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8화. 조장의 권위 (4)
이천상이 거처로 들어온 시간은 해시(亥時) 말이었다.
그 시간에도 허필은 잠을 자지 않았다. 침상에 누워 서책을 보는데, 자세가 제법 자유분방했다.
“…….”
오가는 말은 없었다.
편히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등을 켜놨기에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데에 별문제는 없었다. 그거면 족했다.
이천상은 새 옷을 들고 나가 깔끔하게 수욕을 마쳤다.
그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을 때도 허필은 책에 열중하다, 이천상이 침상을 정리할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술 냄새가 안 나는군.”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허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물어보나?”
“무엇을?”
“술 마시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는지.”
이천상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궁금해야 하나?”
“……꽤 두둑한 돈을 맡겼더군. 당연히 궁금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없으면 네가 보관하고, 있었다면 썼겠지.”
허필이 피식 웃었다.
“가진 돈이 많나? 내가 홀라당 먹어 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조원 아닌가?”
“…….”
잠시 말문이 막힌 허필이 책을 덮었다.
“조원이지만, 조장이 준 공금을 마음대로 써 버리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공금이라고 한 적 없다. 쓰려거든 마음대로 써라.”
정말이지 독특한 놈이군.
가만히 이천상을 바라보던 허필이 실소를 머금었다.
“넌 정말 이상한 녀석이야.”
“안다.”
“걱정하지 마라. 안 썼다.”
“걱정한 적 없다.”
이 정도가 되니, 허필도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투마장 출신이라고?”
“그래.”
“투마가 원래 이렇게 강했나?”
“알 바 아니다.”
“어디 출신이든, 이곳에 들어왔다면 누군가의 추천이나 강압 때문일 텐데.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군.”
“그렇다.”
너무나도 깔끔한 인정이었다. 오히려 물어본 허필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누구지? 뒤에 있는 사람이?”
침상을 정리하던 이천상이 허리를 펴고 허필을 돌아보았다.
‘…….’
왜일까?
순간 허필은 등허리가 시큰시큰한 기분을 맛보았다.
창밖의 달을 등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이천상의 눈빛은 유독 형형했다.
그 깜박임조차 없는 직시가 묘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은근한 위압감을 전했다.
“먼저 말해라.”
“응?”
“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본인이 가진 것부터 꺼내 보여야지.”
“그런 부분에서는 묘하게 세속적이군.”
“다들 그러지 않나?”
“……물론 그렇지.”
허필이 다시 책을 들었다.
“됐다. 그런 거 알아서 뭐 하겠어. 못 들은 거로 해.”
“그러지.”
너무 쉽게 포기하니, 그건 또 그것대로 김이 샜다.
이천상이 침상에 눕자 허필이 툭 입을 열었다.
“일곱이야.”
“……?”
“우리 조 말이야. 종평 그 머저리는 네가 작살내 놨고, 다른 한 명은 오늘 의방으로 실려 갔어.”
“누구지?”
“이름은 몰라.”
“마보 때문에 실려 갈 만큼 실속 없는 조원들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보 때문이 아니야. 실랑이가 있었다.”
“……?”
“삼 조(三組) 조원 한 놈과 시비가 붙었어. 죽진 않았지만 팔 한 짝이 날아갔다. 아마 다시 돌아오진 못할 거야.”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누구와 시비가 붙었지?”
“어제 살인 사건을 일으켰던 연치상이라는 놈이다.”
연치상.
이천상은 도헌의 말을 떠올렸다.
- 아주 잠깐 내전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어. 어린 녀석이 안하무인에, 엄청나게 잔인하고 폭력적이었지. 그때 그놈이 검마(劍魔) 장로님이 아끼던 시녀를 겁탈하고 죽여 버렸다. 자소대마가 어떻게든 그 일을 무마하고 교외로 쫓아 버렸어.
연치상이 쫓겨났을 때의 나이가 열여섯이라고 했다. 내전 전투 부대 예비단에서 활동한 건 고작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그 두 달 만에 귀수(鬼手)라는 별호까지 붙었다. 그것도 정파 샌님들이 붙여 준 별호가 아니라 같은 마인들이 붙여 준 별호였다. 연치상이 얼마나 사고뭉치였는지 알 수 있었다.
