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2화. 단단한 줄 (2)
이천상은 목을 가만히 매만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죽일 의도가 없었던 이 행위는 목에 흔적만 남길 뿐,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 못했다.
“…….”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천상의 눈은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반대로 양백호의 눈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만 가라.”
한숨을 푹 쉰 양백호가 힘없이 몸을 돌렸다.
“연치상 때문이라면, 앞으로 괜찮을 것이다.”
“…….”
“한 번만 더 주제넘은 행위를 보인다면, 그때는 반드시 처벌할 것이다. 이만 돌아가라.”
“그게 끝입니까.”
몸을 홱 돌린 양백호의 눈에 다시 불이 붙었다.
“네놈의 무례함은 도를 넘어섰다! 뭘 더 바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내 알 바가 아니야!”
“…….”
“그 건방을 떨고도 사지 멀쩡히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라! 당장 꺼져!”
“연치상 때문이 아니라 이 부대를 위해 왔습니다. 한데 어찌 그놈 얘기만 하십니까.”
“……!!”
“죽은 조원들을 잊으셨습니까.”
“…….”
“팔 하나가 날아간 제 조원에게 찾아가실 생각은 있습니까.”
양백호의 표정은 가뭄이 난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공사가 분명한 분이라고 알고 왔습니다.”
“…….”
“죽은 부하에게 조문을 가고, 다친 부하에게 찾아가 무사를 기원하는 것이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해선 안 될 일이었습니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
양백호의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멍한 얼굴, 흔들리는 눈빛.
그야말로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렇게 독한 원칙주의자라고 소문이 자자한 양백호가 보일 얼굴이 아니었다.
망가져 버린 것이다.
이 한 번의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전부터 무수히 겪어 온 상부의 압력에 지쳐 버린 것이다.
이번만큼은 괜찮을 거라고, 이번만큼은 제대로 달려 보겠다고 왔지만 현실은 언제나 똑같았다.
상부의 힘과 탐욕은 갈수록 커져만 갔고, 양백호의 의지는 닳고 닳아 무뎌진 도끼날이 되었다. 처음 입교할 때의 그 천하 명검과 같았던 의지와 정신력은, 수십 년이 지나 본래의 빛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물끄러미 양백호를 보던 이천상은, 슬슬 물러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여기까지군.’
생각할 시간을 줘야 했다. 양백호의 상태를 간파해 내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이렇게까지 정신을 좀먹을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강했던 사람이다. 이천상은 양백호를 그렇게 분석했다.
높은 자존감과 자신감. 그 강철처럼 단단했던 정신력으로 수십 년을 버텼다.
돌아갈 길을 찾았다면 좋았겠지만, 지금껏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해야 할 거다. 지금껏 여러 사람을 보고, 수없이 많은 사람의 행동 양식과 정신력, 특성을 분석했지만 이렇게까지 강단 넘치는 사람은 도헌 외에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도헌이 받아들이는 게 빠르고 조금 더 유연했다면, 양백호는 조금의 휘어짐도 없는 뻣뻣한 강철 막대였다는 게 달랐을 뿐이다.
이천상이 포권을 취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이천상의 행동은 냉정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졌다.
‘며칠은 두고 봐야겠군.’
한번 연치상을 잡아 보겠다고 말을 한 이상, 진짜로 잡아 버리면 도리어 문제가 될 것이다.
양백호에게 생각할 시간을 줌과 동시에 체면도 챙겨 줘야 했다. 체면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통보하다시피 하고 연치상을 잡는다? 그때는 양백호도 자신을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천상이 이해한 세상이었다.
‘그것이 세상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드르륵.
이천상이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한 그때였다.
“왜냐.”
“……?”
“왜 내게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냐?”
미묘하게 바뀐 말투.
그 바뀐 말투가, 양백호의 정신 상태를 말해 준다.
‘더 거칠어졌지만, 동시에…….’
깊게 들어가도 된다.
사적으로 접근해도 되는 것이다.
‘이 단계까지 오는 데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을 벗어났다. 양백호가, 자신이 계산한 대로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를 다소 조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천상이 문을 닫고 말했다.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이냐?”
“지금 이 현상이 말입니다.”
“……!”
“강자존이 아니더라도 상관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조직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면, 상관이라도 외압을 넣는 것은 부당합니다.”
“…….”
“당연히 외압에 굴복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양백호의 꽉 다문 턱 근육이 불거졌다.
“내가 죽으면 내가 아는 세상도 사라지는 겁니다. 당연히 나의 생존이 일 순위이니, 그 선택을 최선이라 여길 것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뭐?”
“그러나 한 번 굴복했다고 해서, 그러한 세상을 타파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타파라.”
“평생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거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완전히 굴복하든지, 아니면 세상을 바꾸든지.”
“……!!”
“저는 전자보다 후자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
딱딱하고 진부한 말 속에 미래를 향한 답이 있다.
이천상의 말을 들은 양백호의 눈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한 번의 굴복으로 끝이 아니라고?”
