다.
“몸을 돌려라.”
순순히 몸을 돌리는 사내.
이제 스물을 갓 넘긴 듯 생생한 젊음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가득한 생기와 달리 나른한 눈매와 인이 박인 듯 조소를 그리는 입매가 상대의 신경을 자극했다.
양백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이 뭐냐?”
“연치상입니다.”
자소대마와 같은 성씨를 쓴다.
폭혈마공처럼 위험한 무공을 혈육 아닌 다른 마인에게 전수하긴 어려울 것이다. 당연히 자소대마의 혈육일 거라고 예상했다.
의아한 것은, 양백호가 이 연치상이라는 녀석을 교내에서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자소대마에게 이런 자식이 있다는 얘기도 들은 적 없다.
“왜 살해했느냐?”
“주제 모르고 덤비기에 살해했습니다.”
이놈 봐라?
양백호가 피식 웃었다.
“부령주.”
“예, 령주님.”
“이놈 모가지 따서 사령부 정문에 걸어 놓게.”
순간 연치상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장무병과 영관도 놀라서 양백호를 바라보았다.
양백호가 벽을 등지고 선 마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방부터 치워라. 시신은 건물 옆에 쌓아 둬.”
“령주님!”
장무병의 다급한 부름에 양백호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나?”
입을 열려던 장무병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자신을 보는 양백호의 눈빛, 차갑기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가축이나 물건을 봐도 이보다는 인간미가 있겠다 싶을 정도로 서늘한 안광이었다.
장무병이 고개를 숙였다.
“일단은 형법당에 넘기는 것이 어떨는지요?”
“이유는?”
“예?”
“이곳에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내 소관일세. 벌을 줘도 내가 주고, 살려도 내가 살리네. 잊었나?”
그러한 권한이 발령서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신교의 모든 조직에 통용되는 암묵적인 규율이었다.
특히나 야차사령부처럼 신설된 조직의 경우 초기의 엄격한 상명하복이 필수였다. 그러지 않고선 휘하 마인들의 군기가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장무병이 연치상을 곁눈질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령주님. 잠시 밖에서 얘기 좀 하시겠습니까?”
“사령부의 공무와 관련된 사항인가?”
“그렇습니다. 어서 밖으로…….”
“진즉 보고하지 않고 뭘 했지?”
“예?”
“이처럼 다급한 일을 진즉 보고하지 않은 것 역시 업무 태만이야.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장무병의 얼굴이 확 굳었다.
양백호가 영관에게 말했다.
“뒤처리를 맡기겠네.”
“예? 아, 예!”
일각에서 나온 양백호가 장무병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령주님. 저 녀석은 자소대마 장로님의 사생아입니다.”
“사생아였군. 그래서 들어 본 적이 없었어.”
“그렇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서야 알았습니다. 교외에 두었다가 이번에 입교시켜 사령부로 발령을 냈지요.”
“그래서?”
“예?”
“보고할 게 있다지 않았나?”
장무병이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자소대마 장로님의 자식입니다. 단체 처벌이야 아무 말 않겠지만, 죽인다면 뒤탈이 생길 것입니다.”
“보고할 게 그거였나?”
“……?”
“그건 보고가 아니라 걱정이고 조언이지. 자네는 분명 보고를 하겠다고 했네만.”
“령주님!”
양백호가 몸을 돌렸다.
“다 처리하고 돌아와서 보고하게. 여기까지는 넘어가겠네. 다시 한번 거짓을 입에 담으면, 그때는 부령주라 해도 용서하지 않겠네.”
순간 장무병의 눈빛이 돌변했다.
“죽을 겁니다.”
“뭐?”
“령주님께서 저 녀석을 죽인다면, 령주님께서 죽을 겁니다.”
양백호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장무병을 돌아보았다.
장무병은 등허리가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은은한 살기로 물든 양백호의 눈빛은 그야말로 호랑이처럼 매서웠다.
하지만 장무병은 물러서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야차사령부는 임무 한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와해될 공산이 큽니다. 자소대마 장로님께는 그만한 힘이 있지요.”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 아닙니다. 령주님 말씀대로 걱정이자 조언이지요. 그것도 령주님 개인의 목숨과 사령부 전체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
양백호는 말없이 장무병을 바라보았다.
장무병은 그 눈빛에 심한 압박감을 받았다. 그에겐 든든한 뒷배가 있었지만, 양백호에게는 압도적인 실력이 있었다.
‘듣던 것보다 더한 벽창호구만!’
장무병이 살살 달래듯 말했다.
“사령부에 들어온 놈들 대다수가 어중이떠중이들입니다만, 개중에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녀석들도 꽤 있습니다. 제가 사전에 조사를 해 두었으니, 령주님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조장들 이름이 뭐지?”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질문인가?
“조장들이요?”
“일각과 이각, 삼각에서 각기 조장으로 임명된 이들이 나왔다고 들었네. 그들 이름이 뭔가?”
“그건…….”
양무병이 차갑게 웃었다.
“높으신 분 자제들 이름은 외워 뒀으면서, 지금 당장 가장 주목해야 할 조장들의 이름은 외우지 못했나?”
“……령주님.”
“조장들 모두 내 집무실로 불러 모으게.”
장무병의 눈이 흔들렸다.
“조장들 말씀이십니까?”
“꼭 두 번씩 말해야 하나?”
“……아닙니다.”
양백호가 몸을 돌렸다.
“첫날부터 명령 불복종으로 모가지 날아가기 싫으면, 그놈 죽이고 정리 똑바로 하게.”
“…….”
“이건 걱정도 조언도 아닌 충고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