- 검마 장로님이 그렇게 화를 낸 건 처음이었네. 그 광경을 똑똑히 봤지. 그래서 아직도 그 연치상이라는 놈을 기억하고 있는 걸세.
그런 연치상이 지금 야차사령부로 들어왔다.
제아무리 자식이라지만 사생아였고, 그렇게 사고를 친 놈을 다시 불러들이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야차사령부로 들인 걸 보면, 그만큼 자소대마가 연치상을 아끼고 있다는 뜻이리라.
“어떻게 할 거야?”
“…….”
“정식 임명은 이틀 뒤라지만 그래도 조원은 조원이야. 단순 시비였으니 어쩔 수는 없었다 해도 그냥 넘어가면 조장의 위신이 서지 않을 텐데.”
“…….”
“조원들도 널 좋게 보지 않을 거다. 네가 다 손봐 준 놈들이니 대들진 못하더라도 신뢰에 문제가 생기겠지.”
“…….”
“내 말 듣고 있냐?”
“…….”
허필이 책을 덮고 일어나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허!”
눈을 감은 이천상의 호흡은 퍽이나 골랐다. 잠든 것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허필이 다시 누워 책을 들었다.
“정말 모를 놈이야.”
* * *
“후우.”
시원하게 세수를 마친 등무관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헉!”
한 청년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서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등무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쌍욕이 터져 나왔다.
“시발, 뭐야?!”
“삼 조장 등무관 맞나?”
“……!”
으스스한 목소리였다.
고저 없는 목소리,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등무관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난 일 조장 이천상이다.”
“……일 조장? 선임 조장?”
“그렇다.”
제길.
소매로 얼굴의 물기를 대충 닦아 낸 등무관이 께름칙한 얼굴로 물었다.
“나한테 볼일 있나?”
“그쪽 조원 하나가 우리 쪽 조원을 불구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역시 그거였군.
등무관은 짐짓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그게 뭐?”
“…….”
“왜? 사과라도 받고 싶어? 그러게 조원 관리 잘하지 그랬어.”
이천상은 말없이 등무관을 바라보았다.
깜빡임 없는 그 퍼런 안광은 상대에게 무한한 부담을 준다. 등무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불만이면 연치상을 찾아가. 난 할 말 없다.”
“할 말, 정말 없나?”
“미친, 그럼 어쩌라고? 둘이 시비가 붙어서 싸웠다고 하잖아? 지금 와서 잘잘못 따져서 어쩌자고?”
확실히 외부와는 분위기가 다르다고, 이천상은 생각했다.
호승심 넘치는 마인들에게 싸움은 일상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의 시비가 터지고, 와중에 다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상대를 병신으로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어쨌건, 교외 세상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그리고 외전은 특히 심하다.
투마장의 경우 그 특성상 이보다 훨씬 원초적이지만, 하루하루 죽음의 불안함을 껴안고 살아가기에 이해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내전의 경우 워낙 권력이 밀집된 곳이라 사건 사고가 거의 터지지 않는다. 어느 한쪽에서 사고가 터지면 그에 연관된 이들이 줄줄이 박살 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시비나 싸움은 외전에서 훨씬 많이 벌어진다. 그래서 싸움이 벌어지고 누구 하나가 박살이 나도 별일 아닌 것으로 넘어가는 일이 흔하다.
문제는, 정식 훈련에 들어가기 전이라도 명백히 같은 조직원이라는 것이다.
“시비가 걸렸으니 알아서들 해결할 일이고 결과도 개인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건가?”
“새삼스럽게 왜 물어?”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이천상의 얼굴에서, 등무관은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껄끄러운 새끼네.’
등무관이 몸을 돌렸다.
“마음에 안 들면 그놈 찾아가서 해결 봐. 말리진 않을 테니까.”
그때였다.
퍽!
“윽!”
등무관이 비틀거리며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뭐야?”
손바닥에 핏물이 묻어났다.