“여러 번 굴복해도 끝은 아닙니다. 언젠가 나를 바꿀 수 있다면.”
“…….”
“다만, 그 변화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겁니다. 그 한 번의 굴복으로 피해 볼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챙겨 가며 살아갈 수는 없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하지만, 나 자신부터 변화하지 않는다면 단 한 사람도 챙길 수 없다. 나아가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도 없다. 그래서 한 번의 굴복으로 피해 보는 많은 사람 중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나의 변화가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첫 시작이다.
“그래서.”
혼란에 휩싸였던 양백호의 눈이 서서히 바로잡혔다.
“네놈 역시 조직의 규율과 법도를 무시하고 그놈을 잡겠다는 말이냐?”
애초에 규율과 법도를 세운 적이 없다.
하지만 이천상은 양백호의 말을 이해했다. 그가 말하는 규율과 법도는 상식을 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자, 형법당에 보내지 않고 직접 처벌할 권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야차들의 명줄을 쥐고 있다는 것은 곧 사령부에 대한 모든 권한이 령주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
“령주님의 허락이 떨어지면,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양백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것이냐?”
“책임을 회피하고 싶으십니까?”
“뭐?”
“그놈을 죽인 놈이나 죽이라고 사주를 한 놈이나, 자소대마 장로가 보기에는 똑같은 놈들입니다.”
“……!!”
나 역시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이천상의 말은 그러한 뜻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양백호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책임 운운하며 저를 떠보고 싶으시다면, 차부터 한 잔 내주십시오. 말 상대가 되어 드리지요.”
“…….”
“미리 말씀드리지만, 훌륭한 담소 상대가 되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
놀라운 건 저 물러남 없는 발언들 하나하나가 양백호의 폐부를 찌르고 있다는 것이다.
양백호가 눈을 감았다.
“…….”
이천상은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양백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래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과거를 떠올리고 있을까? 그도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현재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만은 이천상도 유추할 수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양백호의 다음 발언을 통해 어떤 식으로 그를 쥐고 흔드는가 뿐이었다.
잠시 후.
“진심이냐?”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이것이 올바르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냐?”
이천상의 얼굴에 옅은 피로가 어렸다.
“사람들이 왜 진심을 묻는지, 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음이 항상 의아하고 피곤하다.
진심이기에 말을 한다. 진심이 아니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이천상에게는 기본이었다.
그 당연한 것을 자꾸만 확인하려 드니, 머리가 안 아프고 배기겠는가.
‘…….’
의도한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천상의 그러한 모습이, 양백호에게는 정말 큰 울림을 주었다.
‘진심이다.’
이 기묘하고 대담한 놈은 진심을 안고 이곳으로 찾아왔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천상에 대한 분노는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이런 인재가 아직도 신교에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자신 역시 그랬기 때문이었다. 이놈과는 달랐지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궁금한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어디에서도 쉽게 할 말은 아니다. 네 말마따나 자신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지.”
“……?”
“목숨을 걸고 왔느냐?”
“오늘을 사는 것은 곧 하루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일입니다.”
“…….”
“저는 언제나 목숨을 겁니다. 그래야 내일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들었던 말 중, 가장 심장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양백호는 한 번 더 물었다.
“너의 발언은 하나같이 대담하고 진실했지만, 그만큼 거칠었다. 만약 내가 널 죽이려 들었다면 그땐 어쩔 생각이었느냐?”
“목숨을 걸고 그러지 않게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그 뒤는 없습니다.”
“그러지 않게 만들었다고? 나를?”
“그렇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너의 의도대로 나의 의지를 조종이라도 했다는 말이냐?”
“의지를 조종할 수는 없어도 필요한 말은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양백호가 쓰게 웃었다.
“목숨을 건 도박에 성공했구나.”
“그렇습니다.”
“그로써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냐?”
“그렇습니다.”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양백호는 사령부의 수장임에도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이 가장 잘 느끼고 있을 것이다.
부령주도, 세 명의 각주도 령주의 명령을 거부했다. 앞으로 날뛰게 될 연치상을 방치하면, 야차들 전체가 양백호를 등한시할 것이다.
그러한 현실과 다가올 미래를 양백호 역시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을 터.
‘사람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혼자라는 소외감, 외로움.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와서도 되풀이되는 패배뿐인 현실.
단어 선택만 신중히 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유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유대감은 곧 친근감을 형성하니, 거기까지만 가면 나머지는 비탈길을 굴러가는 바윗돌이나 마찬가지다.
“올바르지 않은 결정도 결정이다. 이미 내려진 결정을 번복하고 연치상을 처벌할 수는 없다.”
여전히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양백호는 양백호였다.
“알겠습니다.”
“하나 묻겠다.”
양백호의 얼굴에 순수한 의문이 깃들었다.
“대체 그놈을 어떻게 잡을 생각이었느냐?”
“잡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놈이 끝이 아닙니다.”
이천상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맺혔다.
“목표는 그놈이 아니라 사령부 전체이고, 그놈은 사령부를 위한 공물이 되어야 합니다.”