시선을 내리니 아까까지 없었던 돌멩이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나 흉기입네, 하고 외치는 듯한 짱돌이었다.
“뭐야, 시발!!”
욕설과 함께 몸을 돌린 등무관이 이천상을 노려보았다.
이천상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시비다.”
“뭐?!”
“시비를 걸었으니 결정해라. 싸울 것인지, 꼬리를 말고 돌아갈 것인지.”
“…….”
“나는 아무래도 좋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파아악!
발작적으로 달려든 등무관이 이천상의 안면에 주먹을 휘둘렀다.
순간 이천상의 눈이 황금빛 광채로 물들었다.
콰득!
“크악!”
주먹과 주먹의 충돌, 결과는 등무관의 패배였다.
기괴하게 꺾인 손목과 금 간 주먹을 다른 쪽 손으로 감싸듯 가린 그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천상의 정강이가 등무관의 좌측 얼굴로 날아들었다.
빠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등무관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풀썩.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등무관의 눈이 멍해졌다.
벌린 입에서는 핏물에 섞인 이빨들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입을 닫고 싶어도 턱뼈가 부러져서 닫을 수가 없었다.
“어…… 어……?”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허우적대는 등무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이천상이 사납게 발을 내질렀다.
퍼억!
정통으로 턱이 맞은 등무관이 벌러덩 쓰러졌다.
그러고도 등무관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양팔을 허공으로 허우적거리는데, 기절만 하지 않았을 뿐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두둑!
등무관이 입을 쩍 벌렸다. 왼쪽 팔목도 부러져 버린 것이다.
발을 털어 낸 이천상이 그의 오른 발목을 잡아 올렸다.
스르르르.
등무관의 발목을 잡은 채 걸어가는 이천상의 모습은 한가로워 보일 정도였다.
사람 하나를 순식간에 망가트렸으면서도 죄책감이나 동정심, 미안함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게 등무관을 질질 끌고, 이천상은 일각으로 향했다.
“어? 뭐, 뭐야?!”
“헉!”
“시발, 깜짝이야! 누구냐, 쟤들?”
“미친…… 아예 작살을 내 놨네. 뭐야, 저놈들?”
밖에 나와 있던 마인들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등무관의 꼴도 지독하지만, 망가진 사람을 짐짝처럼 끌고 가는 이천상의 행동은 기묘한 공포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그 행위 자체도 그렇지만, 전혀 흥분한 것 같지 않은 표정 때문에 더더욱 무섭다. 마인들의 얼굴에는 평소의 호승심 대신 껄끄러움과 당혹감만이 가득했다.
워낙 인상적인 광경이었을까?
이천상을 보는 마인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천상은 일각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툭! 드르륵! 툭!
계단을 올라갈 때도 자비는 없었다. 등무관의 머리가 계단에 부딪히면서 살벌한 소리를 냈다.
두피며 얼굴 할 것 없이 온통 찢어져 피가 흘렀다. 물론 이천상은 등무관의 상태에 관심이 없었다.
“……?!”
삼 층으로 올라서자 마침 나오는 허필과 마주쳤다.
“너?!”
이천상의 손에 잡힌 사람을 확인한 허필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너 미쳤냐?”
“비켜라.”
한층 묵직해진 목소리에 허필은 저도 모르게 길을 열어 주었다.
덜컹! 덜컹!
멀찍이 떨어진 방들의 문이 열리고 마인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중에는 주연교도 있었다.
“헉!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말없이 주연교까지 지나친 이천상이 칠 호 문을 걷어찼다.
콰득!
부서진 문 너머로 세 명의 마인이 보였다.
그중 둘은 두려움을 가득 머금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하나는 거만한 자세로 껄껄거리며 웃고 있었다.
“응?”
연치상이 고개를 돌렸다.
문이 부서졌는데도 달리 놀란 기색은 없었다.
“뭐냐, 넌?”
이천상이 등무관을 던졌다.
쿵!
두 마인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연치상은 여전히 앉아 있었지만, 눈빛이 변해 있었다.
이천상이 손을 털었다.
“조장 다시 골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